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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56)화 (56/120)
  • 56화

    “그래. 내 방을 비워 두라고 해.”

    “여자는…….”

    “금발.”

    말했던 트로우 경이 페이로즈를 떠올렸다. 요정이라 부르며 어쩔 줄 모르던 더포드 남작의 표정도 생각났다.

    비릿한 웃음을 머금은 그가 말을 바꿨다.

    “아니, 붉은 머리로 준비하라고 해라.”

    ❀ ❀ ❀

    “우리 레아한테…… 무슨 액이 끼었나?”

    납치당할 뻔한 그녀를 헬릭스가 구해 오자, 피어트 공작은 의자에 주저앉아 한동안 일어나질 못했다.

    그가 탄식했다.

    “그동안 독살 시도에, 사교계에서는 헛소문에다 갖다 붙이더니, 이번엔 납치까지. 죽을 운명인 애를 살려서 이런 일이 자꾸 생기는 건가…….”

    “아버지, 무슨 약한 소리세요. 이럴 때일수록 레아를 지켜야죠.”

    소공작 리케일의 말에 공작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레아는?”

    “많이 놀랐는지 앓아누웠어요. 헬릭스가 옆에 있으니까 곧 나을 겁니다.”

    그때 공작의 개인응접실 문이 열리며 헬릭스와 루얀이 들어섰다.

    “헬릭스, 잘 왔네. 레아는 어때?”

    “이제 많이 진정되었다. 공작부인이 잠시 맡아 주신다고 하더군.”

    세 부자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헬릭스는 그들이 안심할 틈을 주지 않고 말을 꺼냈다.

    “레아는 자기 납치범이 아르카이크 황자인 것 같다고 하던데.”

    “뭐?”

    그는 놀란 피어트 공작가 남자들에게 내처 다 말했다. 그자가 레아를 마법사로 만든 드래곤 마나의 주인이며, 북부에서 귀환할 때 일행을 죽이려고 불을 지르고 수면마법을 걸었던 범인이라고.

    “아무래도 어딘가 모자란 드래곤이거나, 드래곤과 강하게 계약한 것 같다. 드래곤이라기엔 미숙한데, 인간은 가질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더군.”

    “……확실히 거기에 맞는 인물이라면 오켄 제국의 아르카이크 황자밖에 없군.”

    곰곰이 생각해 보던 리케일이 말했다.

    “우리 페이런 왕국에서는 드래곤을 전설로 치부하지만, 오켄 제국은 다른 것 같던데.”

    “어떤 점이 다른가?”

    “오켄 제국에선 황실이 드래곤의 후예라고 자처하고 있거든. 최근 드래곤이 부활했다고, 아르카이크 오켄 황자가 드래곤의 화신이라고 주장한다고 들었어.”

    의외의 정보에 헬릭스가 눈빛을 빛냈다.

    “소공작이 생각하기엔 그 주장이 신빙성 있다고 보나?”

    “아주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닐걸. 아르카이크 황자는 황제의 많은 아들딸 중에서도 제일 황위에서 먼 자식이었으니까.”

    아르카이크 황자의 외가는 한미한 자작가라, 황위 싸움을 지지하기는커녕 제 딸을 지켜 주지도 못했다고 했다.

    “그 정도 가문이면 왜 딸을 황궁에 들여보냈단 말인가.”

    “능력은 없으면서 욕심만 많았던 거지.”

    리케일이 말을 이었다.

    “지어낸 얘기라면, 굳이 그런 배경을 가진 아르카이크 황자를 드래곤의 화신이라고 밀 이유가 없지 않겠어? 그러니 그에게 뭔가 있다고 보는 게 맞겠지.”

    “으음.”

    피어트 공작과 리케일은 아르카이크 황자와 제국 쪽의 동향을 더 파악해 보겠다고 했다. 루얀은 지금 제가 나서 봤자 도움이 안 된다는 걸 깨닫고 수련을 하러 갔다.

    “루얀, 꼭 명상과 마음수련만 해야 하네.”

    “……왜 다들 날 목줄 풀린 맹견 취급하는 거냐?”

    루얀은 툴툴거리면서도 차마 저와 레아의 은인인 헬릭스를 한 대 치진 못했다.

    ❀ ❀ ❀

    레아는 털고 일어나자마자 헬릭스와 함께 마스터를 찾아갔다.

    “내가 납치당할 뻔하고 생각을 해 봤는데 말이야.”

    그녀가 눈을 번득였다.

    “아르카이크 그놈이 페이런 사교계에 정보망이 있는 거 같아.”

    “레아, 그게 무슨 소린가?”

    “그게 있잖아, 헬릭스 네가 없는 동안…….”

    레아는 그동안 서러웠던 감정과 울화를 마구 섞어서 얘기했다.

    장미와 백합의 전쟁, 더포드 남작의 징글징글한 구애에서 달아나던 세이건 공녀, 남작과 협조하는 듯 보였던 위프트 백작부인, 세이건 공녀와 더포드 남작의 실종과 피 묻은 털목도리 등.

    헬릭스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분노에서 혐오로, 다시 분노로 변해 갔다.

    “……그래서 레아 너와 루얀이 누명을 썼단 말인가? 그 둘을 해쳤다고?”

    “응. 말이 돼? 헬릭스 나 진짜 욕봤지!”

    “고생이 많았다.”

    짧은 한마디였지만 애끓는 심정이 목소리로 느껴졌다. 레아는 배 속에 고여 있던 울화가 샤악, 한 방에 날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 역시 헬릭스가 내 치료제야…….”

    “언젠 충전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치료도 하고 충전도 하고 만능이지. 어쩐지 없는 동안 너무너무너무 힘들더라.”

    레아가 폭 한숨을 쉬며 헬릭스의 팔을 껴안고 기댔다. 그의 딱딱한 얼굴에 갈등이 어리는 순간, 그녀가 벌떡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아르카이크 황자가 그걸 알고 있었어.”

    “뭐?”

    “예?”

    헬릭스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나는 투명인간이다, 내 사무실이지만 지금 나는 투명인간이다 하고 자기 세뇌를 하고 있던 마스터도 놀라 반문했다.

    레아가 말을 이었다.

    “알고만 있는 게 아니라 이용하려고 했어. 내가 납치당해도 페이런에서는 죄짓고 무서워서 도망친 걸로 알 거라고, 이대로 국경을 넘으면 마차를 갈아타고 신분도 새 신분으로 바뀔 거라면서…….”

    말하다 보니 와락 공포가 밀려왔다. 그때는 너무 놀라서 듣고만 있었는데, 지금 와 다시 생각하니 정말 위험한 상황이었다.

    “와아, 헬릭스가 안 왔으면 진짜 그 말대로 됐겠지? 마차에 털목도리처럼 증거 몇 개 남겨 두면 꼼짝없이…….”

    “레아, 더 말하지 마라.”

    헬릭스가 그녀의 손을 잡고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 생각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일어났을 텐데? 헬릭스가 안 왔으면…….”

    “그러니까 그런 일이 없단 소리다.”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국경을 넘든 어디로 가든, 수호자가 계약자를 그냥 놔둘 것 같나.”

    “그렇습니다, 공녀님. 수호자님은 계약자를 위험 속에 두실 분이 아닙니다.”

    헬릭스를 거든 마스터가 레아의 말을 곱씹었다.

    “확실히 그 정도면 아르카이크 황자가 페이런에 정보망을 가지고 있는 게 확실하군요.”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어쩌면 정보망 정도가 아니라…… 일을 함께 꾸몄을 수도 있겠습니다.”

    “일을 함께 꾸며? 누구와?”

    “누구겠습니까?”

    되물은 마스터가 말했다.

    “최근, 트로우 백작 측에 제국 쪽 인사들이 더 드나든 것 같더군요.”

    ❀ ❀ ❀

    레아는 생각했다.

    ‘마법의 신님, 정의로운 화염방사기가 되는 걸 허락해 주세요.’

    이대로 트로우 백작저에 가서 파이어월로 가둬 버릴까? 트로우 가문을 지도와 귀족명부에서 지워 버리면 세상에 좋은 일을 하는 게 아닐까?

    “레아, 진정해라! 아르카이크 황자가 트로우 백작과 한편이라면, 놈이 네가 마법 쓰는 걸 방해할 거다!”

    헬릭스의 말에 그녀는 아주 조금 냉정해지는 기분이었다.

    “하긴…… 그 치사한 놈이라면 불길을 다른 쪽으로 돌려놓고 다 나한테 뒤집어씌울 수도 있어.”

    “바로 그렇게 나쁜 쪽으로 발상 전환하시다니, 피어트 공녀님은 공작가보다 저희 쪽 일이 적성에 맞으시는 거 아닙니까?”

    레아는 마스터의 ‘저희 암흑길드는 우수한 인재를 언제나 환영합니다!’라고 쓰인 눈빛을 못 본 척했다.

    “헬릭스 말이 맞아. 그놈은 나나 카라이처럼, 같은 마나로 각성한 사람을 지배할 수 있으니까. 그놈한테 더 휘둘릴 순 없지.”

    “잘 생각했다. 우선 수면마법 후유증부터 처리하는 게 급선무다.”

    헬릭스의 말에 레아가 마른침을 삼켰다.

    “북부에서 소득이 있었어?”

    헬릭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드래곤이 건 마법을 해제하려면 비슷한 급의 드래곤 마법이 필요하더군. 그래서 익혀 오긴 했지만…….”

    그래서 오래 걸렸구나. 납득한 레아가 뒷말을 기다렸다.

    “그 마법이 제대로 효과를 보려면 드래곤의 마나가 있어야 한다.”

    “최대한 드래곤 마법인 척해야 한다는 거야?”

    “바로 그거다.”

    레아는 끙하고 미간을 좁혔다.

    “그럼 제국 쪽으로 드래곤 마나를 알아봐야 하나. 마스터, 혹시 제국 쪽에 줄 있어?”

    “……드래곤 마나를 얻을 정돈 아닙니다. 그 정도는 제국의 황실 쪽과 줄이 닿아야 할걸요.”

    “으으음.”

    레아가 끙끙댔다.

    피어트 공작가가 잘나간다 해도 페이런 왕국에서일 뿐, 훨씬 대국인 데다 페이런 왕국을 속국 대하듯 하는 오켄 제국에선 통하지 않을 터였다.

    “어디서 드래곤 마나 좀 못 구하나? 아르카이크 황자 그놈 말고, 딴 데서.”

    방법은 뜻밖의 곳에서 나왔다.

    “공녀님, 수면마법 후유증을 없애는 데 드래곤 마나가 필요하다면서요? 그거 비약 형태여도 되나요?”

    얘기를 들은 카라이가 나섰던 것이다.

    “비약? 되지. 당연히 되지!”

    “다행입니다. 그거라면 제가 얻을 방법을 알고 있는데요.”

    “뭐? 어떻게?”

    카라이가 목소리를 낮췄다.

    “얀 트로우가 비약을 가지고 다니거든요.”

    ❀ ❀ ❀

    카라이는 레아와 헬릭스, 피어트 형제에게 설명했다.

    트로우 백작의 장남 얀 트로우 경이 어떤 놈이고, 왜 비약을 가지고 다니는지.

    그는 제 아비에겐 찍소리 못하면서 그 울분을 아랫사람들에게 푸는 인간이었다.

    ‘내가 누군지 알아? 어?’

    그는 철저히 비밀로 관리되는 비약을 하나씩 빼돌려 가지고 다니면서, 술에 취하면 자랑하곤 했다.

    ‘내가 이렇게 귀하고 비밀스러운 물건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야. 게다가 이 물건이 얼마나 위험한 줄 알아? 한 방울이면 그냥 슥삭!’

    레아가 어이없어했다.

    “생각보다 더 찌질한 놈이었잖아?”

    카라이가 활짝 웃었다.

    “아주, 매우, 격하게 찌질한 놈입니다. 주인님.”

    루얀이 양손을 깍지끼며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럼 얀 트로우를 털자.”

    “털어서 비약을 훔치자고?”

    끄덕.

    당연한 거 아니냐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루얀 피어트. 얼굴 하나만은 요정과 천사를 섞은 듯했다.

    레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작은오빠 도둑질만 할 거 아니잖아. 팰 거지.”

    “며칠 못 걸을 정도로만 때릴게.”

    “그거 강도거든? 오빠가 때리면 죽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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