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이거 내 생각보다 일이 심각한 거 아니야?’
한 자선바자회에 참여했다 돌아가는 길, 레아는 마차 안에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장미와 백합의 전쟁이니 뭐니, 처음에는 그냥 저를 대상으로 하는 흔한 사교계 악성 루머인 줄 알았다. 그런데 소문은 생각보다 끈질겼고, 최근 세이건 공녀와 더포드 남작이 행방불명된 뒤로는 더 집요하게 그녀를 범인으로 몰았다.
한번 베푼 친절이었던 털목도리는 증거로 탈바꿈해 버리고, 작은오빠 루얀은 요새 사교계에 출입도 안 했는데 저 때문에 오해를 뒤집어쓴 지 오래였다.
그래도 이러다 말겠지 하고 넘겼는데…….
‘내가 오늘 바자회에 사파이어 귀걸이를 반값에 내놨는데 아무도 입찰을 안 하다니!’
평소 같으면 페이릴리가 했던 귀걸이라고 몇 배로 뛰고 프리미엄이 붙을 물건이었다. 전생 자본주의 사회에서 굴렀던 감이 말하고 있었다.
‘위험해. 이걸 안 살 정도로 내 평판이 손상됐다는 이야기잖아.’
얼른 대책을 세워야겠다 결심한 레아가 마부를 재촉하려 할 때였다.
텅.
마부석에서 뭔가 이질적인 진동이 느껴졌다. 묵직한 게 벽을 치며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녀가 숨을 삼키는 순간, 소리 없이 마차 문이 열렸다.
검은 복면을 쓴 이가 레아에게 덤벼들었다.
“사라……!”
비명을 지르려던 몸이 내리눌렸다.
그녀의 입을 막고 짓누른 복면인의 눈이 보였다. 새카만 눈동자가 레아를 담으며 빙글 휘어졌다.
검은 머리, 검은 눈.
여관에서 마주쳤던 그 남자였다.
“너, 너는……!”
“아르카이크.”
남자의 말에 그녀가 눈을 부릅떴다.
‘납치범이 이름을 왜 알려 줘?’
어떻게든 제 정체를 숨기려는 게 보통 아닌가. 레아는 불길한 기분에 몸을 굳혔다. 이름을 알려 줘도 상관없다는 건가? 곧 죽을 테니까?
아르카이크의 미소가 짙어졌다. 공포에 질려서도 이쪽을 보며 머리를 굴리고 있는 게 빤히 보이는 제 마법사라니.
깜찍하기도 하지. 아르카이크가 마른 입술을 핥았다. 사냥에 성공한 것처럼 배부르고 느긋한 기분이었다. 그는 레아를 향해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잘 외워 둬라. 너는 이제 이 이름만 부르고 살게 될 테니까.”
“뭐?”
반문하는 레아의 입술을 아르카이크가 손바닥으로 내리눌렀다. 그가 속삭였다.
“넌 이대로 도망치는 거다.”
그녀의 푸른 눈이 흔들렸다. 아르카이크는 그 표정이 마음에 들었다.
“자기 죄와 그에 따른 벌을 감당 못 한 철부지 영애가 도망친 걸로 하지. 이대로 국경까지 가서 다른 마차로 갈아타면 네 신분은 바뀌어 있을 거다. 페이런의 레아 피어트 공녀가 아니라 내 마법사에게 어울리는 새로운 신분으로.”
레아는 상황을 깨달았다.
아무 연관 없는 세이건 공녀의 실종이 왜 자신을 걸고넘어졌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이렇게 납치하려고 벌인 일이었던 것이다.
세이건 공녀가 사라진 뒤 피 묻은 털목도리가 발견됐던 것처럼, 자신이 납치된 후 이 마차 안에서 더포드 남작과 세이건 공녀의 옷가지며 손수건 따위가 같이 나올 터였다.
그리고 이 모든 걸 꾸민 놈은 사교계에서 여론몰이를 할 게 빤했다.
‘역시 세이건 공녀와 더포드 남작의 실종에 레아 피어트가 연관되어 있었던 게 맞았어! 그런 죄를 지어 놓고, 감당 못 하겠으니 국경 너머로 도망쳤구나!’
저도 모르는 사이, 생각지도 못한 함정에 이렇게 깊게 빠져 있었을 줄이야. 레아는 억울하고 분하고 무서웠다.
눈앞의 남자와 일을 꾸민 놈들이 원하는 대로, 그대로 될까 봐 너무 무서웠다. 아르카이크를 노려보며 부릅뜬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레아가 도리질 치며 물었다.
“……나한테 왜 이래?”
“너야말로.”
아르카이크가 그녀를 집요하게 쳐다봤다. 그녀가 흠칫하자 그의 미간이 구겨졌다.
“왜 날 거부하지?”
납득이 안 간다는 목소리였다.
“왜라니?”
레아는 기가 차서 되물었다.
“그게 사람 납치하면서 할 소리야?”
“지금 나한테 따지는 건가?”
진심으로 놀라워하는 표정이었다.
“너는 어차피 내 것이 아닌가. 내 마나로 만들어진, 내 마법사.”
그녀는 아르카이크를 망연히 쳐다보았다. 검은 눈동자에 언뜻 금색 불꽃이 일렁였다.
‘헬릭스가 황금색 눈은 드래곤의 눈이라고 말했지.’
예전에 헬릭스가 했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레아, 드래곤은 제 것, 특히 제 마나에 대한 소유욕이 남다르다. 네가 얻은 드래곤 마나의 원주인인 드래곤이 살아 있다면 놈은 반드시 네게 집착할 거다.’
이놈이 헬릭스가 말한 그 미친 드래곤이었다.
‘어떡하지? 헬릭스!’
레아는 속으로 그를 부르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놈 네가 말한 것보다 더 미친 거 같아.’
❀ ❀ ❀
입술을 깨문 레아를 아르카이크가 탐욕스럽게 쳐다보았다. 역시 달랐다.
‘마법사.’
아르카이크는 다른 인간들과 있는 시간이 끔찍했다.
시간을 길게 늘리고 있는 것처럼 지루하고 갑갑하며 하찮은 느낌.
마치 아카데미에 다녀야 할 인재가 시골의 학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소드마스터가 되어야 할 재목이 손에 갈퀴만 들고 농사일에 매인 듯, 늘 저와 맞지 않는 세상에 갇힌 듯 느껴졌다.
그렇지만 레아 피어트는 달랐다.
‘내 마나로 만들어진 마법사.’
무채색 세상에서 그녀만 환히 빛을 뿜는 듯, 생기와 마나가 느껴졌다.
당연히 그를 따라야 하는 존재인데.
아르카이크는 레아가 왜 저에게 적개심을 보이는지 생각했다. 그의 검은 눈이 가늘어졌다.
“……그 은발 놈 때문이냐?”
낮게 으르렁대는 소리에 레아가 놀라며 움츠러들었다.
‘맞군.’
확신한 아르카이크가 레아의 어깨를 짚었다.
“내가 네 주인이다. 너는 그걸 좀 더…… 확실히 깨달아야겠어.”
드래곤의 압도적인 기운이 그녀를 찍어 눌렀다.
뱀 앞의 개구리처럼 굳는 순간, 레아는 계약자의 반지를 꽉 감싸며 속으로 부르짖었다.
‘헬릭스!’
휘이이이…….
그 순간 바람에 마차가 뒤로 기울었다.
콰광!
아름드리나무가 쓰러지며 마차를 가로막아 말들이 길게 울었다. 뒤로 앞으로 거세게 흔들린 마차 안에서, 레아는 영문을 모르고 헐떡였다.
분노한 아르카이크가 손을 뻗었다.
“네 짓이냐?”
“내가 알아?”
“이 건방……!”
또다시 레아를 겁박하려던 아르카이크는 그녀에게 뻗던 손으로 제 목을 긁었다. 분명 말을 하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황자님!”
마차 문을 급히 열던 복면인이 쓰러졌다. 멈춘 마차 밖으로 복면인이 네댓 명쯤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지금이야!’
지금이야말로 도망칠 때라고, 레아의 본능이 외쳐 댔다. 그녀는 일어서려고 애썼다. 그렇지만 온몸의 정기가 쫙 빨려 나간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옆에서 목을 잡고 바닥을 긁고 있던 아르카이크가 레아의 발목 쪽으로 손을 뻗었다.
포퐁.
갑자기 익숙한 마나가 몸으로 쏟아져 들어오며, 단단한 팔이 그녀를 끌어당겼다.
“헬릭스?”
“잠깐밖에 못 하니 서둘러야 한다.”
레아를 안아 든 품이 긴장으로 딱딱했다. 그녀는 헬릭스의 품에 안겨 마차 밖으로 나왔다. 말과 복면인들이 하나같이 거품을 물며 쓰러져 버르적거리고 있었다.
“자, 잡아……!”
마차 안에서 아르카이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복면인들은 까무룩 눈을 뒤집으면서도 그 명령을 듣기 위해 레아에게 손을 뻗었다.
‘뭐야, 이놈들? 좀비 같아……!’
맹목적인 복종에 소름이 돋았다. 레아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는 사이, 헬릭스는 쓰러진 말 한 마리를 마차에서 풀더니 마나를 넣어 끌어왔다.
“레아, 어서!”
마나로 생기를 찾은 말 위에 그가 레아를 태우고 훌쩍 올라탔다.
히이잉. 말은 홀로 살아 있는 소리를 내며 빠르게 달렸다. 고삐를 쥔 그녀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그 손을 헬릭스가 가만히 감쌌다.
“헬릭스, 어떻게 한 거야?”
“그놈과 주위 마나를 흡수했다.”
수호자의 능력 중에 마나를 흡수하는 게 있다고 했었지. 직접 겪으니 무시무시한 능력이었다.
“마나가 흡수돼서…… 그런 느낌이었구나.”
“지금 힘으론 잠깐밖에 유지되지 않으니 빨리 멀어져야 한다.”
❀ ❀ ❀
수도의 밤.
피어트 공작가가 들썩이는 동안, 다른 귀족들은 유흥을 즐기고 있었다.
“킥…….”
파티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트로우 경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는 요즘 기분이 매우 좋았다.
‘일을 잘 처리했더구나.’
트로우 백작에게 오랜만에 칭찬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 멍청한 더포드 남작이 이렇게 쓸모 있을 줄이야.’
트로우 경은 더포드 남작이 싫었다.
사생아 주제에 왕실의 일원이라 거들먹대는 꼴이며, 자신이 아직도 예전의 훤칠했던 외모인 줄 알고 자신만만한 모습. 툭하면 칼로시 대공에게 손 벌리면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것까지, 도대체가 거슬리지 않는 구석이 없었다.
그런데도 비위를 맞춰 왔던 건 놈을 잘 감시하라는 아버지의 말 때문이었다.
‘이제 그놈에게 굽실거리지 않아도 된다니, 속이 다 시원하군!’
마음이 풀어지고 들뜨자 다른 곳에 관심이 쏠렸다.
‘오랜만에 비밀클럽에 가 볼까?’
아버지와 사교계의 눈치를 살피느라 제대로 놀아 본 지도 꽤 되었다. 그의 구미에 맞는 신입들을 마담이 잔뜩 대기시켜 놨을 것이다.
‘지난번 그 계집애는 영 아니었어. 아무리 예쁘면 뭐 하나. 그렇게 기가 세서야.’
그는 고분고분한 여자가 좋았다. 겁먹은 여자도, 그를 우러르는 여자도, 비위를 맞추기 위해 필사적인 여자도 괜찮았다. 그러다 손쉽게 버릴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었다.
비밀클럽으로 흘러드는, 굶주림에 못 이겨 몸을 팔아 보겠다고 나서는 촌구석이나 빈민가 출신의 신입 창녀들.
그 여자들이 서툰 몸짓과 필사적인 표정으로 그의 마음에 들려고 기를 쓰는 게 좋았다.
몇 번 찾아 주면 나도 백작가 장남을 물어 팔자를 펴겠거니 하는 헛된 기대를 품는 게 빤히 보이는 게 재미있었다.
네 분수를 알라고 교육을 하면 금세 겁을 먹고 꼬리를 마는 것도 웃겼다.
그러다 지겨워지면, 실험체로 쓰는 것이다.
즐거운 기억을 떠올린 트로우 경이 킥킥 웃었다.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얼굴을 보면서 마시는 와인만큼 달콤한 게 있을까.
“…….”
어쩐지 목마른 기분이 든 그가 옷 위로 목을 긁었다. 트로우 경의 무의식적인 동작을 알아챈 호위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단골 클럽에 연락을 넣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