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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54)화 (54/120)

54화

시녀들이 유난스럽다는 듯이 가볍게 혀를 찼다.

“남자가 여자를 쳐다보는 건 자연스러운 거랍니다.”

“맞아요. 시선을 받을 수 있을 때 즐기세요. 나이 들면 봐 주지도 않아요.”

유리아가 도톰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수도의 시녀들은 유리아가 하는 말을 모두 투정으로 받아들였다.

‘이런 일은 본래 네 엄마가 해 줬어야 하지만.’

세이건 공작은 소중한 딸을 위해 위프트 백작부인과 시녀들을 고용했다. 수도 사교계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이라며 트로우 백작이 추천한 이들이었다.

‘연륜 있는 부인들이니, 네게 수도의 예법을 잘 가르쳐 줄 게다.’

그렇지만 유리아는 그들의 손에 떨어진 뒤 매일 밤 눈물바람이었다.

‘레아 피어트 공녀님이라면, 이러지 않을 텐데.’

유리아는 당당한 레아가 부러웠다. 저도 그렇게 제 할 말을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현실은 너무도 달랐다.

자신보다 두 배나 더 나이가 많은 더포드 남작의 끈적한 시선도, 그 시선이 제 가슴에 닿는 것도, 그걸 알면서도 매번 가슴이 훤히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고 파티에 나가야 하는 것도 모두 싫은데, 어른들은 그녀가 페이로즈로 불리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페이로즈로 명성을 쌓아야 세이건 공작가에도 도움이 된다고 했다.

납득할 수 없는 일을 견뎌야 하는 어린 소녀는 털목도리에 고개를 묻었다. 털목도리의 따스함만이 매달릴 수 있는 유일한 위안인 것처럼, 유리아는 목도리 끝을 꼭 잡으며 어깨를 움츠렸다.

위프트 백작부인이 지적했다.

“공녀님, 가슴과 어깨를 펴셔야죠. 아름답고 우아하게. 페이릴리처럼요.”

비슷한 말인데.

레아가 해 주던 말과 너무도 다르게 들렸다.

❀ ❀ ❀

며칠 후.

안달복달하던 더포드 남작에게 위프트 백작부인이 은밀히 소식을 전해 왔다.

“페이로즈가 선물에 꽤 감동했나 봅니다. 남작님을 만나 준다고 하는군요.”

“오오, 정말인가!”

“오늘 세이건 공작가의 파티에서, 자정쯤 몰래 연회장 뒤쪽 정원으로 나와 달라고 합니다.”

더포드 남작이 침을 꿀꺽 삼켰다.

“자정에, 몰래 말이지?”

“밀회 한두 번 해 보셨나요? 아시지요?”

그가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진 옷 중에 제일 좋은 옷을 입고, 머리에 사향기름을 바르고, 옷깃에 장미향수를 뿌리고.

남작은 오매불망 밤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여기로 나오란 말이지…….”

세이건 공작가 저택의 연회장 뒤쪽 정원은 생각보다 으슥했다.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거니와, 급히 사들인 수도의 저택이라 손대지 못하고 방치된 곳인 듯도 했다.

“…….”

우거진 나무와 덤불 사이에 인기척이라곤 없었다.

어쩐지 밤바람에 오싹해져서, 더포드 남작이 몸을 떨었다.

바스락.

토끼가 낙엽을 밟는 듯 작은 소리였다. 더포드 남작은 화색을 띠고 고개를 돌렸다.

“……페이로즈!”

달도 가느다란 밤.

나무 뒤에 숨어 사랑스러운 붉은 머리칼을 빼꼼 내민 소녀가 보였다.

남작은 입이 말랐다.

“나의 요정!”

나무 앞으로 나오던 페이로즈가 그 말을 듣고 홱 고개를 돌리더니 도망치기 시작했다.

“왜 도망치는 겁니까?”

남작이 소리치며 쫓았다.

‘아가씨가 날 불러냈잖아.’

‘그 비싼 보석을 받았는데, 이 정도는 해 줘야지. 그게 얼마짜린 줄 알아?’

‘왜 도망가는 거야?’

어이없는 마음이 분노로 막 변하려는 순간, 도망치던 페이로즈가 그를 돌아보았다. 남작과 눈이 마주친 소녀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리고 다시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페이로즈의 분홍색 드레스 자락이 길게 꼬리를 끌며 덤불 사이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 모습이 흡사 초식동물의 꼬리 같았다.

더포드 남작은 흥분했다.

주워 주길 바라는 손수건처럼, 벗겨 주길 바라는 옷자락처럼. 분홍색 드레스는 나풀대며 그를 유혹하고 있었다.

그는 깨달았다.

‘내가 쫓아와 주길 바라는 거구나!’

부끄러워하기는. 하긴 유리아 세이건 공녀는 어리고 순진했다.

사람들 앞에서 좋아하는 마음을 내보일 수 없어서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리라.

‘요 깜찍한 것.’

남작은 헐레벌떡 그녀를 쫓았다.

그가 관목을 헤집으며 외진 곳으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퍼억!

묵직한 것이 남작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 ❀ ❀

“……히익!”

유리아는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더, 더포드 남작이…… 맞았어!’

머리를 깨 버릴 것처럼 강력한 일격이었다. 사람이 맞는 걸 처음 본 유리아도 저렇게 맞으면 큰일 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무서워서 몸이 굳은 채 유리아는 발발 떨었다.

‘어, 어떡해! 누구한테……!’

그녀가 몸을 급히 돌렸을 때, 익숙한 그림자가 막아 세웠다.

“공녀님, 보셨군요?”

유리아의 눈이 크게 뜨였다.

❀ ❀ ❀

유리아 세이건 공녀가 실종되었다.

세이건 공작가에서는 입을 다물었지만, 수도 사교계에는 믿을 만한 소문이 돌았다.

“공녀님은 납치당하신 게 분명해요.”

위프트 백작부인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파티 도중까지도 계셨는데! 그날 밤부터 뵐 수가 없었어요.”

“드레스나 돈은 그대로였고요?”

“그럼요! 파티에서 입고 계셨던 드레스 말고는 모두 옷장에 걸려 있습니다. 장신구도 현금도 그대로예요.”

다른 목격자도 세이건 공작 저택의 뒷마당에서 공녀를 본 것 같다고 말했다.

“멀리서 보긴 했지만, 분명 분홍색 드레스에 붉은 머리의 소녀였습니다. 드레스를 입고 뛰어가고 있었는데…….”

사교계 사람들은 추리했다. 범인은 대담하게도 파티가 벌어지는 와중에 세이건 공작의 수도 저택에서 공녀를 납치했다고.

“누가 한 짓일까요?”

“왜 세이건 공녀를 납치했을까요? 돈을 요구하는 것도 아닌 듯한데…….”

범인과 공녀의 행방에 관심이 쏠려 있던 때, 세이건 공작 저택의 뒷마당에서 뜻밖의 물건이 발견되었다.

피에 젖은 새하얀 털목도리였다.

눈썰미 좋은 사람들은 그 물건이 원래 누구 것인지 알아보았다.

“가만, 저건 페이릴리가 하고 다니던 털목도리 아니에요?”

소문은 급격하게 방향을 틀며 부풀었다.

페이로즈의 실종은 페이릴리가 한 일일 거다, 세이건 공녀가 꽃다발 받을 때마다 피어트 공녀가 못마땅한 눈빛으로 쳐다보지 않았느냐, 페이로즈에게 관심을 뺏기는 게 질투 나서 이런 일을 저지른 게 틀림없다.

눈덩이처럼 커지는 헛소문에 피어트 공작가에선 강경하게 부인했지만, 사람들의 의심은 식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런 일이 있으면 길길이 날뛰며 달려와서 당장 누구 멱살이라도 잡아야 할 루얀 피어트가 나타나질 않았던 것이다.

루얀은 수면마법의 후유증 때문에 몸을 사리고 있는 것이었지만 사교계에 그 사실을 알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사라진 건 유리아 세이건 공녀만이 아니었다.

“한데, 요즘 더포드 남작도 안 보이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사람들도 별생각이 없었다.

랜달 더포드 남작.

미모가 흔적기관으로 남은 두꺼비 같은 얼굴과 자신이 왕실 일원이라고 늘 강조하는 큰 목소리. 소소한 원한을 살 소인배였지, 목숨을 위협당할 만큼 중요한 인물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며칠이 더 지나도 그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이거 참. 어디 갔을까요?”

장미 내기를 걸었던 귀족들은 몸이 달기 시작했다.

“페이로즈가 이번 주에 꽃다발을 받아 주는 쪽에 걸었는데,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페이로즈도 없고, 더포드 남작도 없고.”

“더포드 남작한테도 무슨 일이 생긴 거 아닙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트로우 경이 주위를 둘러보고는 목소리를 낮췄다.

“아무래도 변을 당한 게 아닐지.”

“변이요?”

심상찮은 내용에 귀족들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누가 말입니까? 더포드 남작이 그럴 일이 뭐가 있다고?”

“왜 없습니까.”

트로우 경은 은근슬쩍 대귀족들이 모인 쪽을 곁눈질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를 따라갔다.

리케일 피어트 소공작. 백금발에 푸른 눈이 여동생과 똑 닮은 미남이 거기 있었다.

꿀꺽.

귀족들이 침을 삼켰다.

“……역시 루얀 피어트가 손을 쓴 걸까요? 페이릴리를 모욕했다고?”

“귀족이 이렇게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게 보통 일입니까? 수도 경비대가 뭐든 했을 텐데 꼬리도 못 잡고 있는 걸 보면, 신출귀몰한 검술을 가진 이가 아니고서야…….”

신출귀몰한 검술.

교묘하게 왕국제일검 루얀 피어트를 지목하는 말이었다.

“하긴 루얀 피어트라면…….”

“내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니까요!”

그럴싸하다고 느낀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조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 갔다.

페이릴리의 피 묻은 털목도리. 가만히 있는 루얀 피어트. 보이지 않는 더포드 남작.

사교계 사람들의 여론은 점점 더 불이 붙었다.

“페이로즈와 더포드 남작의 실종에 피어트 두 남매가 관련된 게 확실하다니까요?”

“그렇죠! 페이로즈가 더포드 남작하고 도망칠 리도 없고, 남작도 수도에서 귀족 영애를 납치할 만큼 간이 붓진 않았다고요. 그런데 둘이 이렇게 사라지다니.”

“페이릴리와 루얀 피어트가 함께 저지른 게 틀림없습니다. 페이릴리가 관심을 빼앗기니까 질투한 겁니다! 그래서 루얀 피어트한테 속살거려서…….”

“하긴 루얀 피어트는 제 동생 말이라면 꼼짝 못 하니까요.”

트로우 백작과 얀 트로우는 신이 났다.

“하하하. 들었느냐?”

“듣고말고요! 사람들이 다들 어찌나 페이릴리를 이러쿵저러쿵 욕하는지!”

순조롭게 페이릴리의 평판이 땅에 떨어지는 걸 보니 그동안 막혔던 게 쑥 내려가는 기분에 표정 관리가 힘들 지경이었다.

“어떠냐, 얀. 네가 보기에도 페이릴리의 평판은 바닥에 떨어진 거나 다름없지 않으냐?”

“아버지, 제가 어제 간 무도회에서 페이릴리가 어쩌고 있었는지 아세요? 아무도 춤 신청을 안 해서 벽에 기대어 서 있더군요. 그 대단한 페이릴리가요!”

트로우 백작은 만족스레 웃었다.

판이 충분히 깔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결심했다.

‘아르카이크 오켄 황자님께 연락을 넣어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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