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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53)화 (53/120)
  • 53화

    테라스 아래에서 귀족들이 떠드는 소리였다.

    “페이릴리 때는 수도의 금싸라기 땅에 저택을 사더니, 이번엔 계절도 아닌 장미를 길바닥에 카펫처럼 깔고. 그 양반은 빚이 대체 얼마랍니까?”

    “미친 거죠.”

    “믿는 구석이 있는 거지요. 그래도 칼로시 대공께서 건재하신데, 채무는 어떻게든 해결되지 않겠습니까?”

    “하기야, 지금 남작이 빚 걱정을 하겠습니까? 빚보다는 다른 게 무서울걸요.”

    수다를 떨던 귀족들이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흥미진진하단 목소리로 말했다.

    “루얀 피어트가 어떻게 나올까요?”

    “소문난 팔불출인데 이대로 가만히 있겠습니까? 남작을 어디 한 군데 못쓰게 만들어 놓을지도…….”

    이야기하던 이들이 부르르 떨었다.

    “……역시 페이릴리보다는 페이로즈가 더 취향인 것 같습니다.”

    “아무렴요. 꽃이 좀 꺾이는 맛도 있고 그래야 꽃이지요.”

    하하하. 서로를 향해 웃은 이들이 은근한 눈빛을 교환했다.

    “페이로즈가 입은 드레스도 참 예쁘지 않습니까? 수도의 새 유행이 되어야 할 터인데.”

    “하하. 제 딸이 그 드레스를 맞춘다고 하면 방에 가두겠지만요.”

    “그야 당연한 말씀이지요! 우리 케이틀린이 그렇게 가슴을 훤히 내놓고 다닌다니, 어휴 생각만 해도…….”

    듣고 있던 레아는 빡쳐서 고민했다.

    ‘그냥 파이어볼 쏴 버릴까?’

    ❀ ❀ ❀

    레아는 점점 더 마법 수련에 열중했다.

    사교계에서 듣기 싫은 말을 듣고 온 날은 귀를 씻어야겠다며 바람마법을 연습했고, 꼴 보기 싫은 꼴을 보고 온 날은 열불 나서 뭐라도 태워야겠다며 화염마법을 연습했다.

    오빠들은 걱정스러운 낯으로 그런 그녀를 지켜보았다.

    “헬릭스가 빨리 와야 할 텐데. 헬릭스 없으면 레아 저러다 금방 대마법사 될 거 같다.”

    리케일의 말에 루얀도 동의했다.

    “테라스에서 북쪽 하늘 한번 쳐다봤다가 벽난로에 파이어볼 한 번씩 쏘더라고. 일주일 전만 해도 좀 비껴 맞고 그랬거든? 그런데 이제 쏘는 파이어볼마다 백발백중이야.”

    “이걸 축하해야 하는 건지 위로해야 하는 건지…….”

    레아의 그리움과는 별개로 꾸준한 수련은 점점 효과가 나타났다.

    체력과 마나가 단련되면서 점점 더 건강해지고, 전신에서 무시할 수 없는 아우라가 뿜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레아는 한 파티에서 꺼림칙한 광경을 보고 말았다.

    “나의 요정! 그대에게 바치는 나의 마음이라오!”

    더포드 남작이 거대한 장미 꽃다발을 들고 유리아 세이건 공녀 앞에 나타나 공개 구애를 하고, 세이건 공녀는 희게 질려서 도망친 뒤였다.

    “에휴, 내가 저 꼴 보기 싫어서라도 사교계 은퇴를 하든지 해야지.”

    레아는 고개를 저으며 파티장의 북쪽 테라스로 나와 음료수를 홀짝였다. 북쪽 별자리가 잘 보이니 음료수가 어쩐지 밍밍하고 씁쓸했다.

    “헬릭스, 나 그냥 사교계 은퇴할까? 은퇴하고 마법사 발표해 버릴까? 어떻게 생각해?”

    밤하늘을 향해 중얼대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헬릭스는 분명 ‘그럼 레아 네가 유일한 마법사로 알려지니 위험하다. 더 상황을 지켜보자’라고 할 터였다.

    “사교계도 헬릭스랑 같이 다니면 즐거울 거 같았는데……. 이게 뭐람.”

    푸념하던 그녀는 턱을 괴고 한숨을 쉬었다.

    그때였다.

    “백작부인, 아무래도 페이로즈가 날 꺼리는 것 같습니다.”

    초조한 더포드 남작의 목소리였다. 레아는 순간 마시던 음료수를 뿜을 뻔했다.

    당연한 거 아닌가?

    만날 쫓아다니면서 징글맞게 쳐다보지. 눈에 띄는 화려한 장미 꽃다발을 계속 내밀면서 곤란하게 하지.

    ‘그간 한 짓이 있는데 네가 반갑겠냐? 당연히 꺼리지!’

    그녀는 속으로 혀를 차면서 목소리가 들린 쪽을 쳐다봤다. 북쪽 테라스 밑에서 더포드 남작이 어떤 여인과 대화하고 있었다.

    ‘누구지?’

    그러고 보니 좀 전에 백작부인이라고 했는데. 레아는 남작보다 더 어두운 곳에 있는 상대를 확인하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떴다. 둘이 나누는 대화가 들려왔다.

    “페이로즈가 날 왜 꺼리는 걸까요? 그녀가 나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걸까요?”

    “오, 오해요? 오해…… 어떤 오해 말인가요?”

    “그녀에 대한 내 마음이 한때의 치기나, 진심이 아닐 거라고 오해하고 있는 게 아니냔 말입니다. 백작부인도 아시다시피 제가 심적 방황을 좀 많이 했잖습니까.”

    듣고 있던 레아는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모르겠는 심정이 되었다. 더포드 남작의 상대도 마찬가지였는지 잠시 침묵했다.

    상대가 화제를 돌렸다.

    “고민만 할 게 아니라, 페이로즈에게 선물이라도 하시는 건 어떨까요?”

    “선물이요?”

    솔깃했던 더포드 남작이 고개를 저었다.

    “장미 꽃다발도 받지 않는데 선물이라고 받겠습니까?”

    “꽃다발과 선물은 다르지요. 사람들 시선이 부담스러워 꽃은 피했어도, 개인적으로 보내는 선물까지 거부하진 않을 겁니다.”

    “……그럴까요?”

    “그럼요. 그 선물이 취향에 딱 맞기까지 한다면, 아무래도 호감이 솟지 않겠어요?”

    남작은 생각에 잠긴 눈치였다.

    “위프트 백작부인, 늘 옆에 계시니 페이로즈의 취향은 잘 아시겠죠. 페이로즈가 뭘 좋아할까요?”

    “아무래도 그 나이대 아가씨들은 부모한테서 얻기 어려운 고급 장신구에 관심이 많답니다.”

    듣고 있던 레아는 놀라 눈을 깜박였다.

    ‘위프트 백작부인이라고?’

    그녀라면 유리아 세이건 공녀의 샤프롱이 아닌가.

    ‘보호해 줘야 되는 애를 왜 저런 도둑놈한테……?’

    레아는 찜찜한 마음에 자세히 확인해 보려 했지만, 두 사람은 몇 마디 더 나누고는 헤어졌다. 그녀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안 좋은 느낌이 들었다.

    ‘뭔가…… 옛날 드라마에서 봤던 그…… 꼭 술집 마담이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신입을 물주한테 넘기는 것 같은…….’

    레아는 유리아 세이건 공녀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설마 걔 아빠가 세이건 공작인데 그런 미친 짓을 하진 않겠지?’

    그렇지만 보고 들은 게 있으니 신경 쓰였다. 그녀도 예전에 더포드 남작에게 당한 게 있어서 더 그랬다.

    “헉! 피어트 영애, 안녕하세요. 혹시 이쪽으로 더포드 남작이 왔었나요?”

    그래서였다. 더포드 남작을 피해 도망친 게 빤히 보이는 유리아 세이건 공녀를 보자, 레아는 충동적으로 그녀의 손을 잡고 말하고 말았다.

    “세이건 공녀, 조심해요.”

    “……네?”

    되물으면서 세이건 공녀가 살짝 떨었다. 노출이 심한 드레스 탓이었다. 레아는 공녀에게 제 하얀 털목도리를 벗어 둘러 주었다.

    “춥게 다니지 말고요. 그깟 꽃다발, 맘에 안 들면 차 버리고요.”

    세이건 공녀는 눈을 깜박였다. 레아는 목도리를 둘러 주더니 어색하게 덧붙였다.

    “그…… 너무 참지 말고 어깨 펴고 다녀요. 누가 이상하다 싶으면 재깍재깍 공작님한테 일러 버려요. 알았죠?”

    몇 년 전에 돌아가신 엄마가 해 주던 잔소리 같았다.

    ‘얘는 생긴 건 나 닮았으면서 성격은 왜 이리 순한지. 유리아, 너희 아빠가 공작님이야. 못되게 구는 놈들은 얼른 일러야지 왜 참고 있어.’

    세이건 공녀는 목구멍이 뜨거워져서 대답도 못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새하얀 털이 몽실몽실, 부드럽고 따스하게 뺨을 간지럽혔다.

    ‘피어트 공녀님이 우리 언니면 좋겠다.’

    ❀ ❀ ❀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유리아 세이건 공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목도리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공녀님, 거기서 그렇게 도망가면 더포드 남작님이 얼마나 무안하시겠어요? 제가 사과드리면서 얼마나 민망했는지 모릅니다.”

    “…….”

    “그리고 그 털목도리는 뭐죠? 제가 늘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가슴 볼륨이 풍만한 게 공녀님의 장점이니 잘 부각시켜야 한다고요.”

    “그렇지만…… 다들 날 구경거리처럼 힐끔거린단 말이에요!”

    유리아가 신경질적으로 말하며 목도리 끝을 그러쥐었다.

    가슴 앞으로 모아 쥔 목도리가, 훤히 파인 드레스를 가리고 자신을 지켜 주기라도 할 것처럼.

    “촌스럽게 왜 그러세요, 공녀님.”

    시녀 하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다른 시녀도 그에 동조했다.

    “맞아요. 애처럼 굴지 마세요. 다들 공녀님이 예뻐서 눈을 못 떼는 건데.”

    시녀들의 말에 유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도 싫어.’

    이제 막 열여섯 살. 가슴이 훅 파인 드레스를 입고 무도회장에서 웃고 다니기엔 어린 나이였다.

    소녀에겐 모든 것이 낯설었다.

    웃는 얼굴로 입에 칼을 문 수도의 사교계도, 얼굴과 몸매에 꽂히는 끈적한 시선들도, 어린 소녀가 적응하기 힘든 것투성이였다.

    “공녀님은 복 받으신 거예요.”

    유리아의 입술을 살짝 눌러 이를 떼게 하면서, 위프트 백작부인이 엄하게 말했다.

    “그렇게 물면 자신감 없고 못나 보입니다. 늘 자신을 관리하세요.”

    “…….”

    “세상에 어느 귀족 영애가 데뷔탕트를 치르자마자 화제의 중심이 되고, 별명까지 얻나요? 별명도 얼마나 아름답고 영광스러운지. 페이로즈, 페이런의 장미라니.”

    다른 시녀가 거들었다.

    “공작님도 기뻐하고 계세요.”

    유리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래요?”

    “그럼요. 말씀은 잘 안 하셔도 자랑스러워하는 기색이시랍니다.”

    “공녀님이 페이로즈 별명을 얻으시면서 세이건 공작가의 위명도 더욱 드높아졌으니까요.”

    유리아가 티 나게 얌전해졌다. 시녀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호호 웃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 줄 아세요? 장미와 백합의 전쟁이래요. 공녀님이 몇 년 동안 사교계를 주름잡았던 페이릴리의 경쟁자가 되신 거예요!”

    “이게 다 더포드 남작님 덕분이니, 다음번 파티에서는 꽃다발을 받아 주세요.”

    유리아가 입술을 부풀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 아저씨 징그러워요. 날 보는 시선이 기분 나쁘다고요!”

    남작의 시선이 어디로 어떻게 향하는지, 유리아는 이제 외울 지경이었다.

    더포드 남작은 꼭 가슴부터 눈을 준 다음 엉덩이를 힐끔 확인하고, 아래위로 훑어보곤 했다. 그 노골적인 시선을 떠올리자 양팔에 소름이 돋았다.

    “어휴, 어리게 굴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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