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그러잖아도 유리아에게 어미가 없어 사교계 소문에 어두운 건 아닐까 걱정하던 그였다. 고민을 정확히 찌른 감언이설에, 세이건 공작은 그만 설득되고 말았다.
“그 위프트 백작부인을 소개해 주시지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세이건 공녀가 서부의 장미가 아니라 페이런의 장미가 될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저를 믿으십시오!”
❀ ❀ ❀
어느 날 저녁의 자선파티.
레아 옆에서 누군가 말했다.
“세이건 영애 말이에요, 점점 이상하지 않아요?”
파티의 디저트 코너를 정복하고 있던 레아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 옆에서 다쿠아즈를 집어 들던 갈색 머리 영애가 뾰족하게 말했다.
“요즘 점점 더 피어트 영애를 따라 하는 것 같잖아요.”
“그렇죠? 저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죠?”
옆에 있던 다른 영애가 맞장구쳤다.
“머리도 전에는 포니테일로 묶고 다니더니, 요즘 피어트 영애처럼 느슨하게 푸는 스타일로 바꿨잖아요. 그런 건 피어트 영애가 훨씬 더 잘 어울리는데.”
“그래요?”
레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멀리 있는 유리아 세이건을 잠시 쳐다봤다. 확실히 스타일이 바뀐 것 같긴 했다.
처음 말했던 갈색 머리 영애가 살짝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머리 모양만이 아니잖아요. 세이건 영애가 입은 드레스 좀 보세요. 페이릴리 드레스를 흉내 낸 거잖아요!”
페이릴리 드레스.
레아가 즐겨 입어 유행이 된 스타일이었다.
‘목을 싸매야 안 추워!’
몸이 약해 추위를 잘 타던 그녀는 항상 목까지 꽁꽁 싼 드레스를 입곤 했다. 대신 몸매의 선을 흐르듯이 돋보이게 하고, 원단 색상을 레아의 눈과 어울리는 쨍하고 맑은 푸른빛으로 해서 갑갑한 느낌을 줄인 드레스였다.
‘확실히 드레스는 그 스타일이긴 하네. 살짝 변형하고 색을 바꾸긴 했지만.’
푸른빛이 아니라 장밋빛 원단으로 화사한 분위기를 내고, 목은 남기고 가슴 쪽은 깊이 판 후크 스타일로 발랄섹시 느낌을 강조한 디자인이었다.
“누가 봐도 피어트 공녀를 따라 하고 있잖아요!”
“공녀면서 자존심도 없나 봐요. 어떻게 저러죠?”
화내던 영애들 중 한 사람이 씩씩댔다.
“게다가 남자들이 모여서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세이건 공녀는 정말 갓 피어나는 장미 같군요.’
‘솔직히 백합은 좀 뭐랄까, 고루한 느낌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그 페이릴리 드레스 유행은 너무 오래갔다 싶습니다. 드레스란 게 여자 몸의 아름다움을 보여 줘야 할 게 아닙니까?’
‘맞는 말씀입니다. 다들 꽁꽁 싸매서는. 좀 지겨웠어요.’
남자 귀족들의 대화를 알게 된 영애들은 발끈했다.
“언제는 극강의 청순미라더니! 역시 페이런의 백합이라더니!”
“피어트 영애가 페이릴리 드레스를 유행시켜서 얼마나 좋았는데요. 그 전엔 언제나 가슴팍 파인 걸 입어야 했는데, 영애 덕분에 내가 싫을 땐 노출을 안 할 수 있었다고요.”
“맞아요. 피어트 영애나 되니까 그럴 수 있어서 우리도 덕을 봤단 말이에요.”
그 드레스는 그냥 내가 추워서 그렇게 입은 건데……?
레아는 눈을 깜박였다.
‘다들 은근히 힘들었구나.’
제린느 영애의 일로 사교계에 닫혔던 마음이 조금 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이제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 초반의 아가씨들.
이 영애들은 어린 나이에 늘 사교계의 꽃 취급을 당하면서 노출을 제 맘대로 정할 자유도 없었던 거였다.
“저는 괜찮아요.”
레아가 저도 모르게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유행이야 돌고 도는 거니까요. 제가 페이릴리 드레스 같은 걸 앞으로도 많이 입고 다닐 테니, 제 핑계 대면서 영애들도 입고 싶은 대로 입으세요.”
영애들이 반짝이는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피어트 영애……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
“다로그터 영애, 영애 나이가 더 많지 않나요?”
“멋있으면 다 언니죠! 한 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
투닥대던 영애들 사이에서 한 영애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피어트 영애는 이렇게 애써 주시는데…… 세이건 영애가 다 망치잖아요.”
“맞아요. 같은 공녀면서 왜 저렇게 다르담.”
레아는 흘깃 유리아 세이건 공녀 쪽을 보았다. 못 본 사이 더 투실투실해진 더포드 남작이 그녀에게 딱 붙어서 치근거리고 있었다.
‘쟤도 쟤 나름대로 힘들 거 같은데.’
자꾸 가슴골에 시선을 꽂으며 말을 거는 더포드 남작의 꼴을 보니 세이건 공녀가 가엾을 지경이었다.
레아의 시선을 따라 유리아 공녀 쪽을 본 영애들이 다들 얼굴을 찡그렸다.
“으, 더포드 남작 또 저러고 있네요.”
“더러워…… 저 눈빛 좀 봐.”
레아가 중얼거렸다.
“저치가 저러고 달라붙는데 못 떼어 내면, 비슷한 종자들이 자꾸 건드릴 텐데.”
사교계에서 안전하려면 만만해 보이지 않아야 했다. 어린 공녀처럼 만인의 주목을 받는 위치라면 더했다.
다른 영애들이 고개를 흔들며 시선을 돌렸다.
“괜찮겠죠. 다른 영애도 아니고 세이건 공녀니까.”
“맞아요. 저 정도 배경인데 뭐가 걱정이에요. 세이건 공작가에서 알아서 하겠죠.”
하긴 그런가? 서부의 패자라 불리는 세이건 공작가니까.
‘내 걱정이나 하자.’
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한편 더포드 남작은 트로우 경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유리아 세이건 공녀가 자신을 자꾸 피해서 힘들다는 것이었다.
“경, 나를 좀 도와주게. 어떻게 하면 유리아 세이건 공녀에게 호감을 살 수 있을까?”
그런 방법이 있을 리가 있냐?
미끼를 덥석 물어 준 건 좋은데, 이래저래 짜증 나는 놈이었다. 트로우 경은 진심을 누르며 남작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글쎄요…….”
그가 망설이는 척 턱을 문질렀다. 그리고 남작을 흘깃 다시 보더니, 고개를 작게 흔들며 머뭇대었다.
“뭔가?”
“그게……. 흠.”
“그러지 말고. 숨기는 거 없이 말 좀 해 보게, 응?”
“이런 말씀 드리기 좀 그렇지만.”
트로우 경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세이건 공녀처럼 좋은 가문에서 잘 자란 순진한 영애라면, 남작님을 쉽게 믿지 않을 겁니다.”
어리고 가문 좋은 미소녀라면 사족을 못 쓰는 더포드 남작. 그가 몸이 더 달으라고 흘린 말이었다.
예상대로 남작은 콧김을 뿜으며 더욱더 간곡하게 매달렸다.
“그러니까 내가 경에게 의논하는 것 아닌가? 페이릴리 때에도 경과 함께…….”
“쉿.”
급히 주위를 둘러본 트로우 경이 목소리를 낮췄다.
“이렇게까지 하시니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남작님이 구애하신 게 유리아 세이건 공녀가 처음은 아니잖습니까.”
찔린 더포드 남작이 움찔했다. 트로우 경은 재차 팩트폭력을 날렸다.
“페이릴리한테 구애하실 때에도 온 수도가 떠들썩했고요.”
“으, 으음.”
“정말 세이건 공녀의 호감을 얻으시려면, 이번은 다르다고 믿음을 줘야 합니다.”
솔깃한 말이었다. 그럴싸하기도 했다.
“맞는 말이지만, 어떻게 말인가?”
“보여 줘야지요.”
뭘? 묻는 남작의 시선에 트로우 경이 말했다.
“남작님의 진심을, 세이건 공녀를 생각하는 마음을.”
남작은 그의 말에 완전히 집중해서 입을 헤벌린 채 쳐다봤다. 트로우 경이 충고했다.
“이제까지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금 세이건 공녀가 진짜 내 사랑이다, 이렇게 땅땅 못 박을 만큼 세이건 공녀를 향한 압도적인 지지를 보여 주시는 겁니다.”
“압도적인 지지?”
“예. 유리아 세이건 공녀가 페이로즈라고 불리기 시작한 건 아시지요?”
“다, 당연히 알고 있었지!”
더포드 남작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만족스럽게 웃은 트로우 경이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이벤트 하면 남작님 전문 아니겠습니까? 페이로즈가 페이릴리보다 못할 것 없다는 걸, 아니 오히려 낫다는 걸…… 보여 주시지요.”
❀ ❀ ❀
이른 아침, 수도의 번화가.
“에구머니나, 이게 다 뭐래?”
가게 문을 열고 나가려던 종업원이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이제 막 문을 열기 시작한 상점 거리 가득, 새빨간 장미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세상에! 길을 다 장미로 덮으려나 봐요!”
“누가 이런 일을……?”
얼마 전 페이릴리의 생일에 팬클럽들이 백합을 갖다 놨던 이후 이런 광경은 처음이었다.
거리를 채운 장미들은 한 번에 쏟아 놓은 것처럼 싱싱했다.
아직 약한 오전의 햇살이 거리에 내리쬐자, 장미꽃잎에 맺힌 새벽이슬이 붉은 벨벳 위에 놓인 다이아처럼 반짝였다. 누군가 지난밤에 거리 가득 장미를 채운 것이다.
‘대체 누가?’
사람들의 궁금증이 최고조에 달할 때쯤 정보가 풀렸다.
“더포드 남작님이 페이런의 장미께 바치는 붉은 장미래요!”
사람들이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페이런의 장미?”
“페이런의 백합이 아니라?”
“에이, 페이릴리한테 바치는 거면 백합으로 했겠죠. 장미래요.”
“그래서 장미가 누군데?”
“이번에 데뷔한 붉은 머리 영애라던데요?”
소문은 빠르게 돌았다.
더포드 남작이 이번에 데뷔한 영애에게 반해 수도의 거리를 장미로 덮었다더라, 그 영애가 서부의 공주님이라는 유리아 세이건 공녀라더라, 남작이 공녀더러 페이런의 장미라고 했다더라.
“그럼 유리아 세이건 공녀가 페이로즈인 겁니까?”
사교계도 이 흥미로운 사건을 덥석 물었다.
“하긴, 레아 피어트 공녀가 페이릴리니까. 유리아 세이건 공녀가 페이로즈면 얘기가 되는군요.”
“페이릴리와 페이로즈. 페이런의 백합과 장미라니, 거창한데요.”
“두 공녀가 한자리에 모이는 걸 봐야 할 텐데요.”
“한자리에 모이면 비교되니 서로 피하지 않겠습니까?”
사교계는 단박에 시끌시끌해졌다. 여러 소문들이 풀리고 날개 돋친 듯 돌아다녔다.
레아의 귀에도 ‘페이로즈와 페이릴리 중에 누가 취향이냐’ 따위의 소리들이 가끔 들려올 정도였으니까.
“……또냐?”
참석한 파티에서 오늘만 네 번째 저런 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참아야 하느니라. 참아서 저 주둥이를 통구이 하는 일이 없어야 하느니라.’
그녀는 속으로 염불을 외우며 시원한 음료를 들고 바람 쐴 곳을 찾았다. 인내심이 다 바닥나기 전에 어디 사람 없는 곳에서 열 좀 식히고 올 요량이었다.
“에효…….”
사람 없는 테라스를 차지하고, 레아는 찬 대리석 난간에 몸을 기댔다.
‘헬릭스가 빨리 오면 좋겠다.’
자연스레 그가 그리웠다. 지금 이럴 때 슥 나타나서 ‘레아, 쌀쌀한데 왜 혼자 밖에 있는 건가’ 하고 타박하듯 걱정하면서 제 손을 잡아 주면 좋을 텐데.
그러면 오늘 하루 기분 나빴던 일 같은 건 싹 씻겨 내려간 듯 사라질 것 같았다.
‘헬릭스. 언제 올 거야?’
저쪽이 북쪽일까. 테라스 난간에 기대어, 레아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때 아래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더포드 남작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