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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51)화 (51/120)
  • 51화

    트로우 백작은 바로 큰아들을 불러 의논했다.

    “더포드 남작과 세이건 영애를 이용해서 페이릴리를 깎아내리는 거다.”

    “예? 어떻게 말입니까?”

    백작이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제 계획을 설명했다.

    칼로시 대공의 사생아면서 왕실의 일원인 더포드 남작.

    그가 어리고 예쁘고 가문 좋은 영애들에게 집착한다는 건 사교계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영애가 페이릴리로 유명한 레아 피어트였다.

    남작은 페이릴리를 쫓아다니기 위해 빚을 내 피어트 공작가 근처에 저택을 사기까지 했다. 그 일은 사교계에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었고.

    “그런 그가 페이릴리를 놔두고 유리아 세이건을 쫓아다니는 걸 부각한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얀 트로우는 제 아비의 뜻을 깨달았다.

    지금 사교계에선 어리고 예쁜 여자를 밝히는 더포드 남작이 또 다른 영애를 찍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어리고 예쁜 여자를 알아보는’ 더포드 남작이 ‘더 매력적인’ 새 여자로 갈아탄 것처럼 흘린다면?

    통할 만한 얘기였다. 지난번 헬릭스의 소문이 돈 뒤, 남자 귀족들 사이에서 레아의 인기가 예전만 못하기도 했으니까.

    얀 트로우가 말했다.

    “이제 사교계 대세는 세이건 공녀라고 하는 이들이 생길 겁니다.”

    “더포드 남작이 페이릴리는 이제 한물갔다고 말하면 더 효과적일 게다.”

    더포드 남작은 주목받는 걸 좋아하니, 잘 구슬리면 파티에서 대놓고 떠벌릴지도 모른다. 트로우 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 높은 줄 모르던 페이릴리의 인기도 주춤하겠군요.”

    “그 기세를 몰아 가십전으로 가는 거다.”

    트로우 백작은 말했다.

    이참에 세이건 공녀를 더 띄워서 페이로즈로 추켜세우고, 두 공녀를 내세워 장미와 백합의 전쟁이라 명하며 경쟁구도를 만들자고.

    트로우 경은 아비의 생각을 들으며 침을 삼켰다.

    ‘이건 되는 가십이다!’

    장미와 백합.

    쟁쟁한 꽃들의 전쟁.

    아름다운 미소녀들의 경쟁이라고만 해도 다들 흥미진진해 할 일이었다.

    그런데 그 미녀들이 각각 왕국의 제일가는 가문들인 공작가의 딸들! 미모에 가문 위신까지 놓고 겨루는 신경전!

    어디 재미있는 일 없나 목마른 사람들이 다들 달려들 게 분명했다.

    트로우 경이 아버지를 존경의 눈으로 쳐다봤다.

    “이름부터가 귀에 딱 꽂힙니다. 호사가들이 그 얘기를 하느라 입에 침이 마를 겁니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세이건 공녀를 어떻게 페이로즈로 띄우실 겁니까?”

    “그건 내게 맡겨라.”

    트로우 백작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너는 더포드 남작이 페이릴리를 버리고 페이로즈로 갈아탔다고 떠들도록 잘 부추기기만 하면 된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 ❀ ❀

    트로우 백작 부자가 무슨 음모를 꾸미는 줄도 모르고, 레아는 수면마법을 어떻게 하면 안전하게 풀까 궁리하고 있었다.

    ‘헬릭스가 최선을 다해 방법을 찾아올 테니, 나도 준비를 해 둬야 해.’

    그녀는 피어트 약품 연구소에서 일하는 믿을 만한 의사 몇 명을 데려왔다. 그리고 수면마법에 걸린 사람들을 진찰하고 그 증상을 기록하게 했다.

    “음. 자넷은 보통 네 시간에 한 번 잠들어서 십오 분 뒤에 깨어나고, 에한 경은 열두 시간에 한 번 잠들어서 삼십 분에서 두 시간 뒤에 깨어나고…….”

    기록해서 본인도 패턴을 알아 두면, 수면마법 해제가 좀 늦어져도 대응하기가 한결 수월해지겠지. 레아는 수면마법에 걸린 이들에게 당분간 알람 기능이 있는 시계를 보급해 줄 생각이었다.

    ‘잠들기 전에 알람이 울리면 갑자기 픽픽 쓰러지는 일도 없을 거고. 훨씬 안전할 거야.’

    자넷은 그런 레아의 생각에 감탄했다.

    “공녀님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셨어요? 천재신가 봐요!”

    “일하다 보면 요령이 생기거든.”

    말해 놓고 레아는 아차했다. 전생에서나 일했지 공녀로 사는 이번 생에선 일한 적이 없는데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한 거야.

    그렇지만 자넷은 다른 뜻으로 받아들였다.

    “네? 일하면 바로 요령이 생기신다고요? 역시 우리 공녀님은 천재셨어!”

    그냥 말을 말자.

    실수하거나, 자넷의 오해만 깊어질 거 같으니까.

    체념한 레아는 입을 다물려고 했지만 자넷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저희를 위해 이렇게 비싼 물건까지 주셔도 되나요? 시계는 엄청 고급품이라던데요…….”

    그냥 시계도 아니고 알람 시계였다. 이 세계에는 아직 없는 알람기능을 넣느라 리케일과 한참 골머리를 싸매고 만든 물건이었다.

    “시제품이야. 너희가 쓰는 거 보고 더 보완해서 팔 거니까, 부담 갖지 말고 열심히 써.”

    그녀는 가볍게 말하며 기록을 정리했다. 자넷이 흘끔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공녀님. 증상을 적고, 사람들한테 시계도 나눠 주시고, 각자 어떻게 대응할지도 알려 주셨잖아요?”

    “그랬지.”

    “그런데 그 기록은 왜 계속 정리하세요?”

    레아가 탁탁 문서를 모으며 말했다.

    “수면마법을 풀 방법을 알았을 때, 이런 기록이 있으면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만약 약을 먹어야 한다고 하면 사람마다 각각 적당한 양을 처방하기도 좋을 거고.”

    자넷이 감탄했다.

    “저는 많이 못 배워서 잘은 모르지만, 공녀님은 진짜 이쪽에 재능이 있으신 거 같아요. 전부터 이렇게 일하신 거예요?”

    “얼마 전부터 하게 된 거야.”

    레아는 빙긋 웃으며 책상을 쓸었다.

    “그 전에는 아파서 책상에 앉아 있을 생각도 못 했거든.”

    그녀는 침대와 한 몸이었던 생활을 떠올리며 창문을 쳐다봤다.

    누워서 바람에 흔들리는 커튼만 바라보며 힘들게 숨 쉬던 때가 떠올랐다. 무척이나 옛날 일처럼 느껴졌다.

    “……다 헬릭스 덕분이지.”

    보고 싶다.

    서늘하고 냉정한 얼굴이지만 그녀를 보면 온기를 띠는 회색 눈. 그 눈을 마주 보고, 손을 잡고,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하고 싶었다.

    레아, 하고 다정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가슴이 간질간질해서, 괜히 그에게 말을 붙여 나지막한 목소리를 더 듣고 싶었다.

    다 네 덕분이야.

    네가 없으니까 허전해.

    솔직하게 말하면 헬릭스는 무슨 표정을 지을까. 곤란한 것처럼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내려다볼까.

    그러면 껴안아 버려야지. 너무 보고 싶었다고 한숨 쉬면 약해져서 같이 껴안아 줄 테니까.

    ‘무사히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어.’

    레아는 목에 건 계약자의 보석을 꼭 쥐었다. 이게 헬릭스와 마나만 연결된 게 아니라 목소리도 연결된 거라면 좋을 텐데.

    ‘나중에 진짜 마법통신기 만들어야지. 그래서 이럴 때 연락해서 목소리 들을 거야.’

    전생에 문과여서 얼굴 보는 영상통화 개발까진 꿈을 못 꾸는 그녀였다.

    ❀ ❀ ❀

    사교계에 여론전을 일으킬 계획을 세운 트로우 백작은 재빨리 세이건 공작에게 접근했다.

    “저희가 세이건 공녀의 사교활동을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유리아를 말입니까?”

    무골인 세이건 공작의 딱딱한 얼굴에 의구심이 떠올랐다.

    ‘이자가 왜 이런 제안을?’

    페이런 왕국에는 공작이 세 명이었다.

    왕의 숙부인 칼로시 대공작.

    동부에 영지를 가졌지만 최근 수도에서 더 활약하는 피어트 공작.

    서부에서 영향력이 공고한 세이건 공작.

    유리아는 그중 세이건 공작의 외동딸로, 아버지의 위세만큼 미모도 대단해 서부에선 공주처럼 대접받는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렇지만 서부에서 아무리 대단했어도 수도에서 유리아는 아직 촌뜨기 애송이일 뿐, 같은 공녀지만 입지나 영향력은 레아 피어트와 천지 차이였다.

    세이건 공작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세이건 공작가도 유서 깊은 대귀족이었으나 최근엔 피어트 공작가에 비해 위명이 떨어졌던 것이다. 피어트 공작가의 삼 남매도 사교계를 주름잡고 있었고.

    친제국파 귀족들의 수장인 칼로시 대공조차 요즘 피어트 공작가의 인기와 영향력을 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랜만에 서부를 벗어나 기반 없는 수도에서 딸을 데뷔시키고 사교활동까지 시키려니, 아무리 세이건 공작이라도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내 딸의 명예와 자존심을 지키고, 가문의 영향력을 적절히 과시해야 한다.’

    트로우 백작은 이 틈을 파고들었다.

    수도의 소문에 빠삭한 트로우 백작가에서 돕겠다고, 사교계에 세이건 공녀의 소문을 잘 내겠다고 말이다. 세이건 공작은 접점이 없는 트로우 백작의 호의를 경계했다.

    “백작께서 왜 우리 유리아를 지원하겠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자그마한 상단을 꾸리고 있습니다.”

    트로우 백작이 그럴싸한 이유를 내세웠다.

    “크림이며 분이며 입술연지 같은…… 그런 화장품과 약품을 좀 취급하고 있지요. 그런데 피어트 상단에서 레아 피어트를 페이릴리로 밀면서, 그쪽 상품의 인기가 너무 높아졌지 뭡니까.”

    “흐음.”

    “그래서 저희도 레아 피어트에게 맞설 만한 아름다운 아가씨를 찾고 있었는데, 아시다시피 미모며 가문이며 넘어설 만한 영애가 있어야지요. 이번에 유리아 공녀가 데뷔한 모습을 보고 ‘아, 저분이다’ 싶었습니다.”

    세이건 공작은 납득했다. 그런 이유라면 유리아를 지원하려는 게 이해가 됐던 것이다.

    “그러니까…… 같은 급의 공녀인 우리 유리아를 트로우 상단의 뮤즈로 내세우겠다는 게로군요?”

    “하하, 역시 이해가 빠르십니다.”

    트로우 백작이 은근하게 말했다.

    “세이건 공녀님과 공작가에도 나쁜 제안은 아닐 겁니다. 공녀님께 모자란 건 단 하나, 수도와의 인연 아니겠습니까. 저희가 그걸 제공해 드리면 날개를 다는 거나 마찬가지지요.”

    확실히 수도 귀족인 트로우 백작의 도움이 있으면 유리아가 수도 사교계에서 자리 잡기 좋을 터였다. 세이건 공작은 솔깃하면서도 염려스러웠다.

    “그러면 우리 유리아가 페이릴리와 경쟁구도에 놓일 텐데…… 부끄러운 말이지만 아직 어리고 뭘 잘 모르는 아이입니다.”

    “품 안의 자식이란 게, 부모 눈에는 다 모자라 보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트로우 백작이 살살 부추겼다.

    “유리아 공녀님의 미모라면 소문은 돌게 마련입니다. 어차피 화제가 될 거라면, 좀 더 성대한 관심을 받는 것이 오히려 공녀님께도 낫지 않겠습니까?”

    “으음.”

    “공녀님을 수도 사교계에 제대로 소개하고 조언을 해 줄 발 넓은 귀부인도 이어 드리겠습니다. 위프트 백작부인이라고, 아주 깐깐한 분이 계시지요. 작위를 들으면 아시겠지만 믿을 만한 신분이고…… 참, 수도의 최신 유행을 선도하는 디자이너도 그분이 꿰고 있을 겁니다.”

    세이건 공작의 귀가 번쩍 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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