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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49)화 (49/120)

49화

“어디 몸이 안 좋습니까?”

그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주최한 영애가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며 설명했다.

“예. 새로운 차를 우려 보았는데, 피어트 영애가 향만 맡고도 기침을 해서…….”

헬릭스의 회색 눈이 차갑게 주위를 훑었다.

달그락.

그가 빈자리 가까이에 있는 찻주전자의 뚜껑을 열어 보았다. 우린 지 얼마 안 된 찻물에서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레아가 이걸 마셨습니까?”

“아, 아니요. 마시지는 않고, 잔에 따르기만…….”

헬릭스는 망설임 없이 차를 따라 맛보았다. 그의 수려한 얼굴에 노기가 서렸다.

“……미량의 마비성분이 있군요.”

“마, 마비성분이요?”

“레아는 북부에서 요양할 때 독약을 먹은 적이 있어, 항상 마실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헬릭스의 딱딱한 말에 영애들은 놀라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냥 장난 좀 치려고 한 것뿐인데!’

그녀가 차를 마시지 않고 쏟아서 천만다행이었다. 레아 피어트 영애 암살미수로 몰릴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하니 몸이 떨렸다.

“레아를 봐야겠습니다.”

헬릭스의 말에 퍼뜩 정신 차린 티파티 주최자가 허둥지둥 앞장섰다.

“휴, 휴게실은 이쪽이에요!”

❀ ❀ ❀

제린느 영애의 안내를 받아 가면서, 레아는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원래 휴게실이 이렇게 안쪽에 있나?’

티파티나 칵테일파티, 무도회를 주최할 때 귀족들은 내실보단 외실 쪽에 휴게실을 꾸몄다. 가족들의 사생활을 보호하고, 손님들에게도 그쪽이 편했으니까.

그런데 제린느 영애는 그녀를 이끌고 자꾸 내실 쪽으로 향했다.

‘팔 아파.’

마치 연행하는 사람처럼, 제린느 영애는 레아의 팔에 꽉 팔짱을 끼고 이끌었다. 걸음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급했고, 흘깃 올려다본 옆얼굴은 긴장해서 딱딱했다.

“제린느 영애, 불편해요. 팔 좀 놔주세요.”

“싫어요.”

엥?

레아는 황당해서 제린느 영애를 쳐다보았다. 제린느 영애가 고개를 돌렸다. 꽃과 같이 화사한 얼굴에 기괴한 미소가 피었다.

“영애는 또 아프다면서 빠져나갈 거잖아요.”

“예?”

“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사교계로 돌아오겠죠? 참 편리해서 좋겠어요. 빠져나갈 때면 아프면 되고, 다시 돌아올 때면 집안에서 힘쓰면 되고.”

말투에서 악의가 넘실거렸다. 레아는 그녀에게 잡힌 팔을 빼려고 몸을 비틀었다.

“혼자 그렇게 빠져나가지 말아요.”

제린느 영애가 레아의 팔을 꽉 잡았다. 물귀신 같은 힘이었다.

“뭐 없는 년만 이리저리 웃음 팔고 굽실거리고 다녀서야 되겠어요?”

“제린느 영애.”

“네, 피어트 영애. 영애는 인생이 다 쉽죠? 맘대로 안 되는 게 없겠죠? 뭘 해도 부모님과 오빠들이 받쳐 주니 남의 티파티에서 차도 멋대로 쏟고! 그 차가 어떤 찬데!”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에게서 악의가 마구 쏟아져 나오자, 레아는 순간 숨이 막혔다.

자신을 질투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눈앞의 사람에게서 진짜 진득한 악의를 받는 건 생각한 것보다 훨씬, 훨씬 더 엿 같았다.

떨리는 손을 꽉 쥐며 레아가 이를 악물었다.

“……남의 인생 멋대로 재단하지 마시죠.”

“내가 틀린 말 했어요? 당신도 고생이 뭔지 알아야 해.”

제린느 영애가 레아를 마구 잡아끌었다.

“가자고요. 저기서 누가 기다리고 있는 줄 알아?”

암살자한테 머리채를 잡혔을 때처럼 화가 났다. 레아는 속으로 생각했다. 여기는 수도야. 마법을 쓰면 안 돼. 마법을 쓰면…….

“너한테 딱 어울리는 늙고 피둥피둥한 신랑감이 기다리고 있다고!”

레아의 머릿속 이성이 툭 끊어졌다.

“아악!”

갑작스러운 화염이 제린느 영애의 왼뺨에 솟아오르는 것과 동시에, 제린느 영애의 몸이 바닥으로 팽개쳐졌다.

“레아!”

“헬릭스?”

레아가 눈을 깜박였다. 바닥을 구르는 제린느 영애를 제압한 뒤 레아를 쳐다보는 은발의 남자는 분명히 헬릭스였다.

“어, 어떻게 여기에 있어?”

“지금 그게 중요한가?”

헬릭스는 제린느 영애의 팔을 꺾어 뒤로 묶자마자 레아에게 달려왔다. 그녀의 어깨를 잡고, 손을 잡고, 얼굴을 살폈다.

“괜찮나? 다친 덴 없고?”

헬릭스다. 진짜 헬릭스다.

다정한 목소리에 마음이 놓였다. 레아는 울면서 그를 껴안았다.

평소엔 잘만 하던 투정도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그저 서럽고, 억울하고…….

‘나 안 괜찮아. 나 좀 데려가.’

말하지 못하는 마음을 알아들은 것처럼 헬릭스가 그녀를 안아 올렸다.

“영애, 저 영애를 붙잡아 두시면 피어트 공작가에서 데리러 사람이 올 겁니다.”

쫓아온 주최자 영애가 파랗게 질려 고개를 끄덕였다. 헬릭스는 주위를 둘러보며 이어 말했다.

“그리고 저 영애와 한통속인 남자가 있을 것 같으니, 도망치는 남자가 있는지 확인해 주십시오. 방문객 명단도 넘겨주셨으면 합니다.”

“아, 알겠어요.”

“그리고 이번 일은…….”

헬릭스에게서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차디찬 마나가 흘러나왔다. 그에 압도당한 주최자 영애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며 입을 닫겠다고 약속했다.

헬릭스는 제 망토로 레아를 꽁꽁 싸서 마차까지 안고 갔다. 마차에 탄 레아는 한참을 울었다.

“레아, 네 잘못이 아니다.”

“…….”

“정말이다. 수호자의 이름으로 보장할 테니…….”

그는 어쩔 줄을 몰랐다.

가끔 약한 모습을 보이긴 해도 항상 씩씩하려고 노력하는 그녀가 이렇게 하염없이 우는 건 처음 보았다.

엉엉, 아이처럼 우는 얼굴이 안쓰러웠다. 딸꾹질을 하면서도 그치지 않는 울음소리를 멈출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들썩이는 어깨를 감싸고, 저 떨림을 멈추게 할 수만 있다면…….

그렇지만 정작 레아의 눈물을 보니 머리가 하얗게 되어 손도 제대로 나가지 않았다. 안절부절못하는 그를 향해 그녀가 눈물 젖은 얼굴을 들고는 물었다.

“나 충전해도 돼?”

충전? 마나 교환 없이 그의 손에 얼굴을 묻던 일 말인가? 헬릭스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해도 된다.”

“지금 급속 충전으로 해도 돼?”

“레아 네가 원하면 무엇이든, 무엇이든 해라.”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그녀가 그를 폭 껴안았다. 그러고는 제풀에 놀라 중얼거렸다.

“진짜 단단하다…….”

“……딱딱하면 떼도 된다.”

“아니야. 나 마음이 놓여.”

레아가 그의 가슴에 제 뺨을 밀착하며 한숨을 쉬었다.

헬릭스는 뻣뻣해져서 몸을 틀려다 멈칫했다. 그에게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는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

헬릭스가 가만히 손을 들어 레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손길과 크게 울리는 심장 고동에 그녀의 울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나 조금만 더 울 거야. 그러고 나서 제린느 영애랑 한통속인 남자랑 가만 안 둘 거야.”

“더 울어도 된다.”

헬릭스가 말했다.

“그 영애와 한통속인 남자에게 어떻게 할지 걱정 마라. 우리가 알아서 하겠다. 너는 더 울고, 더 화내고, 네 맘대로 해도 된다. 레아 네가 그러는 동안…….”

그가 잠시 망설였다.

“……계속 네 옆에 있겠다.”

레아가 안심한 듯이 헬릭스의 품에 파고들었다. 헬릭스는 피어트 공작 저택에 도착할 때까지 몸에서 힘을 풀지 못하고, 나무토막처럼 있어야 했다.

❀ ❀ ❀

제린느 영애와 짠 남자가 누구였는지, 배후가 있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녀가 티파티가 있던 저택에서 독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피어트 공작가에서 데려와 치료하며 지켜봤지만, 깨어난 제린느 영애는 말도 못 하고 어눌해진 상태였다.

“아무래도 배후가 있었던 것 같아요. 자기 스스로 저런 독을 먹었겠어요?”

그동안 냉정함을 되찾은 레아가 말했다. 리케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트로우 백작가에서 후원을 받았으니 그쪽과 연관이 있겠지.”

“트로우 백작은 의심을 피하려고, 제린느 영애에게 하던 후원도 끊었다고 하더구나.”

피어트 공작이 언짢은 얼굴로 수염을 쓸었다.

티파티를 주최한 영애는 약속대로 입을 다물었고, 불미스러운 시도는 수면 아래로 묻혔다. 피어트 공작가는 제린느 영애를 더 치료하지 않고 제 가문으로 돌려보냈다. 얼굴에 화상을 입고 말도 못 하게 되었으니 앞으로의 인생이 편하지는 않을 터였다.

“다 자신이 자초한 일이다.”

헬릭스는 냉정하게 말했다.

“트로우 백작 같은 자와 손을 잡은 건 그녀 본인이 아닌가.”

“그래서 치료를 안 한 거야? 헬릭스는 역시 악당에겐 가차 없네.”

“레아 너에게 그런 짓을 했는데 치료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헬릭스가 딱 잘라 말했다.

딱딱한 그 말에 세상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레아는 배시시 웃으면서 그를 올려다봤다.

“그치. 헬릭스는 나 치료하기도 바쁘니까.”

“……그러면서 은근슬쩍 팔은 왜 껴안나?”

“충전인데.”

“……그 충전 요즘 점점 잦아지는 것 같다.”

“아니야. 착각일걸? 헬릭스도 내가 좋으니까 그런 기분이 드는 거 아닐까?”

레아가 방글거리며 헬릭스를 향해 웃었다. 한숨을 쉰 그가 포기한 듯 그녀의 손을 도닥였다.

“내가 옆에서 계속 지켜야 하니 참는다.”

“응. 힘내서 계속 참아야 해? 헬릭스는 할 수 있어.”

“…….”

레아와 헬릭스는 곧 제린느 영애의 일을 잊었다. 피어트 공작가에서 트로우 백작가를 계속 주시하고 있었고, 다른 일도 생겼던 것이다.

구출대가 루얀과 고용인들을 구해서 돌아왔다.

❀ ❀ ❀

돌아온 루얀은 눈 밑이 거뭇해진 상태였다.

“빌어먹을 수면마법…….”

언제 잠들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긴장해서 항상 경계하느라, 오히려 제대로 못 자고 피로가 쌓인 그였다.

자넷과 카라이도 그만큼은 아니었지만 마찬가지였다. 카라이는 필요한 물품만 사서 마법학교로 돌아갈 계획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되자 속이 타는 모양이었다.

“주치의님이 혼자 애들 거두느라 고생하실 겁니다.”

“그렇겠네. 일단 물품이라도 보내야겠어. 공작가에서 오래 일한, 믿을 수 있는 고용인을 몇 명 보내고…….”

말하던 레아가 한숨을 쉬었다.

“루이지 쪽에 챙겨 달라고 말해 두고 왔으니까 그나마 다행이지.”

언니 얘기가 나오자 자넷이 옆에서 움찔했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모기만 한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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