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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48)화 (48/120)
  • 48화

    그거라면 납득할 수 있었다. 마스터가 얼른 말했다.

    “역시 수호자님, 느끼고 계셨군요. 제가 드리려던 말씀도 그거였습니다. 사교계에 트로우 백작가가…….”

    “트로우 백작가가?”

    헬릭스가 날카롭게 뒷말을 재촉했다.

    “그게, 요즘 트로우 백작가에 제국 측 인사들이 자꾸 방문한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트로우 경은 사교계에서 발이 넓으니 어떤 수작을 부릴지 모릅니다. 피어트 공녀님도 조심하셔야…….”

    헬릭스의 반듯한 미간에 금이 갔다.

    “……놈들이 레아에게 수작을 부린다?”

    그가 일어섰다. 급한 동작에 망토 자락이 펄럭였다.

    “조만간 또 들르지.”

    “예? 수호자님? 갑자기 어딜 가십니까?”

    ❀ ❀ ❀

    그 시각, 레아는 오랜만에 티파티에 참석해서 또래 영애들의 수다를 듣고 있었다.

    “……그래서 팔튼 영식이 발루다 영식 손을 탁 쳐 내면서 그랬다는 거예요. ‘우리가 이렇게 따로 인사할 사이는 아니지 않나?’”

    “어머, 어머, 그래서요?”

    “발루다 영식이 무안해 가지고, 어색하게 그랬대요. ‘아니, 어차피 나도 그 영애랑 잘된 것도 아니고’ 그러면서…….”

    “웬일이야. 친구랑 막 만나려는 여자를 자기도 찔러 놓고.”

    레아는 흥미진진한 영식들 뒷담화를 들으며 안심했다.

    ‘휴, 다행이다.’

    사교계 모임이다 보니 헬릭스 얘기가 나올까 봐 잔뜩 긴장했는데, 오늘 모인 영애들은 그에 대해 아무도 묻지 않았다. 아무래도 염문설 상대가 데뷔하지 않은 인물이라 조심스러운 모양이었다.

    ‘게다가 나 북부에 있는 사이에 이런저런 연애사건도 많았던 모양이고. 나랑 헬릭스 일은 큰 관심사는 아닌가 봐.’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빨리 작위 얻어서 헬릭스를 더 당당하게 소개해야지.’

    새삼 생각하면서, 레아는 아까부터 손도 못 대고 있던 케이크에 포크를 뻗었다. 그사이에 화제는 다른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요즘 이 꽃차가 제국에서 유행이래요.”

    “어머, 어쩐지 유난히 향기롭더라니 제국의 물건이었군요.”

    “제국에서도 인기가 많아서, 어렵게 구했답니다.”

    희귀한 꽃차가 역시 귀한 유리 티포트 안에서 활짝 만개했다. 영애들은 그 광경을 숨죽인 채 지켜봤다.

    한 영애가 작게 말했다.

    “그런데 궁금하지 않아요? 이 차 말이에요. 우리가 원래 마시던 것은 찻잎이고, 이 꽃차는 꽃을 말린 건데…… 신기하게 맛이 참 다르단 말이에요.”

    영애의 눈이 반짝 빛났다.

    “둘을 섞으면 무슨 맛일까요?”

    영애의 궁금증에 다들 동한 기색이었다.

    “그러게요?”

    “그러고 보니 꽃차와 차를 섞어 마셔 본 적은 없는데, 궁금하네요.”

    늘 누군가 내주는 것만 마셔 온 그들이었다. 영애들은 갑자기 호기심이 일어 꽃차와 잎차를 번갈아 쳐다보았지만, 선뜻 섞어 마셔 보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 한 영애가 나섰다.

    그녀는 대담하게 꽃차와 차를 섞어 빠르게 우린 뒤, 딴생각에 빠져 있는 레아 앞에 내려놓았다.

    “피어트 영애, 잔이 비었네요. 식기 전에 새로 우린 차를 드셔 보세요.”

    “아, 감사해요.”

    레아는 웃으면서 받아서 마시려다가 멈칫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영애들이 하나같이 기대하는 눈빛으로 그녀에게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뭔진 몰라도 감이 안 좋았다. 레아는 찻잔을 헐겁게 쥐었다.

    “콜록!”

    그녀가 극적으로 기침하면서 찻잔을 손에서 놓쳤다. 티테이블로 차가 다 쏟아졌다.

    “꺄악!”

    영애들은 드레스가 젖을까 봐 급히 뒤로 물러났다. 티테이블에 세팅되어 있던 과자들이 그 소동에 이리저리 떨어졌다.

    “콜록! 콜록!”

    난장판에서 기침을 해 대던 레아가 가련하게 고개를 들며 손수건으로 입을 막았다.

    “콜록! 미안해요. 제가 낯선 향을 맡으면 몸이 안 좋아져서…….”

    영애들은 좀 미심쩍은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장난을 치려 한 건 자신들이었으니 뭐라 따지기도 뭣했다.

    “……그럴 수도 있죠.”

    “그래요. 피어트 영애는 워낙 몸이 약하시니까.”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콜록!”

    처음 찻잎을 섞고 레아에게 따라 주었던 제린느 영애는 속으로 욕했다.

    ‘페이릴리…… 약한 척하면서 일부러 차를 쏟아?’

    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입가를 부채로 가렸다. 저렇게 차를 섞으면 무슨 효능이 있는지 알고 한 일인데, 레아가 찻잔을 엎으면서 다 도루묵이 되었다.

    ‘페이릴리 저건 진짜……!’

    늘 화제의 중심에 선 레아 피어트는 가문도, 미모도 빼어났다. 그러면서 눈치까지 빠르다니. 제린느 영애는 분통이 터졌다.

    ‘왜 혼자 다 하는데?’

    제린느 영애는 몰락귀족 출신이었다.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그녀의 미모를 높이 평가한 트로우 백작이 밀어줘서 사교계 활동을 겨우 이어 나가고 있었다.

    트로우 백작이 그녀에게 원한 건 단 하나, 레아가 없을 때 사교계의 꽃이 되는 것이었다.

    ‘네깟 게 페이릴리 그 계집을 제칠 거라곤 기대하지 않는다.’

    사교계 데뷔 지원에 감사 인사를 하러 간 자리에서, 백작은 냉혹하게 말했다.

    ‘그래도 이번 겨울에 페이릴리가 아프다고 하니 기회를 주는 거다. 혜성처럼 나타나서 시선을 사로잡아라. 그것만 해내면 결혼지참금도 조금 챙겨 주지.’

    그렇지만 모두 부질없는 일이었다. 레아가 좀 나아졌다고 복귀하면서 제린느 영애는 관심에서 밀려난 것이다.

    ‘네가 한 시즌만, 한 시즌만 안 나왔어도 내가 그 시즌 사교계의 샛별이 되어 얼른 괜찮은 혼처를 물 수 있었는데! 그러면 지금까지 이렇게 사교계에서 조마조마하게 눈치 보며 버티고 있지 않아도 됐는데!’

    그녀는 레아를 깊이 원망했다. 자신의 처지와 불행이 모두 레아 탓인 것만 같았다.

    그런 제린느 영애를 얼마 전 트로우 백작이 조용히 불렀다.

    ‘초대장을 구해 줄 테니, 이 티파티에 가거라. 드레스도 그런 하녀옷 같은 것 말고 괜찮은 것으로 맞추고.’

    제린느 영애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돈 없는 그녀가 이런 티파티에 참석할 수 있는 건 모두 트로우 백작 덕분이었으니까.

    ‘그 티파티를 주최하는 영애가 꽃차를 구하고 있더군. 내가 제국 인맥으로 구해서 그쪽에 선물로 들어가게 해 놓았다.’

    트로우 백작은 우러난 꽃차를 보여 주었다. 노란 꽃잎 가운데에 보라색 술이 곱게 피어나는 예쁜 모습이었다.

    ‘제네리얼 골드라는 꽃을 가공한 차지. 이 꽃차에 이 찻잎을 섞으면, 약한 독으로 쓰이기도 하고.’

    긴장해서 침을 삼키는 제린느 영애에게, 백작이 꽃차와 섞을 차 통을 밀어 주었다.

    ‘이걸 가지고 가서 꽃차와 섞어 레아 피어트가 마시게 해라. 그리고…….’

    트로우 백작은 그녀에게 계획을 알려 주며 작전을 지시했다.

    ‘그런데 저 영악한 게 차를 안 마시면서 계획이 틀어졌어.’

    제린느 영애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여기서 포기할 순 없었다.

    “피, 피어트 영애, 죄송해요. 몸도 약하신 분한테 제가 그만……!”

    영애가 몸을 벌벌 떨며 레아 앞에 두 손을 모았다.

    “제 잘못이에요. 사과드릴게요!”

    레아는 당황하며 손을 저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아닙니다! 정말 죄송해요! 어디 편찮으신 덴 없으세요? 의사한테 보여야 하는 거 아닐까요?”

    과하게 걱정하는 제린느 영애의 행동에 다른 영애들도 서로 눈치를 봤다.

    어쨌든 이 티파티에서 제일 가문 좋고 영향력 있는 영애는 레아 피어트였던 것이다. 그런 레아에게 단체로 장난을 치려 했으니…….

    ‘제린느 영애가 저럴 만하지.’

    ‘정말 아프기라도 하면 어떡해?’

    티파티를 주최한 영애도 걱정되었는지 입을 열었다.

    “휴게실로 가문의 의사를 부를 테니 잠시 쉬세요, 피어트 영애.”

    “아, 아니 그럴 필요까진.”

    “제가 같이 가 드릴게요! 지난번에 가 봐서 휴게실이 어딘지 알고 있답니다.”

    제린느 영애가 레아의 팔짱을 끼었다. 주최자는 파티 자리를 비울 수 없는데 제린느 영애가 나서 주니 반가운 모양이었다.

    “고마워요, 제린느 영애. 부탁해요.”

    “저기, 저 진짜 괜찮은……?”

    레아는 더 항변해 보려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최자도 다른 영애들도 불편한 얼굴이었다. 너무 과하게 아픈 척했나 봐. 그녀는 포기하고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침을 조금만 덜할 걸 그랬나?’

    반성하는 그녀를 제린느 영애는 미소 지으며 이끌었다.

    “휴게실에서 쉬시면 좀 나아지실 거예요.”

    그녀는 레아를 휴게실로 안내하는 척 다른 방으로 데려갈 생각이었다. 트로우 백작은 그 방에 더포드 남작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했다.

    ‘아까워. 아까 차를 마셨으면 지금쯤 몸이 말을 안 들을 텐데.’

    제린느 영애는 아쉬움을 떨쳐 내며 레아의 팔을 잡았다. 계획이 조금 어그러졌지만 괜찮았다. 방까지 데려다 놓으면 더포드 남작이 알아서 할 테니까.

    ‘방에 밀어 넣고, 바로 밖에서 문을 잠가야지. 그리고 돌아가서 영애들 틈에 있다가 오래 안 나오는데 걱정된다고 운을 떼는 거야. 그리고 다른 영애들과 우르르 몰려가서 현장을 덮치면 돼.’

    더포드 남작과 있는 광경이 들키면 레아는 더 이상 페이런의 백합으로 불리지 못할 것이다. 제린느 영애의 두 눈이 기대와 흥분으로 반짝였다.

    ‘너도 답 없는 인생이란 걸 경험해 봐, 레아 피어트.’

    ❀ ❀ ❀

    티파티를 주최한 영애는 레아에게 의사를 보내는 걸 까맣게 잊고 말았다. 뜻밖의 손님이 티파티에 난입했기 때문이었다.

    “네? 피어트 영애를 데리러 오셨다고요?”

    신화 속에서 나온 듯한 긴 은발의 미남자가 정중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레아는 어디에 있습니까?”

    남자가 나타나면서 숨을 멈추고 있던 영애들이 드레스 밑으로 발을 굴렀다.

    ‘저 남자였구나! 세상에, 이름을 막 부르는 사이야?’

    ‘레아래! 레아라고 부를 때 목소리 진짜 꿀 떨어진다…….’

    레아 피어트와 같이 다닌다는 정체불명의 미남자 소문은 들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잠시 멍해져 있던 티파티 주최 영애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

    “피어트 영애라면 제린느 영애가 휴게실로 데려갔어요.”

    “휴게실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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