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레아.”
헬릭스가 물었다.
“네 것은 안 사나?”
“응? 내 건 많잖아.”
레아가 대수롭잖게 대꾸했다. 헬릭스의 미간이 살포시 구겨졌다.
그가 새삼 테일러샵 안을 돌아보았다. 확실히 남성복 위주인 곳이었다.
“저것도 주시오.”
헬릭스가 가리킨 것은 그가 입었던 남국의 왕자 같은 화려한 야회복과 같은 옷감으로 만든 스카프였다.
“이건 내가 계산하겠다.”
“응?”
네가 돈이 있어? 되물으려는 레아의 눈앞에서 헬릭스의 손에 금화가 나타났다.
“이, 이건?”
“마도시대의 금화!”
경악하는 직원들에게 헬릭스가 물었다.
“충분한가?”
“충분하다마다요! 이것으로 오늘 사 가시는 옷까지 다 되고도 남습니다!”
헬릭스가 레아를 슬쩍 돌아보았다.
놀란 표정 사이로 살짝 뾰로통해진 게 보였다.
저렇게 표정이 다 드러나는 게 은근히 귀여워서, 놀리고 싶어졌다. 그는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말했다.
“아니다. 옷은 내게 주는 선물이니, 따로 계산하지.”
“그, 그럼 거스름돈은 어떻게 드릴까요?”
“음.”
헬릭스가 잠시 고민했다.
“오늘 내가 입은 것과 세트로 여성복을 제작해 줄 수 있겠나?”
“세트로 여성복을 말입니까?”
매니저가 놀라 되물었다.
“그렇다. 치수는…… 이 아가씨한테 맞춰서.”
헬릭스의 손이 레아를 가리켰다.
“가능하겠나?”
“물론입니다!”
직원들이 달려 나와 빛의 속도로 레아의 치수를 재 갔다. 매니저가 아부와 진심을 섞어 미소 지었다.
“두 분 다 너어무 완벽하신 체형이라 더 손보기도 무서울 지경입니다.”
“우리 헬릭스가 좀 완벽하긴 해.”
“레아, 그건 네 얘기가 아닌가.”
매니저는 순간 표정 관리가 풀릴 뻔했다. 필사적으로 비즈니스 미소를 유지한 그를 필두로 테일러샵의 직원들이 나란히 서서 구십 도로 허리를 숙였다.
“마음에 쏙 드시도록 작업해 놓겠습니다. 다시 또 들러 주십시오!”
“살펴 가십시오!”
가게를 나오자 레아가 작게 감탄했다.
“나도 돈지랄 꽤 한다 생각했는데, 헬릭스 의외로 소질이 있네.”
“나는 뭐든 빨리 배운다.”
그녀가 키득 웃었다.
“칭찬 빼고?”
“……빼고.”
무덤덤하게 대꾸한 그가 레아의 손에 스카프를 쥐여 주었다.
“이거 뭐야?”
“아까 그 헐렁한 야회복과 세트지 않나.”
헬릭스가 말했다.
“그런 옷을 입을 계절이라면 따뜻하겠지만…… 레아 너는 그럴 때도 추위를 탈 수 있으니까. 같이 맞춰 입고 춥다고 떨지 말고 이걸 목에 둘러라.”
건네받은 스카프가 부드럽게 손등을 쓸었다. 마치 헬릭스의 손이 스치며 세심하게 쓰다듬는 것처럼. 레아가 웃었다.
“그 옷 입을 계절은 반년도 더 지나서 올 텐데, 벌써 그때 나 추울까 봐 걱정하는 거야?”
“당연한 일이다.”
마음이 비단 스카프 위에 놓인 양 보들보들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헬릭스 진짜 귀엽다.”
“……방금 그 칭찬 좀 이상하지 않나?”
❀ ❀ ❀
수도에 레아 피어트가 나타나 초미남과 함께 거리를 휘젓고 다닌다는 소문에, 트로우 백작가의 두 부자는 부들거리며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결혼도 안 한 귀족 영애가 무슨 생각으로 남자와 대놓고 어울려 다닌단 말이냐?”
“얼굴도 안 가리고 딱 붙어서 돈을 팍팍 쓰고 다닌답니다! 페이릴리 그년이 대체 제정신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드러내 놓고 다녀서야, 페이릴리를 연모하는 영식들을 이용해 사교계에 더러운 소문을 흘리려는 계획도 소용없었다.
숨기려고 들면 ‘사실은 그렇고 그런 사이다’ ‘구린 데가 있다’ 하면서 추문을 내는데 레아 쪽에서 ‘자, 잘생긴 내 남자를 보아라’ 하고 아예 자랑하고 다니니 할 말이 없는 것이다.
트로우 백작이 끙, 신음을 흘렸다.
“어떻게든 얼굴을 못 들고 다니게 해야 하는데…….”
“아예 암살 쪽으로 한 번 더 알아볼까요?”
“……수도엔 눈이 많다. 피어트 공작가도 벼르고 있을 거고.”
백작은 주름진 이마를 짚었다. 이번에도 레아 피어트는 제 뜻대로 되지 않았다.
‘망할 계집…….’
처음엔 제약업계 경쟁자인 피어트 상단의 걸어 다니는 광고판이니 깎아내리려고 했는데, 이젠 그뿐이 아니었다. 해치워야 할 이유가 너무 많았다. 이쪽의 치부인 비약 인체실험을 알고 있을 것 같고, 첩자들도 소식이 끊어졌으니 처리하고 증거를 쥐고 있을 것이다.
‘이 와중에 제국 쪽에서는 왜 페이릴리의 정보를 요구하는 건가.’
어렵게 잡고 유지해 온 오켄 제국의 줄이었다. 그쪽이 페이릴리에게 무슨 용건인지 찜찜하기 그지없었다.
“어떻게든 그년의 입에서 말이 못 나가게 해야 한다.”
“아버지, 그럼 소문의 방향을 바꿔서 평판을 깎아내리는 게 어떨까요? 요즘 붙어 다닌다는 의문의 미남자와 엮어서 더 지저분하게 말입니다. 페이릴리가 북부에서 빨리 돌아온 건 애를 배서 그렇다거나…….”
잠시 혹하던 트로우 백작이 고개를 저었다.
“그걸로는 안 된다. 남자가 그렇게 눈에 띄는 외모라 하지 않았느냐?”
“예. 리케일 피어트와 루얀 피어트 추종자들이 그쪽으로 이탈할 정도라고 합니다.”
수도 제일 미남들인 리케일과 루얀을 제친단 말인가. 트로우 백작이 얼굴을 찌푸렸다.
“약빠른 년. 페이릴리 정도 되는 위치에 상대가 절세미남이면, 추문이 아니라 훈장이 될 수도 있다. 차라리 더포드 남작이 더 엉겨 붙게 놔둘 것을…….”
중얼거리던 백작의 눈이 번쩍 뜨였다.
“얀, 더포드 남작은 요즘 뭘 하고 있느냐?”
“어…… 페이릴리도 저러고 있으니…… 어디서 신인 여배우나 쫓아다니고 있지 않겠습니까?”
❀ ❀ ❀
한편, 수도의 암흑길드에선 마스터가 혼비백산하고 있었다.
“누구……!”
누구도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마스터의 비밀 사무실 문이 스르륵 열렸던 것이다.
다행히 들어온 건 익숙한 인물이었다.
“수, 수호자님이셨습니까?”
“뭘 그렇게 놀라고 그러나.”
여상한 목소리에 마스터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오랫동안 이렇게 기척도 없이 제 근처에 온 사람이 없었단 말입니다. 소리 좀 내 주십시오.”
“하프엘프의 노련함으로 최고의 암살자가 되었다고 자랑하더니, 무슨 약한 소리인가.”
“상대가 수호자님인데 어떻게 이깁니까?”
고개를 젓던 마스터는 약간 의아함을 느꼈다.
‘지난번엔 이보다 좀 더 기척을 내셨던 거 같은데? 혹시 힘이 돌아오고 계시는 건가.’
마스터는 기대하는 눈으로 헬릭스를 쳐다보며 자리를 권했다.
“마침 잘 들르셨습니다. 알려 드리고 싶은 소식이 들어왔거든요.”
그가 헬릭스에게 자리를 권하며 서류더미를 뒤졌다.
“이걸 봐 주십시오.”
마스터가 건넨 건 대충 특징을 잡아 그린 스케치였다. 그림을 살펴보던 헬릭스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마스터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무래도 드래곤 유물 같지 않습니까?”
“그렇군. 그림으로만 봐선 진품인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특징을 보면 드래곤 알껍질로 만든 술잔 같다.”
스케치를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던 헬릭스가 날카롭게 물었다.
“어디서 찾았나?”
“드래곤 유물이 자유무역도시 경매에 올라왔단 소문이 있어서, 그쪽 관련된 사람한테서 정보를 샀습니다.”
“자유무역도시?”
“아, 수호자님은 모르시겠군요. 만들어진 지 이백 년밖에 안 된 곳이라.”
마스터가 설명했다.
자유무역도시는 오켄 제국의 남서쪽 아래, 해안지방에 붙어 있는 무역도시국가였다. 위로는 오켄 제국, 아래로는 남부사막을 면하고 있어 여러모로 무역의 중심지가 되기 좋은 곳이었다.
“기억나는군. 옛날에도 그 지역엔 무역도시들이 여럿 있었는데.”
“이백 년쯤 전에 무역도시들이 협정을 맺고 연맹도시국가로 바뀌었지요. 페이런 왕국에서도 가깝습니다. 남쪽 해안도시에선 바람만 잘 받으면 일주일이면 도착한다더군요.”
“그렇다면 무역이 성행하고 있을 테니 정보도 잘 돌겠군.”
“예. 아무래도 페이런에서 오켄 제국 정보를 알긴 어렵습니다. 그나마 자유무역도시를 통하면 좀 낫지요. 시간 차가 있다 보니 한참 지난 소문이 들어올 때도 있습니다만…….”
마스터가 목소리를 낮췄다.
“아무튼 자유무역도시에서 드래곤 유물을 찾는 이들이 있는 건 확실한 것 같습니다.”
알아본 정보에 의하면 오켄 제국의 이황녀가 드래곤 유물 수집에 열을 올리고 있다고 했다.
“오켄 제국의 이황녀?”
“예. 요즘은 일황자가 제치고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켄 제국의 차기 황태녀감으로 지목됐던 인물입니다.”
일황자 아르카이크 오켄이 미약한 지지기반에도 불구하고 드래곤과의 교감과 카리스마로 주목받고 있다면, 이황녀는 태생과 재능 양쪽에서 일찍이 차기 황제감이라 여겨졌다.
오켄 제국 대귀족 출신인 황후 소생인 데다, 일황자를 제외하면 황제의 자식 중 가장 나이도 많고 빼어나게 영리했기 때문이다. 황제와 황실친위대 뱀 기사단이 일황자의 편으로 돌아선 지금까지도 아직 제국 고위귀족들은 이황녀를 지지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일황자가 드래곤과의 교감으로 황제의 마음을 사고 민심을 얻었으니, 이황녀도 드래곤 유물이라도 내세우려나 봅니다.”
“흐음.”
헬릭스가 턱을 쓸었다.
“그렇다면 이황녀가 주목할 게 빤한데, 말도 안 되는 물건을 드래곤 유물이라 내놓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그렇습니다. 진품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지요.”
마스터의 대답에 헬릭스가 스케치를 그에게 도로 밀면서 물었다.
“이 유물이 어디에서 흘러왔는지 추적할 수 있겠나?”
“최선을 다해 해 보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스케치를 챙긴 마스터가 아, 하고 입을 떼었다.
“그리고 이건 피어트 공녀님이 함께 계실 때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만…….”
“내게 말하게. 레아는 오늘 티파티에 가야 해서 바쁘다더군.”
마스터가 멈칫하며 헬릭스를 쳐다보았다.
“같이 안 가셨습니까?”
“아직 작위 준비가 덜 됐다던데.”
덤덤하게 말하는 듯했지만 목소리는 미묘하게 초조한 기색을 띠었다.
‘초조해하신다고? 수호자님이?’
늘 수호자에게 있어 개인적인 감정과 욕심은 위험요소일 뿐이라고 말하던 헬릭스였다.
왕국과 대마법사와 드래곤들이 구애하고 협박해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던 그가 새삼 작위에 집착할 리 없었다.
‘……수호자로서 본능적으로 계약자의 위기를 감지하시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