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45)화 (45/120)
  • 45화

    하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공녀님 계실 적엔 둘째 도련님하고 기사님들이 자주 순찰 도셨잖아요. 요즘에 안 하시는 사이 또 나타나서, 공녀님이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나 봐요.”

    “이 스토커 새끼들이?”

    레아가 벌떡 일어났다.

    ‘그러니까 이 사생팬 같은 놈들이 나도 없는 우리 집 앞에서 진을 치고 있다가, 내가 헬릭스랑 돌아온 걸 봤다 이거지? 그놈들이 어제 봤는데 사교계 초대장은 하루 만에 산처럼 쌓였고?’

    결론은 빤했다.

    팬클럽 놈들이 페이릴리가 귀환했다, 남자와 말 타고 왔다, 입방정을 떨며 소문을 여기저기 뿌렸으리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그녀가 전투적으로 옷장을 열었다.

    ‘차라리 사교계에 선빵을 날려야겠어!’

    ❀ ❀ ❀

    그 시각, 트로우 백작 쪽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페이릴리가 수도로 몰래 돌아왔단 말이냐? 남자와 함께 말을 타고서?”

    “예. 두 사람이 탄 말이 피어트 저택으로 들어가는 걸 본 눈이 한둘이 아니랍니다.”

    트로우 경이 말을 이었다.

    “지금 사교계가 떠들썩합니다. 페이릴리 극성팬 중에 귀족 영식들이 많지 않습니까? 모임마다 페이릴리와 그 남자에 대해 말이 도는 모양입니다.”

    “그렇단 말이지…….”

    트로우 백작이 생각에 잠겼다.

    레아 피어트.

    언젠가부터 자신의 앞길에 턱턱 걸리는 계집애였다.

    제약업계에서 피어트와 트로우의 격차가 크게 벌어진 게 언제부터인가. 레아가 페이릴리란 별명을 얻으며 사교계를 주름잡기 시작한 때부터였다. 사람들이 레아의 가냘픈 미모에 혹해 피어트 상단의 약과 화장품을 사들였던 것이다.

    트로우 백작도 나름대로 자기네 제품을 광고하기 위해 수를 써 보았다. 딸이 없으니 먼 친척 중 여자아이를 꾸미거나, 아예 미모로 유명한 몰락귀족의 딸을 후원해 사교계에 내보냈다.

    ‘그렇지만 도대체 이길 수가 없었지.’

    이마에 주름을 더 깊게 새기며 고민하던 백작이 장남에게 물었다.

    “얀, 너는 페이릴리가 왜 그렇게 인기 있다고 생각하느냐?”

    뜻밖의 질문에 멍청하게 눈을 끔벅이던 트로우 경이 대답했다.

    “예뻐서요?”

    “…….”

    이런 모자란 놈 같으니. 경멸을 담아 싸늘해지는 시선에 트로우 경이 급히 덧붙였다.

    “그, 그렇잖습니까? 사교계에서 미혼 영애가 관심받는 건 부인감으로 탐나서인데, 페이릴리는 몸이 약해 춤도 못 추는 계집인걸요.”

    백작의 눈빛이 납득하듯 조금 부드러워졌다. 트로우 경은 열심히 이어 말했다.

    “성격이라고 고분고분합니까? 피어트 가문을 믿고 어지간한 구애에는 눈도 까딱하지 않잖습니까. 저 같으면 그런 여자를 부인으로 들이진 않을 겁니다.”

    “하나 페이릴리는 계속 인기 있지 않느냐.”

    “그러니 미모 때문 아니겠습니까? 가문도 최상이고요. 남자라면 그 얼굴과 배경이 탐날 테니까요.”

    트로우 경이 말을 이었다.

    “별 볼 일 없는 가문의 영식이라면 한 번쯤 꿈꿀 겁니다. 저렇게 예쁘지만 몸이 약하니, 피어트 공작가에서 곧 죽을 딸 고생시킬 수 없다고 만만한 가문의 남자를 데릴사위로 들일 거라고요. 그게 자기가 되면 좋겠다고요.”

    “……그러니까 운이 좋으면 페이런에서 제일 예쁘고 유명한 여자를 가졌다고 뽐내면서 든든한 처가도 얻을 수 있다, 그렇게 여긴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운이 더 좋으면 페이릴리가 죽으면서 유산도 남겨 줄지 모르니까요.”

    어리석은 놈들. 트로우 백작이 쯔, 혀를 찼다. 피어트 공작가가 그렇게 만만하게 나올 성싶은가.

    그렇지만 한 가지는 얻은 게 있었다.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다면, 사람들은 페이릴리의 남성 편력에 민감하게 반응하겠지.’

    원래도 영애들의 추문에 가혹한 사교계였다. 백작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얀, 페이릴리와 함께 온 남자에 대해 알아봐라.”

    “예?”

    트로우 경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아버지,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요? 고작 계집 하나에 너무 신경을 많이 쓰시는 게 아닐지.”

    “모자란 놈.”

    백작이 매섭게 힐난했다.

    “페이릴리가 비약을 먹었을지도 모른다는 걸 잊었느냐? 더포드 남작의 암살 사주와 우리가 엮여 있다는 걸 잊었느냔 말이다.”

    비약은 그저 극독이 아니었다. 오켄 제국의 인체실험에 가담하며 그 원료로 받는 은밀한 물품이었다.

    그런데 그런 비약을 잃어버렸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피어트 별장에 심어 놓았던 첩자들은 실종되고 말았다. 더포드 남작의 의뢰를 받아 사주한 레아 암살 시도도 실패로 끝났고, 북부에서 진행하던 인체실험도 흐지부지되며 관련된 이들이 죄다 사라졌다.

    “터지면 큰일 날 일들이 한둘이 아니다. 게다가 더포드 남작이 믿을 만한 놈이더냐?”

    “……절대 아니지요.”

    “불리해지거나 페이릴리에게 잘 보이고 싶으면 서슴없이 우리를 팔 놈이다.”

    백작의 말에 트로우 경도 심각해졌다.

    아버지의 말이 맞았다. 페이릴리와 더포드 남작은 트로우 백작가의 치부에 너무 많이 연관되어 있었다.

    “그럼 더포드 남작을 처리할까요?”

    “놈보다는 페이릴리가 급하다. 이번 건은 사교계에서 페이릴리의 평판을 떨어트릴 기회야. 모르겠느냐? 사람들이 그년이 하는 말은 다 못 믿게 만들어 놔야 우리가 더 안전해진단 말이다.”

    트로우 백작의 말에 트로우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 페이릴리와 함께 온 남자를 속속들이 파 봐라. 놈과의 추문을 이용해서 페이릴리의 명성을 끌어내리자꾸나.”

    ❀ ❀ ❀

    “헬릭스, 당장 사교계에 데뷔하자.”

    헬릭스는 아침부터 들이닥친 레아의 말에 놀라 되물었다.

    “내가? 사교계에 말인가?”

    “응.”

    레아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생각해 봤는데, 어차피 헬릭스는 나랑 붙어 다닐 거잖아? 어설프게 숨기는 것보다는 아예 사교계에 데뷔하는 게 좋겠어.”

    그녀의 말에 헬릭스도 생각에 잠겨 턱을 쓸었다.

    “……일리 있는 생각이긴 하다. 나 또한 사교계에서 레아 네가 위험해질까 봐 신경 쓰였고.”

    북부 별장에서 암살미수도 있었으니 수도라고 안전한 건 아니었다. 범인으로 유력한 용의자들도 함께 사교계 활동을 할 테니 더더욱 주의 깊게 지켜봐야 했다.

    고개를 끄덕이던 그가 문득 미간을 좁혔다.

    “그런데 페이런 왕국의 사교계도 귀족 중심일 텐데? 작위가 있어야 활동할 수 있지 않나?”

    “무슨 걱정이죠?”

    레아가 가슴을 폈다.

    “우리 아빠한테 하나 내려 달라고 하면 되는데.”

    헬릭스는 회색 눈을 깜박였다.

    “레아, 지금 좀…… 처음으로 철부지 공녀처럼 보였다.”

    “어허, 실례야. 이왕이면 금수저 공녀님이라고 해 줘.”

    “뭐가 다른가?”

    “엄청 다르지. 갑질을 모르고 하는 거랑, 알면서 한다는 점이 다르잖아?”

    “…….”

    ❀ ❀ ❀

    레아는 속전속결의 정신으로 그 길로 헬릭스와 함께 공작에게 쳐들어갔다.

    “헬릭스에게 작위를 하나 주세요.”

    “알겠다.”

    의외로 공작은 흔쾌히 동의했다.

    ‘엥?’

    제가 해 달라고 했지만 너무 금방 오케이 사인이 떨어져서 얼떨떨했다. 레아는 멈칫하면서 모여 있는 가족들을 살폈다.

    “저기, 저 분명 헬릭스한테 작위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 아버지가 알겠다고 하시잖니. 이참에 데뷔하는 것도 좋을 것 같구나.”

    “편하게 활동하려면 작위가 필요하긴 하지. 남작 정도면 괜찮겠어? 백작 이상은 국왕의 허락이 있어야 해서 시일이 걸리거든.”

    공작부인과 리케일 소공작이 거들었다. 공작도 큼큼, 헛기침을 하며 덧붙였다.

    “어차피 계속 네 건강과 마법을 보살펴야 하지 않느냐.”

    하나같이 해야 할 일이었는데 잘됐군 하는 반응들이었다. 말을 꺼낸 레아가 약간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헬릭스를 어제 처음 보시지 않았나? 왜 이렇게들 협조적이지?’

    그녀는 미처 모르고 있었다.

    주치의가 초반에 레아의 건강에 대해 매일같이 편지를 써 보냈던 것을.

    <정체불명의 독에 당한 공녀님을 구해 오시더니 사흘 밤낮으로 간호를…….>

    <공녀님을 위해 매일같이 마나를 불어넣고, 산책을 시키고, 마법수업을…….>

    <헬릭스 님의 마나 수련법으로 공녀님의 맥이 더욱 안정…… 건강…… 식사를 무려 한 그릇…….>

    마법덕후인 데다 헬릭스를 은인으로 여기는 그가 구구절절 헬릭스 칭찬을 했고, 그 편지를 공작 부부가 닳도록 돌려 봤다는 것도 말이다.

    게다가 얼마 전부터는 루얀으로부터도 서신이 왔다.

    <헬릭스란 능력자가 레아와 저의 건강과 성취에 큰 도움을 준 덕분에…….>

    루얀이 레아 근처의 남자를 칭찬하다니,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었다.

    그 서신을 본 리케일 소공작은 그만 헬릭스에 대한 경계심이 무장 해제되고 말았다.

    ‘루얀이 저랑 검이랑 레아밖에 모르긴 하지만, 동물적인 감 하나는 타고난 놈이다. 사람 잘못 보는 법이 없지.’

    레아의 목숨을 구한 데다 건강해지게 만든 것만으로도 일생의 은인이었다. 그런데 루얀의 인성검사(?)까지 통과했으니, 공작가 사람들의 마음은 헬릭스에게 이미 열린 문이었다.

    걸리는 것이 있다면 불확실한 신분뿐이었으니, 그건 신분 세탁을 하면 될 일이었다.

    “일단 우리 방계의 귀족 신분을 붙여서 데뷔시키는 걸로…….”

    공작과 리케일이 구체적인 계획을 짤 때였다.

    벌컥.

    “공작님! 익명의 투서가 빗발치고 있습니다!”

    “뭐? 투서가?”

    잘 굴러가는 피어트 공작가엔 투서가 오는 일 자체가 드물었다. 공작이 당황해서 물었다.

    “무슨 투서인가?”

    “그…… 저…….”

    소식을 전했던 보좌관이 말을 잇지 못한 채 공작가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다.

    “고, 공녀님 처신을 바로 하라고…….”

    “뭐어야?!”

    대번에 벌컥 화를 내는 공작 앞으로 레아가 이때다 하고 끼어들었다.

    “아빠! 그놈들이에요! 저 따라다니는 팬클럽 놈들이요!”

    “내가 그놈들을 싹 잡아다 지하감옥에 처넣을 걸 그랬다!”

    “그러니까요! 그놈들이 제가 헬릭스랑 말 타고 온 걸 보고 벌써 사교계에 얘기를 퍼트렸대요.”

    공작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그래서 헬릭스에게 작위를 달라고 온 거로구나.”

    “네. 소문이 더 퍼지기 전에 아예 사교계에 본때를 보여 주려고요.”

    레아의 말에 공작 부부와 소공작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