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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44)화 (44/120)

44화

레아를 이토록 힘들게 하면서 자신이 그녀의 주인이라느니 뭐니 지껄이던 놈. 생각만 해도 이가 갈렸다.

‘드래곤의 힘이었다. 드래곤의 마법이었고. 하나…… 정작 놈은 완전한 드래곤의 느낌은 아니었다.’

헬릭스가 이리저리 추론했다.

‘드래곤과 계약한 자인가? 아니,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강하다.’

마법과 마나에 대해선 모르는 게 없는 자신인데, 이번엔 상대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어 초조했다. 게다가 놈은 아무래도 레아가 가진 드래곤 마나의 주인 같았다. 그녀를 노리고 있었고.

‘어서 수도로 가서 케론과 피어트 공작가의 협조를 얻어야 한다.’

누군가의 협조 없이는 이 소중한 계약자 하나 지킬 수 없다니. 제 앞에 앉은 채 말의 진동에 흔들리는 레아의 어깨가 너무도 작고 약하게 느껴져, 헬릭스는 자신의 무능함에 입이 말랐다. 힘이 돌아오지 않은 게 답답하고 또 답답했다.

‘레아.’

속으로 불렀는데 그녀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헬릭스는 놀란 티를 내지 않고 레아와 눈을 마주했다. 걱정과 말타기에 시달려 해쓱해진 얼굴마저도 예뻤다.

“……내가 있다.”

“응.”

다행이야.

입 모양으로 말하며 그녀가 몸을 뒤로 기울여 머리를 숙였다. 자그맣고 동그란 머리통이 그의 가슴께에 콩 닿았다.

닿은 곳에서부터 찌르르 통증이 번졌다. 가슴 전체가 심장이 된 것 같았다.

다른 때에도 누구보다 레아 먼저 챙기고 지키려던 그였다. 그렇지만 이렇게 둘이 쫓기고 있으니 그녀를 지켜야 한다는 의지가 더 단단해졌다.

제 가슴께에서 폴폴 바람에 날리는 백금발을 손으로 훑고 싶은 충동을 꾹 누르며, 헬릭스는 이를 악물고 말을 달렸다.

❀ ❀ ❀

피어트 공작가는 미칠 듯이 달려온 레아와 헬릭스의 이야기에 바로 반응했다.

“당장 루얀에게 구조대를 보내고, 별장에 남은 자들에게도 전령을 보내라! 한시가 급하다!”

“예!”

공작의 추상같은 명령에 이어 소공작 리케일의 꼼꼼한 일처리가 덧붙여졌다.

“갑작스러운 병증이 있다 하니 병자들을 수송할 수 있도록 최대한 많은 마차를 수배하고, 우리 연구소의 의사들과 약재사들을 대기시켜라. 병증에 대해 말이 새어 나갔다간 좋은 꼴 못 볼 것이다.”

“명하신 대로 준비하겠습니다, 소공작님.”

북부 별장에 있느라 피어트 공작가의 위력을 제대로 경험한 적 없는 헬릭스는 놀랐다. 피어트 공작가의 수도 저택에서 느껴지는 풍요로움도, 구조대를 보내는 각 잡힌 체계와 질서도 보기 드문 수준이었던 것이다.

‘레아가 이런 공작가의 공녀였군.’

평소 소탈한 그녀를 생각하면 의외였다.

그렇지만 그가 진짜 놀랄 일은 따로 있었다.

“그쪽이 내 딸을 건강하게 만들어 준 분이라지요? 반가워요.”

고용인들을 구름처럼 끌고 나타난 공작부인이 명령했던 것이다.

“자, 내 딸과 은인분을 피로가 무엇인지 모르는 갓 태어난 아기 같은 상태로 만들어 드리렴.”

“맡겨 주십시오!”

공작가의 숙련된 고용인들이 비장하게 둘에게 다가왔다. 손에는 고급비누와 입욕제와 향유 따위의 무기를 든 채였다.

“…….”

헬릭스는 봉인에서 깨어난 뒤 처음으로 도망치고 싶어졌다.

❀ ❀ ❀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반나절이 지난 뒤였다.

“잘 잤어?”

옆에서 레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햇볕이 잘 드는 소파 위에 그녀가 푸딩처럼 퍼져 있었다.

“와…….”

졸고 있었는지 멍하던 레아가 그를 보더니 생기가 돌았다.

“헬릭스, 관리받으니까 얼굴에서 빛이 나.”

“그런가?”

“응. 진짜.”

그녀가 종알거렸다.

“어떻게 그 얼굴에서 더 잘생겨질 수가 있어? 초미남도 관리는 먹히는구나.”

헬릭스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슬쩍 쓸어 보았다. 엘프들 사이에서 자라면서 그는 제 얼굴이 특별히 잘났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수호자 임무를 하면서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일쑤라, 외모가 오히려 성가시게 느껴지기도 했고.

그런데 레아가 볼 때마다 칭찬하니 어쩐지 그도 제 얼굴이 좋아졌다. 무엇보다 제 얼굴과 마주치면 환해지는 레아의 표정을 보는 게 좋았다.

‘잘생기길 잘했군.’

뿌듯한 마음을 누르며 그가 그녀를 살폈다.

“레아 너는 왜 아직 그러고 있나. 피로가 덜 풀렸나?”

“반나절 관리로 그간의 피로가 풀리면 내가 레아 피어트가 아니지.”

장난스레 웃은 그녀가 몸을 일으켜 헬릭스 쪽으로 다가왔다.

“자, 그러니까 나 충전.”

레아가 헬릭스의 손을 잡아 제 얼굴에 가져다 대려 했다. 익숙한 듯 조르는 동작이 너무도 스스럼없어, 그는 무심코 제 손을 내줄 뻔했다.

“자, 잠깐.”

손을 잡아끌며 제 얼굴도 내미는 레아에게서 기분 좋은 향기가 풍겼다. 달짝지근하고 상큼하면서 끝이 톡 쏘는, 그녀에게 맞춘 듯 잘 어울리는 향이었다. 그가 급히 몸을 물렸다.

“그……냥 마나로 넣어 주겠다.”

“충전도 해 주고 마나도 넣어 주면 안 돼?”

“안 된다.”

빛의 속도로 대꾸한 헬릭스가 레아의 손을 잡고 마나를 불어넣었다.

퐁.

“으아아……?”

레아가 괴상한 신음을 흘렸다.

“헬릭스, 주는 마나가 더 강력해진 거 같은……데?”

그녀는 약간 버거운 듯 미간을 찡그렸다. 그가 놀라 물었다.

“괜찮나?”

“어, 어. 헬릭스 마나야 청정 마나니까 좀 강하게 받아도…… 근데, 진짜 강해졌어. 양도 많아졌고.”

멈칫한 헬릭스가 주의 깊게 제 몸 상태를 점검했다. 확연한 힘의 차이가 느껴졌다.

“……수호자의 힘이 더 돌아온 거 같다.”

레아는 제 일보다도 더 기뻐했다.

“이걸 이렇게 해내나요! 진짜 죽으란 법은 없나 봐. 잘됐다, 헬릭스, 손!”

헬릭스가 얼떨결에 손을 내밀었다. 짝! 그와 손을 맞대며 하이파이브를 한 그녀가 생글생글 웃었다.

하얗고 작고 부드러운 손이 큰 손바닥에 부딪쳤다 순식간에 멀어졌다. 헬릭스는 손을 내민 채 눈을 깜박였다.

“……방금 뭔가?”

“응? 아, 둘이 같이 치는 박수 같은 거야. 잘됐다, 진짜.”

그는 천천히 손을 거두더니 새삼스레 쥐었다 폈다. 이 감촉이 사라지는 게 아까웠다. 레아가 옆에서 재잘댔다.

“아쉬워라. 이럴 때 축배를 들어야 하는데.”

“레아 네 몸에 무슨 술인가. 아서라.”

“예, 예. 알고 있지요. 그냥 말이나 해 본 거……라기엔 나한텐 원대한 꿈이 있지.”

그녀가 눈을 빛냈다.

“언젠가는 대마법사가 되어서, 엄청 건강해져서, 고기도 막 뼈째 씹어 먹고 술도 말술로 마시고 그래야지.”

“……대마법사가 되어서 하고 싶은 게 그건가?”

“그런 건강한 신체가 지금 내 입장에선 진짜 마법보다 더 마법 같은 거라니까.”

헬릭스가 고개를 저었다.

“꿈을 깨서 미안하지만, 대마법사도 고기를 뼈째 씹어 먹다간 이 나간다.”

“너무해!”

“그리고 대마법사는 마음만 먹으면 술을 아무리 마셔도 안 취한다. 물이나 술이나 똑같지.”

“그, 그럼 말술을 마시는 의미가 없잖아?”

“전혀 없다.”

레아가 좌절했다.

“나의 폭식, 폭음, 대마법사 라이프가…….”

“……그런 건 보통 용병들이 하는 거다, 레아. 포기해라. 너에겐 디저트가 있지 않나.”

그래, 내겐 푸딩과 케이크가…… 잠시 혹하던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술 마실 수 있게 되면 헬릭스랑 같이 마시고 싶었단 말이야.”

헬릭스가 딱 잘랐다.

“위험한 생각이다.”

“엥?”

뭐가 위험하지? 열심히 웃고 칭찬하고 스킨십 하면서 꼬셔도 꿈쩍도 안 하는 남자가 위험할 리가?

레아가 갸웃했다.

‘아닌가? 내가 위험하단 소린가?’

막 주사를 부리거나 술김에 치댈까 봐 그러나? 내가 그간 우리 고지식한 헬릭스한테 너무했나? 그녀는 살짝 반성했다.

“왜? 나 조금만 마실게.”

“아무튼 위험하다.”

요즘 레아는 위험했다. 점점 더 위험해지고 있었다. 머리만 살짝 기대도 가슴 전체가 심장처럼 뛰고, 손바닥만 닿아도 팔이 다 저리게 만드는 게 무슨 저주라도 걸렸나 싶을 정도였다.

‘정말 그녀가 드래곤의 성녀라도 되는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수호자를 이렇게 시시때때로 아프게 만들 수가 없지 않은가. 고민하던 그가 고개를 저었다.

레아가 드래곤의 성녀였다면 그 검은 머리 놈이 그렇게 굴 리 없었다. 성녀는 드래곤의 구원자가 될 몸 아닌가.

“레아, 만약에 말이다.”

헬릭스는 어두워진 눈으로 레아를 내려다봤다. 그녀의 푸른 눈이 그를 마주하며 반짝였다. 한 점 의심 없이 그를 신뢰하는 눈이었다.

“응. 만약에?”

“……아무것도 아니다.”

❀ ❀ ❀

다음 날 아침, 레아는 오랜만에 푹신한 침대에서 눈을 떴다.

오랜만에 본가의 제 방 제 침대에 파묻히니 종일이라도 누워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후후후후후.”

레아는 침대에 대자로 누워서 만족스럽게 웃었다. 어젯밤 다짐했던 게 생각났던 것이다.

‘나는 더 쉴 자격이 있으니까 내일은 진짜 늦게까지 뒹굴거려야지! 브런치도 침대에서, 티타임 간식도 침대에서!’

이런 게 행복이구나 싶은 순간 배가 고파 왔다. 그녀는 침대 캐노피를 슬쩍 젖혔다.

“공녀님! 일어나셨군요!”

하녀가 반색하며 빠르게 다가왔다. 레아는 속으로 움찔했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캐노피 젖힌 것만 보고 오다니, 설마 옆에서 나 언제 일어나나 보고 있었어? 무슨 일이 있나?’

불안해진 그녀에게 하녀가 외쳤다.

“공녀님 앞으로 온 초대장이 산더미예요!”

초대장?

티파티니 무도회니 그런 거 초대하는 사교계 초대장?

레아는 다시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단호하게 말했다.

“무시해.”

“예? 하지만…….”

“어차피 내가 요양 가 있는 동안 온 거 아냐? 아직 북부에 있다고 해.”

“공녀님, 그게요…….”

그녀는 슬쩍 실눈을 떴다. 하녀가 말을 흐리는 기색이 심상찮았다.

“왜? 무슨 문제 있어?”

우물쭈물하던 하녀가 결국 실토했다.

“그게…… 어제 공녀님이 그…… 손님분과 말 타고 달려오시는 걸 본 사람이 있는 모양이에요.”

“뭐? 누가?”

수도 근교에 오자마자 후드 달린 로브도 뒤집어쓰고 달렸는데?

“공녀님 뵈려고 저택 근처에 늘 돌아다니던 분들이요. 그, 공녀님 팬클럽분들.”

“……페이릴리 팬클럽 놈들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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