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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43)화 (43/120)
  • 43화

    “됐다.”

    기사들 몇이 사죄했다. 이런 예상 못 한 긴급상황에는 레아와 루얀을 따라가야 하는데, 사람들이 우수수 쓰러지고 있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것이다.

    “내가 갔으니, 더 따라와 봤자 발목만 잡을 거라 생각했겠지.”

    바로 그렇게 생각했던 기사들이 움찔했다.

    “죄송합니다. 그래도 따라가는 게 저희 일인데…….”

    “알고는 있냐? 돌아가면 반사적으로 내 등만 보고 쫓아오도록 굴려 주마.”

    “예에…….”

    부하들을 안심(?)시킨 루얀이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이래서야 금방 다시 출발할 수도 없겠군. 도대체 왜 자꾸 이런 일이…….”

    “오빠.”

    레아가 그런 루얀을 마차 안으로 불러 의논했다.

    “지금 이거, 아무래도 수면마법의 후유증 같아.”

    “뭐? 무슨 마법?”

    그녀가 설명했다.

    한밤중에 불이 야영지를 덮쳤던 일과 그 와중에 레아와 헬릭스는 깨어났던 것, 둘을 빼고 모두 잠에서 깨지 않았기 때문에 헬릭스가 마차에 막 갖다 싣고 도망친 데까지 말이다.

    루얀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다들 연기를 마시고 기절해서 너희 둘이 대피시킨 거라고 하더니, 그게 수면마법 때문이었냐?”

    “헬릭스는 수면마법일 거라고 했거든. 그런데 나는 수면마법이 확실히 뭔지 모르고, 그냥 헬릭스 말 듣고 그렇구나 한 거라서. 그런데 이렇게 후유증이 있으면 오빠도 알아야 할 거 아니야.”

    “그럼 너희 둘 말고는 갑자기 잠들 수 있다는 얘긴데…….”

    루얀이 초조하게 한숨을 쉬었다.

    아직 수도는 멀고, 뜻밖의 사건 사고는 계속 생기고, 이 와중에 드래곤이 걸었다는 수면마법의 후유증이 일행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오빠, 그래서 말인데.”

    레아가 말했다.

    “헬릭스하고 내가 먼저 집에 가는 게 좋겠어.”

    ❀ ❀ ❀

    레아의 생각은 이랬다.

    지금 귀환하는 일행들은 수면마법 후유증에 시달려서 언제 어디서 기절하듯 잠들지 모르는 상태였다.

    “이런 상태로 더 가면 마차랑 낙마 사고가 속출할 거라고.”

    그녀가 덧붙였다.

    “거기다 재수 없게 도적떼라도 만나면 더 큰일이고.”

    레아의 말에 루얀이 인상을 썼다.

    “내가 있는데 도적떼를 왜 걱정하냐.”

    “소드마스터도 잠든 상태에서는 검 못 쓰거든요?”

    “…….”

    레아가 루얀 앞에서 탁, 팔짱을 꼈다.

    “오빠, 지금은 멀쩡해 보여도 안심할 수 없어. 오빠랑 카라이도 언제 쓰러져 잠들지 모른다고.”

    루얀이 제 백금발을 마구 엉클어뜨렸다.

    “젠장.”

    “지금 후유증 걱정 없는 사람은 나랑 헬릭스뿐이잖아?”

    레아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은 안전한 곳에서 대기하고, 우리 둘이 공작저로 가서 귀환을 도울 이들을 더 데려오는 게 낫지.”

    맞는 말이었다.

    “그래도 그놈, 아니 그 사람하고 단둘은 안 돼.”

    “왜?”

    “……몰라서 묻냐?”

    “모르겠는데? 다른 방법도 없잖아.”

    이 둔탱이 여동생을 어쩌면 좋냐.

    헬릭스는 독이니 마법이니 멀미니 갖다 붙이면서 레아 옆에 착 붙어서 눈을 못 떼고 있는데, 정작 레아는 그 뜨겁고 집요한 시선을 모르는 듯했다.

    “후.”

    괜히 제가 더 답답해져서 루얀은 여동생을 쳐다봤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편이 약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예전 토너먼트 사고 이후 그가 방에 틀어박혔을 때, 꼬마 레아는 매일같이 쳐들어와서 말했다.

    ‘작은오빠야, 나 좀 봐 봐.’

    ‘…….’

    ‘오늘은 꼭 성공할 거야.’

    꼬마 레아는 딴 데 놔두고 꼭 그의 침대에서 앞구르기를 했다. 한 번도 성공한 적은 없었지만.

    ‘왜 여기 와서 이러냐? 혹시 부모님이 시켜서 그러는 거라면…….’

    ‘뭐래? 이 침대가 제일 뜨뜻하고 폭신하단 말이야.’

    툭하면 열이 오르고, 그냥 걷다가도 넘어지는 주제에, 레아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아프지만 않으면 꼬박꼬박 와서 앞구르기를 연습했다.

    ‘안 되는 걸 뭘 그렇게 하냐?’

    ‘못하는 게 너무 많으니까 억울하잖아.’

    ‘…….’

    ‘그러니까 진짜 진짜로 못하는지 해 보기라도 할 거야.’

    저렇게 약한 녀석도 안 되는 걸 해 보겠다고 애를 쓰는데.

    그런 마음이 들던 날, 루얀은 레아 앞에서 앞구르기 시범을 보였다.

    완벽한 동작에 레아는 눈을 크게 뜨고 자그만 손으로 열심히 손뼉을 쳤다.

    ‘작은오빠는 대단해!’

    ‘흐, 흥. 뭐 이런 것 정도로.’

    그때 레아가 아니었다면 루얀은 좌절에서 벗어나기 힘들었으리라.

    “후우우.”

    루얀은 결국 한숨을 푹푹 쉬며 제 애마를 끌고 왔다.

    “어차피 넌 말 못 타니까 그 새…… 그자하고 같이 타야겠지.”

    “안 떨어지게 조심할게.”

    루얀이 레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제발 남자 조심도 해라.”

    “헬릭스가 막아 줄 건데.”

    그 새끼를 조심하라고.

    루얀은 목까지 올라오는 말을 삼키며 손에 힘을 주었다.

    “레아야, 남자는 다 늑대야.”

    “언제는 큰오빠더러 여우새끼라며.”

    “그……건 어릴 때 헛소리했던 거고. 다른 놈들은 다 늑대라고. 너는 예쁘고 귀엽고 발랄하고 박력 있고 우아하고, 다 하니까 특히 더 조심해야 한다고.”

    우리 오빠, 팔불출 병이 너무 심한 게 아닐까.

    레아는 떨떠름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조심할게.”

    ❀ ❀ ❀

    한편 아르카이크 황자는 보고를 받고 있었다.

    “마법사의 정확한 신분을 알아냈습니다.”

    황자의 부하가 고했다.

    “피어트 공작가의 레아 피어트 공녀라고 합니다.”

    “피어트 공작가? 들어 본 적이 있는데.”

    “페이런 왕국의 오래된 명문가로, 최근 들어 더 위세를 떨치는 가문입니다.”

    아르카이크 황자가 턱을 쓰다듬었다.

    “공녀라.”

    제법 높은 신분이지 않은가.

    “그런 공녀가 왜 산으로 둘러싸인 북부에 있었지? 대귀족 영애가 있을 만한 곳이 아니던데.”

    “추방이라도 당한 걸까요?”

    “아닙니다.”

    부하가 급히 보고를 덧붙였다.

    레아 피어트 공녀는 몸이 너무 약해 요양을 갔었다고. 페이런의 사교계에서도 인기가 높아 페이릴리라는 별명으로 불린다고 말이다.

    “페이릴리……?”

    “페이런의 백합이라. 정말 페이런 왕국에서는 유명한가 봅니다.”

    파이퍼스 자작의 말에 아르카이크 황자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페이런 왕국 놈들은 보는 눈이 없군. 맞불을 놓는 화염마법사에게 백합이라니.”

    “아직 마법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리석은 자들 아니겠습니까.”

    황자는 자작의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궁리했다.

    소국의 공녀라.

    무시하고 납치하기엔 껄끄럽고, 아예 작정하고 판을 키우기엔 애매한 신분이었다.

    누군가 제안했다.

    “황자님의 첩으로 요구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페이런 왕국에서 거절하진 못할 겁니다.”

    “오히려 영광으로 알아야겠지요. 페이런 같은 소국에서 오켄의 황실에 들어오다니, 공녀가 아니라 왕녀라도 꿈도 못 꿀 일입니다.”

    파이퍼스 자작이 꾸짖었다.

    “무슨 소리요? 아직 정식으로 혼사도 치르지 않으신 아르카이크 황자님이, 첫 첩으로 타국의 공녀를 맞이하시면 제국 내의 여론이 어떻겠소? 황위를 이으실 분께 그런 흠이 있으면 안 됩니다.”

    첩이라. 아르카이크는 부하들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그 여자에게 그런 방법은 안 될 거다.’

    꿈과 현실에서 스치듯 한두 번 본 게 다였지만,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의 눈빛.

    가느다란 몸속에서 팔팔 끓는 화염의 기운.

    첩이 되라는 요구를 들었다간 옆에 있는 은발 남자와 야반도주라도 할 여자였다.

    “……일단 그 마법사가 내 지배력을 받아들이는 게 먼저다.”

    아르카이크의 말에 부하들이 언쟁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파이퍼스 자작이 말했다.

    “다른 마나가 섞여 있다고 하셨으니…… 황자님의 마나가 희석되어서 지배력도 약해진 것이 아닐까요?”

    “……그럴지도.”

    아르카이크 황자가 인상을 찌푸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안에 다른 놈의 마나가 있다는 생각만 해도 속이 뒤틀렸다.

    “그러면 어쩌면 좋겠는가?”

    “제 생각엔 마법사 몸속의 황자님의 마나 비율을 다시 높여 보면 어떨까 합니다만.”

    “어떻게?”

    “마침 써먹을 만한 장기말이 있습니다.”

    파이퍼스 자작이 말했다.

    “황자님, 우리 비약 실험을 맡은 트로우 백작이란 자를 기억하시는지요?”

    “아아.”

    아르카이크 황자가 눈썹을 슬쩍 찌푸리며 말했다.

    “비약을 빼돌렸을지도 모른다던 그 쥐새끼 말인가.”

    “예. 그자가 페이런 사교계에 꽤 영향력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트로우 백작을 이용하시는 건 어떨까요?”

    나쁘지 않군. 판단을 내린 아르카이크가 명령했다.

    “그자와 접촉해 봐라.”

    ❀ ❀ ❀

    아르카이크 오켄 황자는 레아를 상대할 방향을 바꿨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그녀와 헬릭스는 불안하고 마음이 급했다.

    ‘그놈이 쫓아오면 어쩌지?’

    상대는 여관에서 만나자마나 마나로 찍어 누르려고 한 자였다. 실패하자 한밤중에 야영지까지 쫓아와 수면마법을 걸고 불도 질렀다.

    수단 방법을 안 가리는 데다 이쪽이 예상하지 못한 능력이 있고, 그녀를 제 마법사라며 부르며 집착하기까지 했다. 레아는 당연히 자기 말을 들을 거라 믿고 내려다보던 놈의 눈빛을 떠올리고 얼굴을 찌푸렸다.

    ‘진짜 위험한 놈이잖아.’

    그간 수도에서 달라붙던 놈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따뜻한 햇살 아래 말을 타고 달리는데도 불안감에 손발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걱정이 자꾸 꼬리를 물었다.

    ‘우리를 습격하면 헬릭스랑 나는 도망칠 수 있겠지? 하지만…… 남겨 두고 온 오빠랑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면 어떻게 해?’

    루얀과 카라이, 둘의 조합이라면 강력할 터였다. 소드마스터와 방어막 능력을 가진 카라이니까, 다른 사람들을 지키며 싸우기에 최적의 구성이리라.

    그렇지만 두 사람이 놈의 마나에 굴복당한다면? 수면마법 때문에 싸우는 도중에 잠들어 버린다면? 혹시라도 놈이 다른 정신공격을 써서 두 사람을 지배하거나 서로 공격하게 만든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헬릭스, 빨리 가자.”

    재촉하는 레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것을 보고 헬릭스는 속에서 불이 치솟는 것 같았다.

    ‘그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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