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반대인데 말이다.”
“그러니까.”
어이없어하는 레아를 향해 헬릭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두 분 다 정말 모르시는 거예요?”
자넷이 답답해하며 끼어들었다.
“헬릭스 님은 딱 보기에도 뭔가 신비해 보이시니까 그렇고, 공녀님은…….”
“나는?”
자넷이 슬쩍 눈치를 보았다.
“……루얀 공자님 동생이셔서 그러는 거 아닐까요?”
“…….”
일리가 있었다. 레아가 침묵하자 자넷이 땀을 흘리며 덧붙였다.
“아니, 왜, 루얀 공자님이 얼굴은 성화에 나오는 천사처럼 생기셨잖아요. 그런데 워낙 괴력이시고 왕국제일검이시라고 하니까…….”
“그러니까 그 여동생인 나도 숨겨진 괴력이 있을 것이다?”
“그, 그렇지요.”
레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헛소문이 어떻게 퍼지는 건지 알겠네. 다들 몇 년을 날 봐 놓고도 그런 생각을 하다니.”
“하, 하하…… 놀라서 그러는 걸 거예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공녀님.”
“에효. 내가 진짜.”
한숨 쉬는 레아를 향해 헬릭스가 제안했다.
“많이 신경 쓰이면 내가 힘 쓰는 걸 한번 보여 주겠다.”
“힘 쓰는 걸 보여 줘?”
그가 창밖을 가리켰다.
“하인들이 길을 막은 나무 그루터기 치우느라 애쓰고 있던데, 내가 나서서 치우면 다들 사람들을 옮긴 게 나라고 짐작하지 않겠나.”
레아가 멈춘 마차 밖을 쳐다봤다.
헬릭스 말대로 하인들이 소매를 걷고 으쌰으쌰, 커다란 그루터기를 치우고 있었다.
“어우!”
“이거 생각보다 단단히 박혔는데? 꼼짝도 안 해!”
뭐가 잘 안 되는지 하인 하나가 웃통을 벗는 순간이었다.
번개처럼 다가온 큰 손이 눈앞을 가렸다.
“헬릭스?”
뿐만이 아니었다.
스르륵.
마차 창문에 고정해 뒀던 커튼도 순식간에 내려왔다. 레아는 약간 어처구니가 없었다.
“헬릭스, 커튼은 다시 걷지? 마차 안이 너무 어둡잖아.”
“……싫다.”
헬릭스가 말했다.
“커튼을 걷을 거라면 내가 가서 상의를 벗고 일하겠다.”
이거 협박인가?
‘협박 맞아? 상의 탈의하고 그루터기를 치우는 헬릭스라니, 그거 보고 싶…….’
레아가 저도 모르게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헬릭스 님, 그럼 다른 하녀들도 다 볼 텐데요?”
자넷의 말에 그녀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생각해 보니까 좀 어두워도 되겠어.”
레아가 괜히 커튼을 더 치는 시늉을 하면서 말했다.
“쉬는 덴 이렇게 컴컴한 것도 괜찮잖아. 헬릭스는 여기 가만히 있으면서 어제 무리한 기력을 보충해.”
“무슨 소린가.”
헬릭스가 고개를 저었다.
“나보다 레아 네가 더 무리했다. 여기 있으면서 네 몸이 괜찮은지 지켜보겠다.”
“……저는 잠깐 나가서 물 좀 떠 와도 될까요?”
둘 사이에 끼어 있던 자넷이 참지 못하고 일어서려 할 때였다.
쿠당탕.
방금까지 멀쩡히 말하던 자넷이 옆으로 픽 쓰러졌다. 레아가 놀라 비명을 질렀다.
“자넷!”
❀ ❀ ❀
헬릭스가 쓰러진 자넷을 꼼꼼히 살펴본 뒤 말했다.
“잠들었다.”
“잠들었다고?”
레아는 기가 차서 쳐다보았다. 마차 바닥에 누워서 쌕쌕, 고른 숨을 쉬고 있는 자넷은 딱 깊은 잠에 빠진 모양새였다.
레아가 푹, 한숨을 쉬었다.
“코앞에서 휙 넘어가서 난 진짜 큰일 난 줄 알았잖아. 말하다가 갑자기 기절하듯 잠들다니, 이거 기면증 같은 거야?”
“그보다는 수면마법이 다 안 풀린 것 같다.”
헬릭스의 말에 레아의 얼굴이 굳었다.
“그럼 앞으로가 더 문제잖아?”
수면마법의 후유증이라면 자넷만 이런다는 법도 없지 않은가.
헬릭스도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와 나를 빼고 다 이런 증상에 시달릴 수도 있다.”
“서, 설마. 자넷이 특이체질일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었다.
자넷은 시작일 뿐이었다.
몇 시간 지나지 않아, 하녀 하나가 마차에 오르다 말고 쓰러져 잠들었고. 그다음엔 휴식시간에 검의 날을 갈던 기사가 칼날을 잡은 채 고꾸라져 잠들었다.
두 사람은 가벼운 타박상과 찰과상으로 끝났지만, 일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레아의 마차를 몰던 마부가 달리는 도중에 잠든 것이다.
히이이잉!
갑자기 통제를 잃은 건장한 말 네 마리가 내달리기 시작했다.
“꺄악!”
레아의 몸이 의자에서 미끄러졌다.
그녀가 벽에 부딪히려는 찰나, 헬릭스가 허리를 끌어당겼다.
콰광!
돌부리에 걸린 듯 마차가 덜컹 치솟았다.
헬릭스는 머리를 숙이며 레아를 제 품에 꽉 감싸 안았다.
레아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폭주하듯 달리는 말들도, 미친 듯이 흔들리는 마차도. 저를 끌어안은 헬릭스의 품에서 들리는 심장 소리까지.
“꺅!”
옆에서 들리는 비명 소리에 레아의 정신이 좀 돌아왔다.
“자넷? 깼어? 괜찮아?”
“네? 네, 네!”
괜찮게 들리진 않았지만 크게 다치진 않은 듯했다.
레아가 헬릭스에게 밀착되어 있던 얼굴을 겨우 돌렸다. 창밖이 금빛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카라이!’
야영지 방화사건 후, 다음번 위급상황에선 반드시 레아를 지킬 거라며 마부석에 앉아 있던 카라이가 마차에 마법 방어막을 친 것이다.
“카라이, 어떻게 된 거야?”
“주인…… 아니 공녀님!”
카라이가 헐떡이면서도 기쁘게 대답했다.
“안 다치셨습니까? 무사하시죠?”
“여긴 괜찮아! 무슨 일이야?”
“마부가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제가 방어막 치고 붙들고 있긴 한데, 말들이…… 억!”
히이잉!
덜컹!
말들이 날뛰자 마부석과 마차가 흔들렸다.
“어, 어떡하지? 카라이가 말들을 제어하지 못하는 거 같은데?”
그때였다.
“레아야!”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루얀이 말을 몰고 옆으로 따라붙었다.
“문 열고 이리로 뛰어내려!”
“미쳤어?!”
레아가 식겁했다.
“여기서 뛰어내리면 나 죽어!”
루얀이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짓더니 앞으로 내달렸다. 옆에서 자넷이 창턱을 꼭 쥐고 파랗게 질려 중얼거렸다.
“어떻게…… 여기서 뛰어내린다는 생각을 하시죠?”
“우리 오빠가 가끔 보통 사람들이 어떤지 감이 없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밖에서 카라이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주인님!”
카라이가 외쳤다.
“루얀 님이 앞을 가로막고 계십니다!”
“뭐?!”
“내가 보고 오겠다.”
헬릭스가 얼른 창밖으로 몸을 내밀어 앞을 살폈다.
루얀은 그 짧은 사이에 냅다 달려, 저 앞에서 대검을 꺼내 들고 있었다.
“내가 여기서 힘으로 멈출 테니, 카라이 네가 방어막을 쳐라!”
카라이와 헬릭스의 얼굴이 질렸고 자넷은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레아 역시 창백해졌다.
‘멈출 순 있겠지만 너무 위험한 방법이야.’
헬릭스는 분명 자신을 보호하려다 다칠 거고, 자넷과 카라이와 기절한 마부는 허공으로 튕겨 나갈지도 모른다.
“오빠, 그만둬!”
“레아 넌 걱정 마라! 멈추는 순간 내가 구해 줄게!”
“하지 마! 말들이 좀 더 힘 빠질 때까지 기다려도 되잖아!”
“무슨 소리냐? 말들이 어디로 달릴 줄 알고? 마차가 길에서 이탈하면 전복될 수도 있다고!”
레아는 루얀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레아.”
헬릭스가 조용히 레아의 손을 잡아 창턱에 얹었다.
“자넷과 여길 꽉 붙들고 있어라.”
“어?”
헬릭스가 마차 문을 열었다.
말릴 사이도 없이, 그가 질주하는 마차 밖에 매달렸다.
“헬릭스!”
레아가 창밖으로 몸을 빼며 외쳤다.
바람이 미친 듯이 불어 그녀의 긴 머리가 휘날렸다.
그 바람 속에서, 헬릭스는 곡예하듯 마차 외벽에 매달려 한 발 한 발 앞으로 이동했다.
레아는 입이 말랐다.
그가 헛발질이라도 하는 순간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덜컹!
바퀴에 뭔가 걸린 마차가 위로 솟구치자 헬릭스의 신형도 사라졌다.
“헬릭스!!”
창문 밖으로 몸을 더 내미는 그녀를 뒤에서 자넷이 죽자 살자 껴안았다.
“공녀님! 위험해요!”
“헬릭스!”
그 순간이었다.
“허억, 헬릭스 님!”
마부석에서 카라이의 외침이 들렸다.
“여, 여기까지 어떻게?!”
“고삐를 이리 줘라!”
히이잉!
짧은 울음과 함께 말들이 몸을 뒤틀며, 속도가 줄어들었다. 레아는 후들거리는 팔로 창턱을 짚고 창밖으로 팔을 뻗었다.
“윈드!”
불러낸 바람이 반대 방향으로 불며 말들과 마차의 속도를 늦췄다.
“레아, 잘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창턱을 꽉 잡았다.
헬릭스가 눈앞에서 휙 사라지던 광경이 아직도 눈에 어른거렸다.
‘또 막 희생하려고 하고!’
누군가 위험에 처하면 먼저 몸부터 날리는 건 여전했다.
‘이쪽은 잘못됐을지 모른단 생각만 해도 손이 덜덜 떨린단 말이야!’
레아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좀 더 일찍 바람마법을 쓸 생각을 했더라면. 그러면 헬릭스가 위험하게 나설 필요도 없었을…… 잠깐.
‘내가 왜 나를 탓하고 있지?’
얻은 지 얼마 안 된 바람마법이니, 이렇게 놀랐을 때 바로 안 떠오를 수도 있는 거였다. 사실 좀 전에 떠올린 것 자체도 굉장히 잘한 일이었다.
레아가 숨을 깊게 쉬었다.
‘그렇지만…….’
손놓고 지켜보는 건 싫었다.
저 우직한 소방관 같은 남자가 ‘나는 수호자다’ 하면서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걸 뒤에서 보고 싶지 않았다. 말릴 수 없다면 옆에서 함께했으면 했다.
‘나만 지키고, 혼자 위험하게 나서는 건 싫어!’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몸도 마음도 상처 입지 않았으면 좋겠다.
처음에 봉인진에 다시 갇히려고 했을 때처럼 아련하게 웃으며 혼자 희생하려고 들면, 저 긴 다리를 묶어서라도 못 가게 만들고 싶었다.
‘근데 난 헬릭스 없이는 개복치에 몸치잖아. 내가 어떻게 헬릭스를 매번 돕겠어? 헬릭스는 늘 나를 돕는데…….’
레아는 처음으로 헬릭스가 수호자인 게 싫어졌다. 처음으로 그가 자신에게 다 퍼 주기만 하는 것도 싫어졌다. 그가 다칠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밤고구마를 연달아 삼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왜 이렇게 속이 답답한 거야?’
❀ ❀ ❀
그들은 마차를 몰고 나머지 일행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되돌아갔다.
“공녀님!”
“단장님!”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일행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레아가 탄 마차를 몰던 마부만 쓰러진 게 아니었다.
기사들, 하인과 하녀들, 다른 마부들도 속속 쓰러지는 바람에, 일행이 멈춰 선 길옆 공터는 부상자들과 잠든 사람들과 충격받은 사람들로 어수선했다.
“단장님,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