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조금 전 저자가 여관주인 부부를 죽인 순간, 찍어 누르는 듯한 위압감이 그를 덮쳤다.
옆 테이블에 있던 이름난 용병 몇이 허리에 손을 얹으며 일어났지만 그뿐이었다. 다들 그처럼 고꾸라졌으니까.
그리고 남자를 뒤따라온 검은 옷의 놈들이 추수하듯 여관의 사람들을 베어 죽였다.
“도대체…….”
네놈은 뭐냐.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 감정을 담아, 그는 흑발 남자를 향해 눈을 홉떴다.
태연한 얼굴로 이쪽을 쳐다본 남자가 턱짓했다.
슉.
뒤에서 휘두른 칼에 용병이 그대로 쓰러졌다. 칼날에서 피를 턴 검은 옷의 검사가 보고했다.
“모두 처리했습니다, 황자님.”
일상적인 일인 양 무덤덤한 말투였다.
“모두?”
눈을 감고 서 있던 검은 머리의 남자, 아르카이크 오켄 황자가 되물으며 눈을 떴다. 검은 눈동자 안에서 금빛 기운이 잠시 일렁였다.
“하나 남아 있다.”
그가 성큼성큼 부엌으로 향했다.
쨍그랑!
“히, 히익!”
부엌의 커다란 술항아리 속에 숨어 있던 남자가 머리채를 잡혔다.
“사, 살려 주시오! 살려 주시오!”
거듭 비는 남자의 얼굴을 아르카이크 황자가 지그시 쳐다봤다.
“얼굴이 황제를 닮았어.”
“예? 여, 영광입……!”
푸슉.
황자의 검이 남자의 목을 베었다.
허물어지는 시체를 무감하게 내려다보던 그가 부하들에게로 돌아섰다.
부하 하나가 그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아르카이크 황자가 얼굴에 튄 피를 닦으며 물었다.
“마법사가 언제 여길 떠난 것 같나?”
“적어도 한 시간은 넘은 듯합니다. 마차와 말, 일행으로 보이는 수행원들까지 죄다 자취를 감췄습니다.”
황자가 혀를 찼다.
“쓸데없이 행동력이 좋군.”
잠깐 마주쳤을 때 드래곤의 마나로 지배력을 좀 흘려 봤을 뿐인데, 마법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꿈에서 정신체로 만났을 때에도 그랬지.’
황자가 중얼거렸다.
“보통이 아니야.”
“최초의 마법사이니 보통내기는 아니겠지요.”
검은 옷을 입은 검사들 사이에서 후드를 쓴 노인이 다가왔다. 마법학자 파이퍼스 자작이었다.
“이제 어쩌실 겁니까? 황자님과 마법사를 본 자들은 모두 죽였습니다만.”
“마법사와 그 일행이 남아 있지.”
파이퍼스 자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마법사.
마법은 선대부터 내려온 오켄 황제의 꿈이었다.
그런데 아르카이크 황자가 드래곤의 협조를 얻어 내 마법능력자들을 만들어 내더니, 이제는 반쪽짜리 마법능력자가 아닌 온전한 마법사까지 찾아낸 것이다.
자작은 공손히 황자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이번에 드래곤 마나로 만들어 낸 최초의 마법사까지 찾아내시면, 황자님은 분명 황태자로 책봉되실 것입니다.”
아르카이크 황자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당연히 그렇겠지.”
하나 화려한 미래를 이야기하는 황자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어두운 광기가 일렁였다.
‘발칙한…….’
그가 핏줄이 서도록 주먹을 쥐었다.
그녀를 채우고 있는 건 분명 자신의 마나였다.
‘내 마나를 가지고 마법사가 되었으면서, 나를 거부해?’
괘씸하기 이를 데 없지 않은가.
마나는 자신의 소유였다. 그러므로 마법사 또한 응당 자신의 것이어야 마땅했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을 거부하고 도망친 것이다.
“황자님, 추적할까요?”
부하가 조심스레 물었다.
“…….”
아르카이크는 바로 그러라고 대답하려다 그만뒀다.
마법사고 뭐고 다 부수고 죽이고 싶은 충동.
그 피 끓는 충동과 반드시 손에 넣고 싶다는 배 속 조이는 긴장이 동시에 일어, 입이 말랐다.
마법사.
그 옆의 남자.
그 옆에 있는 다른 놈들.
황자가 밖을 내다보며 눈매를 좁혔다.
그가 말했다.
“전부 처리한다.”
“예?”
마법학자 파이퍼스 자작이 놀라 되물었다.
“황자님, 마법사를 죽이시면 황태자 책봉이……!”
“어차피 내 자리가 아닌가.”
아르카이크 황자가 오만하고 냉정하게 말했다.
“지금 위험요소의 싹을 잘라 두는 것이 더 중요하다.”
“위험요소라 하시면?”
“그 여자는 이미 제법 마법사로 성장했더군. 내 지배력에 반항했다.”
파이퍼스 자작이 저도 모르게 혀로 입술을 축였다.
“그, 그럼 지금 떠난 게 우연이 아니라…….”
“나를 위협적으로 느끼고 도망치려는 게지.”
“이럴 수가.”
자작이 땀을 흘렸다.
“어째서일까요? 황자님께서 드래곤과 교감하시게 된 이후로, 황자님의 금빛 눈동자만 보면 모든 마법능력자가 충성을 맹세했는데?”
파이퍼스 자작의 말에 아르카이크 황자가 눈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마법사 앞을 지키겠다고 나섰던 놈도 마법능력자였다.
‘그놈도 내게 복종하지 않았지.’
아르카이크 황자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 은발 놈…….’
제게 건방진 말을 해 대던 그놈이 제 것들을 망치고 있었다.
“아마 옆에 있는 놈들 때문이겠지.”
아르카이크 황자가 음산하게 말했다.
“마법사 옆에 왜인지 소드마스터도 있더군.”
“소, 소드마스터요?”
파이퍼스 자작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제일 걸리는 건 다른 놈이야. 드래곤의 마나가 아닌, 다른 형태의 마나를 가지고 있었다. 전부터 북서쪽에서 느껴지던 기운과 동일하더군.”
그자의 마나가 ‘마법사’ 안에서 자신의 마나와 섞이고 있었다.
‘내 것인데.’
아르카이크 황자의 얼굴이 서늘해졌다.
감히 자신의 것에 손댄 놈도, 제 마법사 주제에 다른 마나를 받아들이고 저를 거부하는 마법사도.
“아예 없애는 것이 낫겠다. 레이븐!”
검은 옷을 입은 부하 하나가 재빨리 그의 앞으로 달려왔다.
“이 근처에 다른 마을이나 여관이 없다고 했지?”
“예.”
멀리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산그림자를 보며 부하가 말을 이었다.
“여길 떠났다면 야영을 하는 수밖에 없을 겁니다.”
“야영이라. 차라리 잘됐군.”
황자가 미소 지었다.
“쫓아가서 처리한다.”
❀ ❀ ❀
인근의 산기슭.
피어트 공작가의 일행들은 숲 사이의 공터에 겨우 야영지를 차리고 자고 있었다.
파스스스.
부우우.
바람이 나무들을 훑고 밤새들이 후다닥 날아올랐지만, 야영지 안은 고요했다.
“으응…….”
레아는 잠결에 모포에 몸을 파묻었다.
가까이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깨어나.]
꿈인가?
몽롱한 와중에 속살거림이 바람이 되어 귀를 간질였다.
[깨어나라.]
품 안에서부터 그 바람이 밀려 나와 레아를 휘감았다.
[깨어나라고!]
“응?”
순간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녀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누구야?”
주위를 경계하는 그녀의 동작에 어깨에서 모포가 흘러내렸다. 가을밤에 산중이라 춥다고, 자넷이 몇 겹씩 둘러싸 줬던 모포였다.
그런데 그 모포가 내려가도 하나도 춥지 않았다.
오히려 더웠다.
‘더워?’
오래 아프고 기력이 약했던 그녀는 추위를 잘 탔다.
이런 밤에 이불을 젖히고 맨몸으로 밤바람을 맞으면 바로 재채기를 할 만큼.
그런데 지금 이 열기라니.
‘근처에서 불을 때는 것처럼…… 불?’
레아가 후다닥 일어났다.
‘이게 뭐야!’
사위가 훤했다.
붉고 노란 빛이 숲그림자를 살라 먹으며 하늘까지 치솟는 광경.
그녀는 잠시 얼이 빠졌다가 고개를 돌렸다.
야영지 주변이 온통 불바다였다.
“자넷!”
레아는 옆에서 자고 있는 자넷을 흔들었다.
전담 하녀로 일하면서 약간의 기척에도 금세 일어나는 자넷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가슴이 오르내리는 걸 보니 숨은 쉬는데?’
레아는 불안해져서 자넷의 코끝에 손을 대 호흡을 확인하고, 팔을 타다닥 손바닥으로 두들겼다.
“자넷! 일어나, 자넷!”
그렇지만 소용없었다.
“누구 없어?”
레아가 일어서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상했다.
이만한 불이면 자신보다 더 기척에 민감한 이들이 먼저 일어났을 텐데.
불침번을 서던 기사도, 하녀와 하인들도, 마부도 기절한 것처럼 반응이 없었다.
“오빠!”
레아는 자신의 머리맡 근처 나무에 기대앉은 루얀을 발견했다.
기척에 민감하기로는 탈인간급인 루얀 피어트인데.
그런 그도 대검을 껴안은 채 앉아서 자고 있었다.
레아가 중얼거렸다.
“작은오빠가…… 불침번을 서다가 잠든다고?”
그럴 리가 없었다.
이렇게 불이 났는데 안 깨어날 리도 없었고.
그녀는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리고 나머지 일행이 잠든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헬릭스!”
레아가 소리쳤다.
“헬릭스! 카라이!”
자신이 깨어났으니 그나마 둘은 일어날지도 모른다.
“헬릭스! 꺄악!”
“레아.”
헬릭스가 제 위로 엎어지려는 레아를 붙들며 일어났다.
“무슨 일인가?”
“일어났어? 너 일어난 거지?”
“레아, 진정하고 말해 봐라.”
“불이 났는데 아무도 안 일어나!”
레아의 말에 헬릭스는 잠이 싹 달아난 얼굴로 주위를 둘러봤다.
점점 훤하게 달아오르는 야영지에서, 공작가 일행들은 평온한 얼굴로 쿨쿨 자고 있었다.
“……수면마법이다.”
“수면마법?”
“누군가 수면마법을 걸고 불을 질렀다.”
레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헬릭스와 그녀 둘만으로 이 인원을 구출하는 것도 무리인데, 수면마법까지 걸렸다면 더 가망이 없었다.
“대체 누가?”
“……그러게 말이다.”
헬릭스가 주위를 둘러보며 누군가를 찾았다.
“이 정도로 자연스러운 수면마법은 대마법사나 드래곤급은 되어야 쓸 수 있는 것인데…… 카라이!”
헬릭스는 카라이를 발견하고 흔들었다.
“카라이! 카라이, 일어나라!”
그에게 잡혀 인형처럼 흔들리면서도 카라이는 깨지 않았다.
레아도 같이 흔들었다.
“카라이! 일어나! 네 보호막이 있어야 불 앞에서 다른 사람들을 보호한다고!”
“소용없을 것 같다, 레아.”
헬릭스가 말했다.
“마법능력자인 카라이가 이 정도로 깊게 걸린 거라면, 마법을 건 상대는 드래곤일 거다.”
“뭐?”
레아가 눈을 크게 떴다.
“드래곤은 멸종했다면서 왜 내 주위에만 나타나는데?!”
“……미안하다. 내 탓일지도 모른다.”
“뭐가 미안해! 그거 아니거든!”
빽 소리친 레아가 초조하게 입술 끝을 깨물었다.
불길은 시시각각 가까워지는데, 둘만으로는 이 많은 일행을 구할 방도가 없었다.
‘내가 화염마법이 아니라 물 속성 마법이었다면 어떻게 됐을 텐데!’
잠깐.
레아는 머리를 들었다.
“헬릭스, 마법능력자는 드래곤의 마법에 약해?”
“그렇다. 마법능력자나 마법사나, 드래곤의 마나를 받아서 된 자들은 드래곤의 마법에 약할 수밖에 없지.”
그런데 자신에겐 왜 수면마법이 안 먹힌 것일까.
휘이이…….
그녀의 생각에 대답하듯, 레아를 휘돌며 바람이 불었다.
헬릭스가 미간을 찡그렸다.
“이 바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