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가슴에 불이 붙은 듯 화가 나고 조급했다.
더 빨리 그녀를 손에 넣어야 된다는 생각으로 부하들을 이끌고 되돌아왔는데, 그사이 꼬리도 남기지 않고 도망칠 줄이야.
그가 부하들을 돌아보지 않고 명령했다.
“봉쇄해라.”
이글거리는 음성에 분노가 가득했다.
“싹 다 죽여.”
❀ ❀ ❀
레아 일행은 무슨 일을 피했는지 전혀 모른 채 야영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녀들과 기사들이 서로 일을 나누어 야영지를 세우느라 분주했다.
“공녀님만이라도 천막 안에서 주무실 수 있으면 좋겠는데…… 네? 천막이 아예 없다고요? 야영할 계획이 없었던 터라 어쩔 수 없다고요? 그럼 어쩌죠?”
“여기 덜 마른 장작 주워 온 사람 누구야? 불이 안 붙잖아!”
“빵 자루 어디 실었는지 아는 사람?”
예정에 없던 야영지를 귀족 영애가 묵을 만하게 만들려니 여기저기서 난리였다. 그렇지만 레아는 지금 그쪽에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그녀가 헬릭스를 구석으로 잡아끌었다.
“헬릭스, 헬릭스.”
레아가 그에게 속닥였다.
“아까 그 검은 머리 남자 막아섰을 때 말이야.”
“말해라, 레아.”
그녀는 침을 꼴딱 삼켰다. 목소리가 절로 작아졌다.
“그때 우리 오빠 검에서 나오던 빛…… 그거 검기 맞지?”
“맞다.”
“으악, 역시!”
레아는 입을 벌렸다. 그가 설명했다.
“검의 다음 단계로 넘어간 거다.”
“다음 단계라면……?”
헬릭스가 확언했다.
“네 오빠가 소드마스터가 된 거다.”
소드마스터.
왕국제일검도 모자라 전설의 소드마스터라니.
레아가 얼떨떨해져서 중얼거렸다.
“솔직히 우리 작은오빠는 여기서 더 세지면 흉기인데…….”
“이미 충분한 인간병기다.”
“아니 그런…… 맞는 말을.”
헬릭스가 피식 웃었다.
“무슨 남의 말 하듯 하고 있나. 레아 너도 강력한 화염마법사다.”
“난 작은오빠보다 안전하다고.”
“몬스터 떼를 상대로 파이어스톰을 쓰면서 말인가?”
할 말이 없었다. 그런 레아를 보고 헬릭스가 진지하게 말했다.
“아무튼 마나가 마른 세상이니, 너도 네 오빠도 조심해야 한다.”
목소리에 섞인 염려에 그녀도 약간 긴장했다.
“왜?”
“더블코어 마법사도 소드마스터도 크나큰 재능이지만, 이런 세상에서는 위험하다. 네 오빠, 예전에 크게 다친 적이 있지 않나?”
그녀가 침을 꼴깍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랬군. 타고난 강골에다 놀랍게 단련된 육체인데, 기의 흐름이 꼬여 있었다.”
“기의 흐름이 꼬여 있었다고?”
“내가 알기로 이 증상은, 더 윗단계에 진입하다가 실패한 후유증이다.”
듣고 보니 짐작되는 일이 있었다.
“맞아. 오빠가 예전에 적한테 둘러싸여서 계속 싸우다가 피를 토하고 쓰러진 적이 있거든……. 그 이후로 몸이 예전 같지 않다고 했어.”
“당연한 실패다.”
헬릭스가 말했다.
“이미 경지를 이루었는데, 그 경지를 뒷받침해 줄 마나가 세상에 없었으니 실패한 것이다.”
레아가 물었다.
“검사한테도 마나가 필요한 거야? 마법사만이 아니라?”
헬릭스는 설명했다. 마나는 세상의 기운을 칭하는 말일 뿐. 그 흐름을 읽고 비틀어 물리법칙을 깨는 마법사나, 극의에 이르러 더 이상 단순한 물리력이 아닌 힘을 휘두르게 된 검사나 마나가 필요한 건 매한가지라고 말이다.
“으음…… 검이 마법의 영역에 이르면 비슷해진다는 건가?”
“그렇다. 에너지의 형태와 쓰임이 다를 뿐, 본질은 같다고 할 수 있지.”
지금 세상은 마나가 부족하기 때문에, 루얀처럼 걸출한 검사는 오히려 좌절하기 쉬웠다.
그릇이 크고 달아오를수록 많은 물이 담겨야 하는 법.
그런데 세상이 미처 물을 공급하질 못하니, 달아오른 그릇에 금이 가는 원리라고 말이다.
“그래서 내가 마나를 주입하고, 비틀린 혈맥을 바로잡아 보고 있었다. 다행히 효과가 있었나 보군.”
“응…….”
레아는 순간 말이 나오지 않아서 헬릭스를 올려다봤다.
자기 일일 때는 ‘고마워’ 소리가 바로 나왔는데, 지금은 울컥하는 감정이 목구멍을 메꿔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빠가…… 그때…… 진짜, 진짜 고생했거든.”
항상 자신만만하던 루얀이 폐인이 되어, 방에 틀어박혀 누구도 만나지 않았던 그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마음이 무겁고 아찔했다.
“오빠를 많이 좋아하는군.”
“우리 오빠가 나한테 하는 거 봤잖아.”
그녀가 설핏 웃으며 이어 말했다.
“우리 가족이 아니었으면 난 살아남지도 못했을 거야. 내가 이런 성격이란 것도 몰랐을 거고.”
피어트 공작가 사람들이 퍼부은 사랑이 아니었다면 레아는 전생의 상처와 아픈 몸을 버티며 밝은 성격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웃는 그녀의 얼굴에 잠시 그늘이 스쳤다.
‘이전 생에서는, 너는 오빠랑 다르니까 네가 참으라는 말만 들었는데.’
이제 레아는 참지 않았다. 피어트 공작가에서 십이 년 동안 어린 시절을 다시 보내며, 뭐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사랑받고 지원받은 덕분이었다.
‘……아파서 작정하고 제대로 한 건 없지만, 뭐 지금부터 하면 되지.’
헬릭스가 빙그레 웃었다.
“네 오빠는 너에 대해 똑같은 말을 하던데. 네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폐인이 되었을 거라고.”
“그거야 본인이 이겨 낸 거지. 난 매일 가서 앞구르기 한 거밖에 없어.”
“앞구르기?”
“응. 내가 심하게 몸치잖아? 내가 앞구르기처럼 단순한 것도 못 하면서 포기 안 하고 연습하는 걸 보면, 오빠가 좀 웃기라도 하지 않을까 해서…….”
그때를 다시 떠올린 레아의 얼굴이 또 흐려졌다. 헬릭스가 얼른 도닥였다.
“그만한 기재가 벽 앞에서 추락했으니 좌절하는 게 당연하다. 꺾이지 않은 게 대단한 것이지. 네 앞구르기도 큰 힘을 줬을 거다.”
“……진짜?”
“진짜다. 루얀의 행동을 보면 알지 않나.”
그가 이어 말했다.
“그리고 네 오빠는 천재다, 레아. 내가 마나를 주입하는 즉시 몸에서 받아들이고 흡수하더군. 심지어 무슨 원리인지, 이게 마나인지 모르는데도 말이다.”
“사기잖아.”
“그렇다. 사기일 정도로 천재다.”
헬릭스와 안 어울리는 말투에 레아가 비싯 웃었다.
눈꼬리에 눈물방울이 고인 채로 웃는 모습에, 헬릭스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
그의 섬세한 손가락이 레아의 눈가를 훔쳤다.
그녀는 잠깐 숨을 들이켰다가, 그를 믿는다는 듯 턱 눈을 감았다.
“나 오른쪽 눈도.”
“손이 없나.”
“헬릭스 손까지 네 개 있네요.”
고개를 저으며 헬릭스가 레아의 반대편 눈가도 훔칠 때였다.
“……고마워.”
살짝 잠긴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내 계약자인 네 오빠잖나.”
“그래도. 오빠가 너 지하실에도 가두고 그랬는데, 탓하지 않고 도와주고.”
“그건 그때 상황이 오해할 만했다.”
“……진짜 사기다.”
레아가 코를 찡그리며 눈을 떴다.
“누구 계약자가 이렇게 잘생기고 마음도 넓지? 너무 사기적인 계약자 아냐?”
그렇게 말하며 웃는 눈동자엔 신뢰가 가득했다.
헬릭스는 충동적으로 그녀의 뺨을 감쌌다. 파란 눈이 깜박이며 그를 마주 응시했다.
“……레아.”
갑자기 케론의 말이 떠올랐다.
‘레아 피어트 공녀가 드래곤의 성녀일 수도 있잖습니까?’
헬릭스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가 살포시 고개를 저었다.
‘기우일 뿐이다.’
이제껏 행방을 찾을 수 없는 아즈라 때문에 초조해지니 괜히 레아를 의심하는 것이리라. 헬릭스가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손을 떼려는 순간, 레아가 제 뺨을 헬릭스 손에 비볐다.
“레……!”
슈크림 같은 볼이 단단한 손바닥을 쓸었다. 그녀가 부빗거릴 때마다 헬릭스는 흠칫했다.
“뭐, 뭐 하는 건가!”
“내 얼굴 만지고 싶었던 거 아니야? 손바닥 엄청 딱딱해.”
그가 얼른 손을 떼었다.
“그, 그런 남사스러운 말을 하다니.”
“……손바닥 딱딱하다는 게 남사스러운 거야? 어디가?”
“이성의 신체에 대해 말하는 건 눈동자가 아름답다 수준에서 끝나야 하는 법이다.”
네?
“그 기준, 몇백 년 전에도 어디 연애 금지 수도원에서나 통용되던 거 아니야?”
레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고지식한 남자를 꼬셔야 한다니, 앞길이 구만리였다.
‘아니 손바닥 딱딱하다는 게 어때서. 남자답고 좋은데.’
속으로 투덜대던 레아가 부루퉁하게 헬릭스를 쳐다봤다. 늘 입던 고대 복식이 아니라 요즘 예복을 입어서일까. 프록코트까지 갖춰 입었는데도 몸이 단단하다는 게 드러났다.
‘그러고 보니 손바닥만이 아니라 가슴이랑 어깨도 딱딱했더랬지.’
도서관 책의 탑에 안겨 올라갈 때 기억이 나서 그녀는 지그시 그의 가슴께에 눈을 두었다.
“……어딜 보는 건가.”
“아니, 신기해서. 헬릭스는 몸이 다 근육인가 봐.”
“그럴 리가 있겠나.”
“그랬던 거 같은데? 왜 전에 동굴에서…….”
저도 모르게 머릿속에 영상이 자동 재생됐다.
동굴에서 그녀에게 옷 벗어 줄 때 상의 탈의했던 헬릭스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물에 젖은 긴 은발이 넓은 어깨와 가슴으로 달라붙…….
‘으아아아! 음란마귀야 물렀거라!’
그녀가 말을 못 잇자 헬릭스가 슬쩍 내려다봤다.
“……레아?”
왜 그의 몸 이야기를 하다 귀와 목이 빨갛게 달아오른 건가. 헬릭스의 목소리가 미심쩍어졌다.
“……무슨 생각 하나.”
“벼, 별생각 안 했거든?”
헬릭스는 못 믿겠다는 얼굴로 프록코트의 단추를 하나 더 잠갔다.
“아니 이건 좀 아니잖아?”
“어허, 떨어져라.”
“재판장님,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일입니까!”
“죄인은 세 걸음 떨어져서 오도록.”
그가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뒤돌아서서 야영지로 향했다. 레아는 어쩐지 억울한 기분이었다.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좋아하는 남자가 몸이 좋으니까 그…… 과, 관심 가는 게 당연하잖아! 왜! 뭐! 나만 음란마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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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허억.”
피로 물든 여관 벽을 짚으며, 용병은 밭은 숨을 쉬었다.
사방이 피바다였다. 산전수전 다 겪었다 자부하는 노련한 용병인 그의 무릎이 떨렸다.
“이게 무슨……?”
그는 흐릿한 시야로 여관 계단참에 선 흑발 남자를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