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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38)화 (38/120)

38화

“나는 내가 치료하면 된다.”

그런 방법이 있구나!

레아가 빠르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약속.”

“약속?”

“레아와 헬릭스는 무도회 첫 춤을 같이 춘다.”

헬릭스가 새끼손가락을 마주 내밀며 물었다.

“첫 춤만 같이 추나?”

“다음은 일단 춰 보고 생각해 볼게.”

새침하게 말한 레아가 헬릭스의 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걸고는 다짐하듯 흔들었다.

헬릭스가 그 동작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그녀의 손가락을 꽉 얽었다.

“약속했다.”

❀ ❀ ❀

피어트 귀환조는 종일 달려, 늦은 오후에 한 여관 앞에 멈춰 섰다.

“오늘은 여기 머물고 아침 일찍 출발한다.”

루얀의 명령에 기사들과 고용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레아가 탄 마차의 문도 열렸다.

타닷.

“……으앗!”

“조심해라.”

헬릭스가 그녀를 안아 내려 땅에 제대로 세웠다.

“넘어질 뻔했잖나. 뭐가 그렇게 급한가?”

“속 안 좋아…….”

지치고 메슥거려서 죽을 것 같았다.

“공녀님, 괜찮으세요?”

자넷이 짐가방을 챙겨 뛰어왔다.

“얼른 들어가서 씻고 좀 쉬시면 나아지실 거예요. 제가 마사지도 해 드릴게요.”

“그러는 게 좋겠다, 레아.”

헬릭스가 레아의 차가워진 손을 걱정스레 만지며 마나를 조금 불어넣었다.

포퐁.

“으…….”

“좀 낫나?”

레아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으로도 멀미는 못 고치나 봐…….”

“마법이 만능은 아니다. 약을 만들어 갈 테니 먼저 쉬고 있어라.”

헬릭스의 말에 레아는 정신을 좀 차렸다.

몸이 안 좋으니 아픈 시절의 투정하던 버릇이 나온 것 같아, 그녀는 살짝 부끄러워졌다.

다들 바쁜데 나도 몸 추스르고 힘내야지.

“알았어. 고마워.”

애써 기운차게 대꾸하는 레아를 보고 헬릭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힘들면 더 힘들다고 해도 되는데, 그녀는 잘 기대고 부탁하는 것 같다가도 결정적인 건 혼자 해결하려 들었다.

‘그 부분이 레아답긴 하지만.’

가끔 그런 거리감이 느껴지면 입안에 모래가 돌아다니는 느낌이었다.

헬릭스는 뭐라 더 말하려다 레아의 후드를 슬쩍 내렸다.

“이런 여관은 위험하니까 예쁜 얼굴은 가려라.”

“그게 뭐야.”

그녀가 푸스스 웃는 걸 보자 그의 입꼬리에도 웃음이 번졌다.

레아는 따라서 또 웃었다.

‘그래. 뭐 어떤가.’

계약자가 제 앞에서 웃고 있는데.

헬릭스가 희미하게 웃으며 돌아서다, 다시 여관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 마나는……?”

❀ ❀ ❀

레아는 웃으며 여관으로 들어섰다. 옆에서 걷는 자넷도 안심한 표정이었다.

‘공녀님 기분이 나아지셨나 봐.’

종일 멀미에 시달리는 레아 때문에 걱정이 많았는데 다행이었다.

‘얼른 더 편안하게 해 드려야지.’

자넷은 잽싸게 앞으로 나섰다.

“주인장, 여기서 제일 좋은 방으로 주세요. 욕실 딸린 방으로.”

“어…… 그 방엔 이미 투숙객이 있는데요?”

“투숙객이 있다고요?”

자넷이 당황했다가 얼른 다시 물었다.

“그러면 다른 방 중에 욕실 딸린 방은 없나요?”

“그 방 하나밖에 없는데.”

난처해하던 여관주인은 귀를 쫑긋 세웠다. 밖에서 말 울음소리며 발소리가 크게 들렸던 것이다.

“어…… 일행이 많으신가?”

“많고말고요. 다른 일행분들은 양보하실 테니까, 우리 아가씨께서 욕실 딸린 방을 쓰셨으면 좋겠는데.”

여관주인은 자넷의 말을 듣고 마음이 급해졌다.

귀족 아가씨를 모시고 가는 대규모 일행인 모양인데, 아가씨께 내드릴 욕실 딸린 방이 없다니.

‘이런 큰 손님을 놓칠 순 없어!’

침을 꿀꺽 삼키는 여관주인의 눈에 한 손님이 보였다. 그가 반색했다.

“저기 그 방 투숙객이 나오시네요.”

“욕실 딸린 방에 묵는 분이요?”

“예. 두 분이 얘기를 나눠 보시면, 혹시 압니까요? 아가씨들께 저쪽 투숙객이 양보할 수도 있고…… 손님!”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투숙객이 고개를 돌렸다.

‘어?’

검은 머리에 검은 눈.

이 세계에서 처음 보는 색 조합에 레아가 저도 모르게 눈을 깜박이는 순간, 갑자기 공기가 달라졌다. 수압에 짓눌린 듯이 가슴이 뻐근하고 숨이 막혔다.

‘뭐야, 이거 뭐야?’

그녀가 심장께를 누르며 투숙객을 쳐다보았다.

훌쩍 큰 키에 탄탄한 체격. 부드러운 인상의 섬세한 얼굴에, 어딘지 다가가기 어려운 분위기를 지닌 미남이었다.

‘……모르는 사람인데?’

그런데 어딘가 익숙한, 기분 나쁜 느낌.

찍어 눌리는 듯한 이 감각도 분명 겪어 본 적 있었다.

흑발 남자가 그런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다가왔다.

저벅.

그의 시선을 받는 곳마다 소름이 일어 피부가 따끔거렸다.

저벅.

레아는 보아뱀 앞의 햄스터가 된 것처럼 바짝 얼어, 경계심을 곤두세운 채 색색 숨을 내쉬었다.

그가 레아에게 손을 뻗어 어깨를 잡고 속삭였다.

“찾았다.”

순간 남자의 눈에서 금빛 불길이 일렁였다.

“내 마법사.”

❀ ❀ ❀

뭐?

“마카롱들은 잘 있나?”

레아가 눈을 깜박였다.

‘마카롱?’

지금 이 상황과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단어에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그때였다.

“그 손 치워라.”

서늘한 목소리가 들리며 커다란 손이 남자의 팔을 밀어냈다.

‘헬릭스!’

레아가 크게 숨을 쉬었다.

그가 앞을 막아 주는 것만으로도 훨씬 더 숨통이 트였다.

특유의 청량한 체향을 들이마시자 남자의 마나에 찍어 눌리던 압박감이 옅어졌다.

“……네놈은.”

흑발 남자가 찌푸린 얼굴로 헬릭스를 노려보더니, 시선을 레아에게로 틀었다.

“네가 감히…….”

남자가 살벌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입술로만 웃었다.

“네 주인을 못 알아보고, 이런 놈을 옆에 붙여?”

누가 누구 주인이라는 거야? 레아가 발끈할 때였다.

스윽.

헬릭스가 몸을 움직여 그녀를 남자로부터 완전히 가렸다.

“주인이라니…….”

헬릭스의 목소리가 낮았다.

“어디서 그렇게 막돼먹은 소리인가.”

“……막돼먹은 소리?”

“제 의지를 가진 지성체에게 힘으로 강제하며 소유를 주장하다니, 못 배운 망둥이나 하는 짓이다. 카라이!”

남자가 점잖은 폭언에 혼이 나가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카라이가 달려왔다.

당장 쓰러질 것같이 비틀대면서도 악착같이 달려온 그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뚝뚝 떨어졌다. 헬릭스가 그를 제 왼편에 세우며 어깨를 잡았다.

“방어막 칠 준비를 해라.”

“예!”

카라이의 어깨를 잡은 헬릭스의 왼팔에 핏줄이 섰다.

레아는 헬릭스의 뜻을 눈치챘다.

카라이를 불러 방어막 치라면서 마나까지 불어넣다니, 눈앞의 남자와 제대로 대치하겠다는 것 아닌가.

‘나도 가만있을 수 없지.’

그녀는 여차하면 마법을 쓰기 위해 몸을 긴장시켰다.

단전과 심장에 있는 마나 코어가 움직이는 순간, 레아는 깨달았다.

흑발 남자의 마나는 자신과 비슷한 데다 몇 배로 더 강력했다.

‘……나는 쟤한테 안 되겠는데?’

어쩐지 무섭더라. 레아는 몸을 후드드 떨며 머리를 굴렸다.

‘우리 전력을 더 늘려야 해. 그런데 난 지금 별 도움 안 될 거 같고…….’

판단을 마친 그녀가 배에 훕, 힘을 주었다.

그리고 외쳤다.

“오빠!”

파바바바밧!

어디서 바람 소리가 들리더니.

다음 순간 루얀이 문가에 나타났다.

“레아야!”

그가 레아 쪽을 확인하자마자 순식간에 검을 빼 들어 남자를 겨눴다.

“이 날파리는 또 뭐냐?”

막돼먹은 놈에 망둥이에, 이젠 날파리까지.

남자는 난생처음 받는 취급에 잠시 얼굴을 굳혔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헬릭스, 카라이, 루얀.

레아를 둘러싼 남자들의 면면을 확인한 흑발 남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 ❀ ❀

남자가 물러나 사라진 뒤 레아는 힘이 빠져서 주저앉았다.

털썩.

카라이도 혼이 빠진 표정으로 그녀 옆에 엎어졌다.

“주인님…….”

카라이가 창백한 얼굴로 물었다.

“괜찮으세요? 방금 그자 뭡니까? 느낌이…….”

“……너도 이상했어?”

“예!”

카라이가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주치니까 심장이 막 뛰고 숨 쉬기도 어려운데, 진땀 나면서 다리에서 힘도 빠지고…….”

나랑 딱 비슷한 증상이잖아.

레아가 얼굴을 굳히는데 카라이가 주저하다 말했다.

“그리고 뭔가…… 저자의 뜻을 거스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저자의 말을 들어야 할 것 같았단 거야?”

대답하지 못하는 카라이의 어깨를 헬릭스가 짚었다. 짐작 가는 것이 있었다.

‘카라이도 드래곤 마나를 먹은 마법능력자이니 드래곤의 기운에는 복종하게 될 테지.’

그가 흑발 남자에게 바로 조종당하지 않은 건 레아에 대한 충성심과 헬릭스가 불어넣은 마나 덕분일 터였다.

헬릭스가 말했다.

“레아 너도 저 자에게 압도당하는 느낌을 받지 않았나. 너는 마법사니까 좀 더 네 의지를 지킬 수 있겠지만, 마법능력자는 또 다를 거다.”

놈이 카라이는 거들떠도 안 보고 레아에게만 집착하는 것도 그 때문일까. 헬릭스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레아가 중얼거렸다.

“도대체 저 자에게 우리가 왜 그런 반응을 보인 거지?”

미간을 좁히는 그녀에게 헬릭스가 조용히 속삭였다.

“그자에게서 드래곤의 마나가 느껴졌다.”

“뭐?”

“쉿.”

레아에게 다시 속삭인 헬릭스가 여관 안을 둘러보았다.

용병과 사냥꾼, 상인과 여행객과 순례자들.

위험한 놈들이 섞여 있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레아, 여기를 떠나야 한다.”

❀ ❀ ❀

레아 일행이 다시 바람처럼 떠난 뒤.

여관주인은 실망해서 일층 식당에 앉아 있었다.

갑자기 거물처럼 보이는 손님들이 우르르 와서 좋아했는데, 아가씨가 몇 마디 하자 도로 죄다 나가 버린 것이다.

“오늘 장사 대박인 줄 알았는데.”

한숨을 푹 쉬는 주인에게 아내가 타박했다.

“어이구 이 양반, 정신 차려요. 그 사람들 딱 봐도 한가락 하는 귀족 같던데, 우리가 그 많은 귀족들을 어떻게 다 대접하우?”

“손님들을 죄다 내보내면…….”

아내가 도끼눈을 떴다.

“이 양반이 정신이 있나 없나! 대박 한번 잡자고 단골들을 내쫓으면 앞으론 뭐 먹고 살 건데?”

그때였다.

끼이익.

문이 열리며, 여관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어서 오십시오!”

아까의 귀족 기사들처럼 옷을 비슷하게 맞춰 입은 이들이었다. 여관주인은 다시 대형 손님들을 맞게 되나 기대하면서 목청 높여 인사했다.

그리고 그대로 쓰러졌다.

푸슉.

뒤늦게 그의 몸에서 핏줄기가 솟았다.

“꺄악!”

비명을 지르며 여주인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마법사는?”

어느새 지척에 다가온 검은 머리의 남자가 그녀에게 물었다.

“마, 마법사요?”

“금발에, 굉장히 예쁜 귀족 여자 말이다.”

“그, 그 아가씨는 들어왔다가 바로 떠나셨……!”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주인이 고꾸라졌다. 흑발의 남자는 무표정하게 일어서서 눈을 감았다 떴다.

검은 눈에 금빛 불길이 일렁였다.

“감히…….”

그는 간신히 찾아낸 마법사를 떠올렸다.

후드 아래 살짝 드러난 아름다운 얼굴과 그를 쳐다보던 맑은 푸른 눈.

하나 그런 외모보다도 다른 것들이 길게 남았다.

자신을 경계하던 표정.

그러더니 다른 남자 뒤에 숨어 눈에 띄게 안심하는 얼굴이라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와 마법사 사이는 끊을 수 없는 마나로 연결되어 있거늘.

‘너는 내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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