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37)화 (37/120)
  • 37화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나저나 페이런에서 마법사가 나타났는데 보고가 없다니, 페이런의 비약 실험 담당이 누구지?”

    파이퍼스 자작이 대답했다.

    “트로우 백작이란 자입니다.”

    “트로우 백작?”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그자는 뭐라 보고하던가?”

    “최근 페이런에서 비약 실험 성공자가 나타난 적 없다고…….”

    아르카이크 황자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확실한가?”

    “트로우 백작의 장부와 일지까지 확인해 보았답니다.”

    드래곤의 마나를 비약으로 만들어 벌이는 실험들.

    어린애들에게 비약을 먹이고 추이를 관찰하는 실험들은 오켄 제국 밖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생존률이 희박하고, 살아남은 능력자는 오켄 제국으로 보내야 하는 잔인한 실험.

    위험한 데다 얻어 낸 과실은 제국에 넘겨야 하는 일이었지만, 약소국의 귀족 중엔 그 정도는 감수하고서라도 오켄 제국에 연을 대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았다.

    “트로우 백작을 다시 조사해 볼까요? 저열한 수를 썼을지도 모릅니다.”

    “저열한 수?”

    “예. 장부에는 실험이나 운송 실패라 기재해 놓고 비약을 빼돌린다거나…….”

    “놈들이 겁도 없이 그런 짓을 한다고?”

    아르카이크 황자가 차갑게 웃으며 손짓했다.

    그의 손짓이 바람을 일으킨 것처럼, 순식간에 검은 옷의 호위가 모습을 드러냈다.

    “부르셨습니까.”

    옆에 있던 파이퍼스 자작도 놀랄 만큼 자연스러운 은신술이었다.

    황자가 낮게 명령했다.

    “단원 몇을 보내 트로우 백작이란 자를 밀착 감시해라.”

    ❀ ❀ ❀

    한편 북부의 피어트 별장에선 작별 인사가 한창이었다.

    “경, 수도에서 다시 보세.”

    “왕자님께서도 뜻하신 바 다 마치시고 무사 귀환하시길 바랍니다.”

    깍듯한 인사 끝에 악수를 나누며, 패트릭 왕자와 루얀 피어트가 눈빛을 교환했다.

    ‘피어트 경, 이러긴가? 여기까지 와서 끝까지 좀 함께하지?’

    ‘왕자님, 이만큼 떠먹여 드렸으면 됐지 뭘 더 바라십니까? 이젠 알아서 좀 하십쇼!’

    이글이글.

    결국 눈빛과 명분에서 패배한 왕자는 루얀을 보내 줄 수밖에 없었다.

    그가 가볍게 말에 오르자 패트릭 왕자는 마차 앞에 선 레아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피어트 영애, 아쉽습니다. 여기까지 와서 각자 바빠서 자주 보지도 못했군요.”

    레아는 약간 얼떨떨했다.

    수도의 이런저런 행사에서 가끔 마주쳐도 서로 소 닭 보듯 하는 데면데면한 사이였는데, 북부에서 만난 뒤부터 어쩐지 패트릭 왕자가 자신에게 부쩍 호의적으로 굴었으니까.

    ‘이유가 뭐지?’

    궁금했지만 그녀는 일단 넘기기로 했다. 왕자의 친절 말고도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았다.

    “저도 아쉽습니다, 왕자님. 수도에서 다시 뵐 때까지 건강하시기를…….”

    레아와 헬릭스, 루얀, 카라이가 함께하는 귀환 일행은 서둘러 출발했다.

    기사단 2조장 바이든 경과 하녀장 등 별장을 정리해야 하는 인원은 남고, 소수의 기사들과 고용인들만 동행한 소규모 일행이었다.

    멀어지는 마차와 말들을 보며 토벌대 기사들이 왕자에게 말했다.

    “명색이 피어트 공자 공녀의 귀환인데, 인원이 너무 적은 거 아닙니까?”

    “피어트 경이 있는데 많을 필요가 있겠나?”

    왕자의 말에 기사들 대부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페이릴리…… 아니 피어트 영애는 가까이서 보니까 정말 여신이군요.”

    “수도에서보다 더 예뻐진 것 같지 않습니까? 여기 있을 때 말이라도 붙여 보고 싶었는데.”

    “아서게. 루얀 피어트 경이 가만두지 않을걸.”

    왕자의 말에 몸서리치는 시늉을 하며 웃으면서도, 기사들은 그런 루얀이 왜 레아 옆에 헬릭스가 붙어 다니게 두느냐고 하진 않았다. 그들의 눈에도 헬릭스는 비범해 보였던 것이다.

    “……헬 산맥의 헬릭스라.”

    패트릭 왕자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상현상을 조사할수록, 고대 유적과 신전 따위에서 자주 보이는 이름이었다. 헬릭스. 인근 마을의 나이 든 점술가는 헬 산맥의 이름도 헬릭스에서 왔다고 주장했다.

    ‘헬릭스 말고 자주 등장하는 말들이 또 있었지.’

    헬릭스, 수호자, 드래곤의 성녀.

    이 세 가지 단어의 정체만 알아내도 오랫동안 숨겨진 비밀이 밝혀질 것 같았다.

    ‘당장 북부의 이상현상과 관련 있는 사안은 아니지만…….’

    어쩐지 찜찜했다. 정말 관련이 없는 걸까 싶은 마음과, 이대로 모르는 척해야 될 것 같은 마음이 교차했다.

    ‘당장은 북부에 폭설도 몬스터의 침입도 그쳤고, 몬스터도 거의 다 토벌했으니.’

    더 캐지 않아도 괜찮겠지.

    패트릭 왕자는 생각하며 멀어지는 마차에서 시선을 돌렸다.

    그 역시, 고대의 비밀과 수상한 미남의 상관관계 말고도 신경 써야 할 일이 너무도 많았다.

    ❀ ❀ ❀

    레아는 마차 창문 너머로 멀어지는 별장과 헬 산맥을 바라봤다.

    마법학교의 애들과 눈물의 작별 인사도 마치고, 루얀도 함께 가는 귀환길이었다. 카라이도 잠시 동행해서, 도시에서 애들한테 필요한 걸 사고 돌아가기로 했고.

    그런데 왜 기분이 싱숭생숭하지. 그새 여기에 정들었나?

    “레아, 괜찮나?”

    헬릭스가 옆에서 걱정스레 물었다.

    “주치의 말로는 네가 멀미가 심하다고 하던데.”

    “응. 아직은 괜찮아.”

    그녀는 대꾸하며 헬릭스를 쳐다보았다.

    늘 헐렁하고 치렁치렁한 옛날 스타일 옷을 입고 있었는데, 오늘은 요즘 유행하는 정장 차림이었다. 헬릭스의 넓은 어깨와 탄탄한 몸에 정장은, 입고 태어난 것처럼 잘 어울렸다.

    ‘세상에, 어떻게 뭘 입어도 저렇게 멋있지?’

    잠시 흐뭇해하던 레아가 정신을 차렸다.

    이럴 때가 아니지.

    그는 자신보다 몇 배는 더 마음이 복잡할 터였다.

    “헬릭스.”

    그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수도는 낯설 텐데 함께 가 주겠다고 해서 고마워.”

    “네 계약자로서 결정한 일이다.”

    “응. 계약자로서 힘든 결정 해 줬어.”

    레아가 말을 이었다.

    “처음엔 좀 힘들겠지만 곧 적응할 수 있을 거야. 네 곁엔 나랑 피어트 공작가가 있고.”

    그녀가 헬릭스를 흘끔 보고는 눈을 도로록 굴렸다.

    “그리고…… 으음. 사교계 사람들은 눈이 높으니까.”

    “눈이 높다니?”

    “잘생기고 예쁜 거 엄청 좋아하거든. 널 보면 다들 난리가 날걸?”

    칭찬을 들은 헬릭스의 표정이 찜찜해졌다.

    “……미남계라도 쓰란 말인가?”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레아가 팔짝 뛰었다.

    “나 혼자 보기에도 아까운데!”

    “그렇지만 비상사태라 수도로 돌아가는 게 아닌가. 내 외모가 도움이 된다면…….”

    “아무리 그래도 우리 가문이 그 정도로 궁하진 않거든?”

    “그런가.”

    헬릭스가 화려한 마차 안을 둘러보았다.

    명품은 디테일에서 차이가 나는 법.

    좌석을 빈틈없이 감싼 벨벳도 고급스러웠지만, 섬유 한 올 빠져나오지 않은 모퉁이 마감이 진짜 공작가의 위세를 알려 주고 있었다.

    ‘이 옷도 그렇지.’

    보통보다 키도 체격도 큰 헬릭스의 옷을 바로 구할 방법도 없을 텐데. 떠나는 날이 되자 하녀장은 준비해 뒀던 옷이라며 헬릭스의 정장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딱 맞게 내왔다.

    창문 밖으로 느껴지는 기사단도 규율이 잘 잡혀 있고, 개개인의 실력 또한 뛰어났다.

    피어트 공작가.

    왕국에 셋뿐인 공작가 중 한 곳이라고 듣기는 했지만 헬칸의 별장에서 레아와 어울리며 의식하지 못했었는데, 별장을 떠나면서 보니 새삼 대단한 가문이라는 게 느껴졌다.

    ‘수도에 가면 이보다 더할 거다.’

    어디에서나, 누구나.

    피어트 공작가의 이름에 흥미를 보이고 고개를 숙이리라.

    “……내가 누를 끼치면 안 되겠군.”

    헬릭스의 말에 레아가 되물었다.

    “헬릭스 넌 복만 줄 거 같은데 어떻게 누를 끼쳐?”

    헬릭스는 순간 마차 창턱을 꽉 쥐다 얼른 힘을 풀었다.

    ‘위험했다.’

    귀여워서 마차를 부술 뻔했다.

    “……나를 너무 좋게 보는 것 아닌가.”

    “다 그럴 만해서 그러는 거야.”

    레아가 웃으며 덧붙었다.

    “부담 가질 게 뭐 있어? 넌 날 건강하게 만들어 준 복덩이인걸.”

    “복덩이…….”

    헬릭스가 되뇌며 픽 웃었다.

    수호자인 그를 이렇게 사심 없이 복덩이라고 부르던 사람이 있었던가.

    레아는 그 웃는 얼굴에 안심한 듯 밝게 말했다.

    “나 건강해지면 하고 싶었던 거 진짜 많았거든? 이번에 급한 일이 해결되면, 더 추워지기 전에 같이 놀러 다니자.”

    “뭘 하고 싶은가?”

    레아가 손가락을 하나씩 꼽았다.

    “음. 유명한 디저트 가게에도 가고. 번화가에서 쇼핑도 하고. 또…….”

    그녀가 들떠서 발을 까딱였다.

    헬릭스는 그 하얀 발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제 또래 영애들이 지겹도록 해 봤을 일을, 꼭 해 보고 싶었다며 말하는 그녀가 안쓰러웠다.

    “헬릭스는?”

    레아가 눈을 반짝이며 시선을 마주쳤다.

    “헬릭스는 수도에서 뭐 하고 싶은 거 없어?”

    “나는…….”

    그의 눈이 레아의 발에 머물렀다.

    “레아 너와 춤을 추고 싶다.”

    헬릭스가 불쑥 말했다.

    건강해졌으니 무도회에서 춤을 출 수 있을 거라던 레아의 말이 마음에 남아 있었다.

    “나랑 춤을? 축제에서 그걸 봐 놓고?”

    “……그래.”

    그의 회색 눈이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패트릭 왕자 말고, 나와.”

    레아가 눈을 깜박였다.

    “갑자기 패트릭 왕자 이야기는 왜 해?”

    “레아 너는 피어트 공녀잖나.”

    헬릭스가 말했다.

    “네가 건강해져서 무도회에 가면, 다들 네가 왕자와 춤을 출 거라 여길 거다.”

    “거기까진 아직 생각 안 해 봤어.”

    “나는 생각했다.”

    헬릭스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레아.”

    그가 진지하게 말했다.

    “왕자님 발을 밟는 것보단 내 발을 밟는 게 나을 거다.”

    “……안 밟을지도 모르거든!”

    “그럴 리가.”

    헬릭스는 엄숙한 얼굴로 콧방귀를 뀌었다.

    “내 예상엔 한 곡에 열다섯 번 정도는 밟을 것 같다. 네 파트너는 발등이 시퍼렇게 멍들지도 모르겠군.”

    “……그 구체적인 숫자는 뭔데?!”

    그렇지만 레아 생각에도 헬릭스 말이 맞았다.

    자기가 춤을 추면 자꾸 균형 못 잡고 박자 놓치면서 파트너 발을 힘차게 밟아 댈 것 같았으니까.

    “으으, 안 되는데. 무도회에서 나 춤추는 거 지켜볼 시선이 많은데…….”

    끙끙대는 그녀에게 헬릭스가 말했다.

    “그러니 나와 춤추자.”

    “네 발등은 어쩌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