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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36)화 (36/120)

36화

드래곤.

마법의 시초이자 최강의 생명체.

멸종하면서 마법시대를 끝냈다는 종족.

페이런에서는 드래곤이 전설의 종족이라고 여겼지만, 오켄 제국에서는 사정이 좀 달랐다. 오켄 황실에는 드래곤의 피가 흐른다고 믿었으니까.

흑발흑안이 뚜렷하게 유전되는 오켄 황실에서 간혹 금색 눈동자를 가진 이가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했다.

아르카이크 황자는 평소에는 오켄 황실의 유전인 검은 눈동자였다가, 종종 눈이 황금색으로 변했다. 그렇게 색이 변할 때는 사람이 아닌 듯한 존재감을 뿜어 좌중을 압도했다.

단순한 카리스마뿐이었다면 황금안 소문도 금세 사그라들었으리라.

그렇지만 그뿐이 아니었다. 마법능력자들로 이루어진 황실친위대 뱀 기사단도 아르카이크 황자의 명령은 무조건적으로 따랐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그런 아르카이크 황자가 선언했다.

오켄 제국의 서쪽, 페이런 왕국의 북부에…… 반쪽짜리 마법능력자가 아니라 진짜 마법사가 나타났다고.

❀ ❀ ❀

레아와 헬릭스가 수도로 간다고 하자 루얀은 고민했다.

“……나도 갈까.”

“패트릭 왕자님은 어쩌고? 토벌대로 같이 온 거 아니었어?”

“나 하나 빠진다고 큰일 나겠냐.”

큰일이 날 거 같은데요.

레아가 말렸다.

“오빠, 그건 좀 더 생각해 봐. 지금 빠지면 이제까지 왕자님한테 눈도장 찍은 게 소용없어지는 거 아냐?”

“내가 왕자님한테 눈도장을? 그 반대겠지.”

루얀의 말에 그녀가 괜히 주위를 살폈다.

“……작은오빠, 그런 말은 입 밖으로 내면 안 되거든? 남들이 들으면 재수 없어 한다고.”

“이런 말 안 들어도 나 재수 없어 하는 놈들은 많다.”

“에효, 그러시겠죠.”

레아가 체념의 한숨을 쉬었다. 루얀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애초에 패트릭 왕자님은 헬 산맥 근처에 오고 싶어 하셨어. 여기까지 데려다 놨으니 알아서 하시겠지.”

“으음. 하긴 우리 별장은 헬 산맥 바로 앞이니까.”

“이 정도면 그쪽 파벌도 아닌 신하치곤 할 만큼 했다고 본다. 문제는 난데…….”

루얀이 레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레아 너, 헬 산맥에서 헬릭스와 마법 수련을 자주 한다면서?”

“응. 거의 매일 했지? 요즘은 바빠서 뜸했지만.”

“확실히 늘더냐?”

“늘던데?”

레아의 쌈빡한 대답에 루얀의 미간이 좁혀졌다.

“헬 산에서 수련하는 것하고, 헬릭스가 도와주는 것 중에 어느 쪽이 더 실력 느는 데 영향이 큰 것 같냐?”

“역시 헬릭스가 도와주는 쪽이지.”

“그럼 나도 수도로 간다.”

레아가 ‘그거랑 이게 무슨 상관이죠’ 하는 얼굴로 루얀을 쳐다봤다. 그가 말했다.

“내가 요즘에 헬 산맥에서 헬릭스가 가르쳐 준 방법으로 수련하고 있잖냐. 하루가 다르게 몸 상태가 좋아져서.”

“어? 헬릭스가? 언제 그런 걸 가르쳐 줬어?”

“몰랐냐?”

루얀이 동그랗게 눈을 뜬 레아에게 되물었다.

“난 네가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지난번에 너 쓰러졌다 깨어났을 때 내가 사과하니까, 시간 좀 내 달라고 하더니 그걸 가르쳐 주더라. 내가 옛날에 크게 다쳤던 것도 알고 있던데.”

“난 얘기 안 했는데?”

루얀은 크게 놀란 눈치였다.

“그럼 한번에 내 상태를 꿰뚫어 봤단 말이야? 널 건강하게 마법사로 만들었다더니…… 이거 진짜 보통 능력자가 아니네.”

❀ ❀ ❀

정작 헬릭스는 덤덤하게 말했다.

“별것 아니다.”

“별거 아니긴. 언제 나 말고 작은오빠까지 봐 준 거야?”

“레아 네 오빠가 아닌가.”

그가 무심하게 덧붙였다.

“너한테 끔찍한 모습이 좋아 보이더군. 요즘 수호자의 능력이 더 돌아와서 그 정도 봐 주는 일은 아무 문제 없기도 했고.”

“능력이 더 돌아왔어?”

레아가 손뼉을 쳤다.

“잘됐다. 이대로 점점 자연스럽게 돌아오는 걸까?”

“그건 아직 잘 모르겠다.”

힘이 돌아오고 있는 건 확실한데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시간이 해결해 주는 건 아닌 듯하고…… 뭔가 다른 요인이 있는 듯한데.’

생각에 잠긴 헬릭스의 팔을 레아가 툭툭 쳤다.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도 돌아오고 있다는 건 잘하고 있다는 뜻 아냐?”

“방향이 틀릴 수도 있지 않나.”

“그건 모르는 일이지. 그래도 결과가 나오고 있으니까 일단 쭉 해 보는 거지 뭐. 옛말에 못 먹어도 고라고 했어.”

“……그런 옛말이 있었나?”

갸웃하는 헬릭스를 두고 레아가 아차 싶어 말을 돌렸다.

“그리고 헬릭스 혼자가 아니라 나도 같이할 거니까.”

“믿음직하군.”

단답형으로 툭 말하는 것과 달리, 그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나 믿지?’ 하는 표정으로 웃는 얼굴이 눈이 부셨다.

레아가 그 눈빛을 눈치채고 제 얼굴에 꽃받침을 했다.

“헬릭스, 내 얼굴 뚫어지겠다. 내가 그렇게 좋아? 막 믿음직해서 두근거려?”

“……같이 춤추는 것만 아니면 그럴 것 같다.”

“와, 이렇게 약한 곳을 찌르고 들어오나요.”

그녀가 창가에 놓인 벤치에 털썩 앉으며 한숨을 쉬었다.

“걱정이야. 수도에서 내가 건강해진 거 티 내면 무도회도 가고 춤도 춰야 할 텐데.”

“수도는 어떤 곳인가?”

난데없는 질문에 눈을 깜박이던 레아가 대답했다.

“어…… 화려한 전쟁터?”

“…….”

헬릭스는 순간 말을 잊었다.

“……사교계의 암투가 심한가?”

“장난 아니라니까.”

레아가 잘래잘래 고개를 저었다.

“내가 몸이 약해서 그렇지 신경줄은 굵은 편인데…… 위경련으로 몇 번 쓰러졌었어.”

“위경련이라니.”

헬릭스의 얼굴이 굳었다.

“그 약하디약한 몸으로 위경련까지 일으키며 사교계 활동을 할 필요가 있나.”

“하하. 근데 안 하면 또 누워만 있잖아. 그것도 심심해.”

레아가 발을 바동거렸다.

“이제 건강해졌으니까 나도 수도로 돌아가면 무도회에서 춤도 추고 그래야지…… 그래야 되는데…….”

헬릭스가 스텝을 밟을 걱정에 이리저리 까딱대는 레아의 발을 내려다봤다. 그의 손아귀에 다 들어올 것 같은 하얀 발이 슬리퍼 안에서 팔랑거렸다.

“이 발로 무슨 스텝을 밟는다고.”

“왜 내 발 무시하죠?”

“레아 넌 타고난 몸치가 아닌가.”

“아야야.”

레아가 가슴을 쥐는 시늉을 했다.

“선생님, 칭찬은 그렇게 안 느시더니 팩트폭력은 너무 뼈아픈 거 아닙니까?”

“사실이지 않나.”

대꾸하며, 헬릭스는 레아가 무도회에서 춤추는 광경을 상상했다.

제대로 꾸민 레아는 눈부시게 아름다울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와 인사한 후 손을 잡고, 음악에 맞춰 허리를 감고, 발이 밟힐 때마다 귓가에 속삭일 파트너가 있을 터.

“…….”

얼굴이 절로 구겨지자 레아가 그의 표정을 살폈다.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레아.”

“응. 왜?”

헬릭스는 무구하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녀를 내려다보다 마른세수를 했다.

‘무도회 춤 상대가 있는 게 무슨 문제라고.’

신경 쓸 것 없는 문제에 자꾸 신경이 곤두섰다. 레아 옆에 있으면 이상해졌다.

‘그렇지만 떨어지고 싶진 않다.’

게다가 그녀 옆에서 떨어지면 다른 파트너가 레아 옆을 차지할 게 아닌가.

그녀를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인 양 쳐다보던 촌장 아들이며, 호감 어린 미소를 지어 보이던 패트릭 왕자가 떠올랐다.

‘공녀님이 인기가 많으셔서 날파리들이 많이 꼬이지 뭡니까.’

주치의의 푸념까지 생각나자 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내게 무도회 에티켓을 알려 다오.”

❀ ❀ ❀

‘마법사는 금발의 여자다.’

‘귀족에, 최근 크게 아프거나 죽다 살아났을 확률이 높다.’

아르카이크 황자가 던져 준 작은 단서만 가지고 페이런의 북부를 뒤지던 뱀 기사단.

그들은 확실히 유능했다. 저 단서만으로도 타국에서 용의자를 찾아냈으니까.

보고를 받은 황자는 황실 업무를 보좌관에게 일임해 놓고, 뱀 기사단장에게 찾아낸 용의자를 세세히 추적하라 닦달했다.

그러고는 측근인 파이퍼스 자작을 대동하고 직접 페이런까지 온 것이다.

“확실히 찾은 게 맞겠지?”

“감히 의심되는 정도로 황자님께 그런 보고를 올리겠습니까? 심려치 마십시오. 다만…….”

자작이 황자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래도 상대가 귀족 영애다 보니, 황자님의 명예에 누가 될까 걱정됩니다.”

“내가 타국의 귀족 영애를 납치했다고 추문이라도 날까 그러나?”

아르카이크 황자가 피식 웃었다.

“걱정 말게. 내가 이곳에 온 걸 아는 이는 뱀 기사단원들과 몇몇 측근들뿐이야. 그들이 함부로 떠들고 다닐 리 없지.”

하긴 뱀 기사단은 황자가 죽으라 하면 죽을 자들이었다. 금안을 빛낼 때의 아르카이크 황자에게는 그런 능력이 있었다.

저를 비롯한 다른 측근들도 그걸 알면서 황자를 거역할 만큼 간이 붓진 않았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간 뱀 기사단이 마법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할 테니 말이다.

“그리고 설령, 납치가 알려진다 해도 무슨 상관인가? 그때쯤엔 그 마법사가 내게 복종하고 있을 것을.”

파이퍼스 자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의 마나로 마법사가 된 자이니, 황자님의 드래곤 혈통과 황금안에 저항하지 못하겠지요.”

“그렇지. 그 여자를 찾는 자가 나타난다 해도, 마법사가 제 입으로 나를 모시고 싶어 제 발로 왔다고 하면 그만이야.”

그 영애 혼처는 다 막혔군. 얼굴도 모르는 귀족 영애를 잠시 동정하던 자작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상대는 그냥 어린 처자가 아니라 마법사였다.

마법사.

그 수많은 실험, 셀 수도 없는 실험체들. 드디어 그중에 마법사가 만들어진 것이다.

“역시, 황자님께선 마법사를 찾아내고 바로 복종시킬 계획을 짜셨군요. 대단하십니다.”

황실 마법학자들의 수장인 파이퍼스 자작은 감격에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마법사라니, 죽기 전에 못 볼 줄 알았건만. 역시 아르카이크 황자를 따르길 잘했다 싶었다.

자작이 황자를 향해 고개 숙였다.

“미리 경하드립니다, 황자님. 이번에 마법사를 찾아내시면 황태자 책봉이 코앞일 것입니다.”

“아직은 축하받기에 이르군. 먼저 그 마법사를 찾아야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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