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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34)화 (34/120)

34화

“하긴 내가 좀 예쁘긴 하지?”

“좀 예쁜 게 아니다. 굉장히 예쁘다.”

“그럼, 그럼. 나의 미모는 헬릭스가 최고 미남인 것만큼이나 객관적 사실이지.”

예쁘다고 했다가 졸지에 최고 미남으로 공인받은 헬릭스가 당황했다. 그 틈에 루이지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남자들이 나섰다.

“공녀님, 오셨습니까.”

딜런 경이 반듯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얼굴색이 좋아 보였다.

“아, 딜런 경. 일은 할 만한가? 지내기는 괜찮고?”

“공녀님의 은덕으로 편히 지내고 있습니다. 루이지 양도 잘해 주시고, 마을 사람들도 협조적입니다.”

“잘됐네. 그런데 저 사람은?”

딜런 경과 좀 떨어져 서 있던 젊은 남자가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피어트 공녀님. 공작가에서 일하는 약재사 케일이라고 합니다. 약초학이 전문분야지요.”

부탁한 대로 본가에서 약초 전문가를 보내 줬구나. 레아가 반가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겠어. 어때? 자네가 보기엔 루이지의 약초가 쓸 만한가?”

“루이지 씨의 약초는 정말 놀랍더군요. 몸을 뜨겁게 하면서도 원기 증강의 효과가 있어 여러 용도의 약재로 개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의 말에 레아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여기까지 전문가를 부른 보람이 있네.”

“저 역시 큰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웃는 케일의 시선이 루이지에게로 향했다.

‘응? 보람이 있다면서 왜 루이지를 보지?’

레아는 의아해하면서 루이지 쪽으로 눈을 돌렸다. 시야 끝에 경직된 표정의 딜런 경이 보였다.

‘딜런 경은 또 표정이 왜 저래? 왜 그 표정으로 은근슬쩍 루이지 옆으로 붙어 서는데?’

갸우뚱하며 고개를 돌리자 케일이 딜런 경을 보고 인상을 찌푸리는 게 보였다.

‘어라?’

두 남자 사이의 이 미묘한 기류는 뭐지?

“루이지 양, 제가 호위하겠습니다. 조를 이리 주십시오.”

“루이지 씨, 약초밭을 둘러볼 준비는 마치셨나요? 제가 도와드리죠.”

딜런 경과 케일이 앞다투어 루이지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루이지는 결혼했었으니까 ‘**부인’이라고 부를 법도 한데, 둘 다 루이지를 부인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레아가 입을 가렸다.

‘설마 이거…… 삼각관계?’

레아는 헬릭스 옆구리를 찔러서 얼른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레아, 루이지 씨네 집에서 약초밭을 더 살펴볼 게 아니었나?”

“그건 내일 해도 돼. 지금은 좀…….”

그녀는 딜런 경과 케일이 아무래도 루이지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헬릭스는 약간 놀란 눈치였다.

“레아 너는 그걸 어떻게 알았나?”

“원래 남의 연애는 당사자들만 빼고 다 아는 거래. 하는 양을 보니까 딱 보이던걸.”

헬릭스는 역시 모르겠는지 가만히 있다가 불쑥 말했다.

“네가 통찰력이 있어서 눈치챈 것 같은데.”

“와, 지금 칭찬타임이야? 헬릭스가 나 먼저 칭찬해 주는 거야?”

웬일이냐고 밝게 웃는 레아를 보고 헬릭스의 표정도 풀어졌다.

“느낀 바를 말한 것뿐이다.”

“그래도 좋다. 자주 해 줘.”

“……노력해 보겠다. 그런데 레아, 그들이 삼각관계인 것과 약초밭을 안 살펴보는 게 무슨 상관이 있나?”

“둘이 지금 루이지를 두고 기 싸움하는 거 같았거든. 오늘 같은 축제일에 상대보다 더 어필하고 점수 따고 싶을 텐데, 사장님…… 아니 고용주가 옆에서 딱 버티고 있으면 얼마나 싫겠어?”

레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헬릭스를 올려다봤다.

“그 김에 우리도 우리끼리 놀자.”

“둘이서 말인가? 축제에?”

“응. 싫어?”

싫을 리가 있는가.

빛의 속도로 튀어나오려던 말이 갑자기 쑥 들어갔다.

마을 한복판 공터에서 젊은이들이 추는 춤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남녀가 한 명씩 섞여 추는 혼성 춤이었다.

“……좀 싫은 것 같다.”

“공녀님! 옆에 호위기사님!”

“오셔서 같이 춰요!”

이쪽을 발견한 사람들이 크게 소리치자 레아가 손을 흔들었다. 지난번 마녀사냥이 일어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에 그녀가 웃으며 소리쳤다.

“그래야지!”

대답한 레아가 헬릭스를 돌아봤다.

“헬릭스, 좀 전에 뭐라고 했어?”

“……나도 같이 추겠다고 했다.”

❀ ❀ ❀

마을 축제의 춤은 남녀가 한 사람씩 섞여 손을 잡고 둥글게 서서 빙글빙글 도는 춤이었다. 레아는 설명하는 촌장 아들의 동작을 보며 눈을 빛냈다.

‘사교계 사교춤하고는 다르구나!’

유리몸이라 데뷔탕트 무도회에서도 춤 한번 못 춰 본 그녀.

경험이 없는 데다 몸치이기까지 하니 포기하고 있었는데 이 춤은 좀 쉬워 보였다.

‘강강술래 같은 건가 봐. 이 정도로 단순하면 나도 할 수 있겠어.’

그렇지만 몸치가 괜히 몸치가 아닌 것.

막상 춤이 시작되자 레아는 삐걱대기 시작했다.

‘으아? 으아아?’

세 발짝 오른쪽으로 가서 손 놓고 왼발 들어 올리고, 다시 손잡고 왼쪽으로 세 발짝 가서 손 놓고 오른발 들어 올리고.

춤은 단순 그 자체였지만 그녀에겐 너무 고난도였다.

‘발이 꼬여!’

레아의 눈이 팽팽 돌아갔다.

“레아, 박자는 신경 쓰지 마라.”

“나 지금 그것까지 신경 못 쓰고 있는데!”

헬릭스는 춤이 진행될수록 혼이 나가는 레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이끌었지만, 그녀는 그가 손만 놓으면 다시 ‘외, 왼쪽? 오른쪽?’ 하면서 혼란에 빠졌다.

레아의 오른쪽에 선 촌장 아들도 함께 패닉 상태였다.

하늘 같은 공녀는 갈팡질팡하지, 그녀 왼쪽에 서서 얼음장 같은 시선으로 이쪽을 노려보는 헬릭스의 시선도 숨 막히게 무서웠다.

‘어, 어쩌지? 손을 잡아 드려도 되나?’

손을 꽉 잡았다간 헬릭스가 노려봐서 죽일 것 같았다. 그가 망설이는 사이 레아는 결국 삐끗하며 옆으로 휙 넘어갔다.

“공녀님……!”

순간 헬릭스가 번개같이 그녀의 허리를 낚아챘다.

“공녀님, 역시 아직 몸이 안 좋으신 게로군요.”

레아는 저를 잡은 채 갑자기 들으란 듯 큰 소리로 말하는 헬릭스의 목소리에 눈을 깜박였다. 그녀가 얼른 정신을 차렸다.

‘지금 내 체면 지켜 주려는 거구나!’

이 세심한 남자 같으니. 레아는 새삼 감동하며 그의 장단에 맞춰 고개를 픽 떨궜다. 헬릭스가 말했다.

“쉬셔야겠습니다.”

“제,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촌장 아들이 저희 집으로 모시겠다며 나섰지만, 헬릭스는 고개를 슬쩍 젓고는 레아를 부축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안아 올리고 싶었지만 그녀의 평판을 생각해 참았다.

“저어…….”

막 빠지려는데 아가씨 하나가 그를 불렀다.

“이따 저녁때에 여기로 다시 오실래요? 그때는 다른 춤을 추는데.”

다른 아가씨들도 거들었다.

“꼭 와 주세요. 저녁때는 남자 여자 한 쌍씩 추거든요.”

“지금처럼 정신없지 않으실 거예요.”

헬릭스가 대답 없이 레아를 데리고 뒤로 물러나는데, 그중 한 아가씨가 헬릭스의 팔을 잡았다. 마을 여자 중 루이지 다음으로 예쁘다는 처녀였다.

“저녁에 못 오시면 지금 저랑 한 번만 추고 가세요.”

처녀가 살포시 눈웃음을 쳤다.

레아는 순간적으로 표정 관리가 안 될 뻔했다.

‘눈 똑바로 떠! 손 떼!’

머릿속에서 포효하는 소리를 누르고 아픈 척하느라 그녀의 미간에 경련이 일었다. 다행히 헬릭스는 칼같이 거절했다.

“공녀님을 모셔야 한다.”

레아는 어쩐지 안심이 되어 몸에 힘이 죽 빠졌다. 부축하고 있던 헬릭스가 놀라 그녀를 살폈다.

“몸이 안 좋으십니까?”

“으응…….”

레아는 저도 모르게 더 아픈 척 신음을 흘렸다. 헬릭스가 얼른 그녀를 업고 일어섰다.

아쉬워하는 듯한 마을 처녀들의 목소리가 빠르게 멀어져 갔다.

“레아, 괜찮은가?”

“응.”

안 괜찮았다.

마음이 복잡하고, 화가 났다.

‘왜 화가 나지?’

마스터 때문에 헬릭스에게 화가 났을 땐 서운해서였다.

헬릭스가 나보다 마스터랑 더 친한 거 같고, 난 헬릭스한테 목숨이 걸려 있는데 헬릭스에게는 내가 생각보다 특별하지 않은 건가 싶어서 그랬다.

그런데 지금은 왜 헬릭스한테 춤 신청하는 게 화가 나는 걸까?

‘당연히 처음 보는 저 아가씨보다 내가 더 헬릭스보다 친하고, 헬릭스도 내가 우선인데…….’

그러니까 서운할 것도 없고 화날 일도 없는데,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 마을 처녀가 헬릭스의 팔을 잡던 것만 생각해도 울컥했다.

끙끙대는 그녀의 기색을 느끼고 그가 물었다.

“레아, 왜 그러나?”

“아무것도 아니야.”

대답하면서 헬릭스의 어깨에 두른 팔에 얼굴을 묻었다.

청량한 체향.

익숙해진 온기.

“발이 아프면 참지 말고 말해라.”

나직하고 조곤조곤한 목소리.

화나던 마음이 순식간에 가라앉다가, 헬릭스를 보며 사르르 웃던 마을 처녀들이 떠오르면 마음이 답답해졌다.

‘이렇게 업는 것도, 걱정하는 것도, 다 나한테만 해 줬으면 좋겠어.’

헬릭스는 뚜벅뚜벅 걸어 마을 공터가 내려다보이는 큰 단풍나무 아래에 이르렀다. 그가 나무둥치에 레아를 내려놓고 옆에 앉았다.

“여기선 축제를 한눈에 구경할 수 있을 거다.”

솨아아…….

바람이 불며 둘의 긴 머리를 날렸다.

빨갛게 물든 나뭇잎 사이로 가을 햇살이 쏟아져 헬릭스의 은발이 서리 맞은 갈대밭처럼 빛났다. 멍하니 보는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그가 미소 지었다.

‘이런 표정도 나한테만 지었으면 좋겠어.’

갑자기 딜런 경과 케일의 얼굴이 떠올랐다.

루이지를 향해 풀어진 얼굴로 미소 짓다가도 서로를 보는 순간 날을 세우던 표정. 상대가 내가 좋아하는 사람 가까이만 가도 불쾌해하며 질투하던 얼굴.

‘아.’

그녀가 숨을 들이켰다.

이거구나. 이거였구나.

‘나 헬릭스 좋아하나 봐.’

좋아해서 이렇게 신경 쓰이는 거였구나.

숨 쉬는 법을 까먹기라도 한 것처럼 새삼스레 숨 쉬기가 어려웠다. 심장이 크게 뛰어서 귀가 먹먹해져 왔다.

헬릭스가 옆에 있어야 살 수 있는데 좋아하기까지 하다니. 레아의 머릿속에 벼락이 쳤다.

‘잡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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