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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33)화 (33/120)
  • 33화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헬릭스가 입가를 가렸다. 왠지 표정 관리가 안 될 것 같았다.

    “공녀님한텐 수호자님이 목숨줄이나 마찬가지인데요.”

    이어지는 마스터의 말에 헬릭스의 입가가 꿈틀거리며 다시 굳었다.

    “……그렇지. 레아는 불안하겠군. 그 생각을 못 했다.”

    죄책감 어린 목소리에 마스터가 달래듯 말했다.

    “공녀님의 섭섭함을 풀어 주시면 어떨까요?”

    “어떻게 말인가?”

    “예를 들면…….”

    ❀ ❀ ❀

    드래곤로드 아즈라의 레어 깊숙한 곳에 있는 마법 도서관.

    레아는 다시 이곳을 방문했다. 헬릭스가 더블코어에 대한 책을 찾아 주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으으. 헬릭스 얼굴 마주치기 그래서 며칠째 도망 다녔는데.’

    그러잖아도 몇백 년 갇혀 있다 나와서 적응 중인 사람한테 옛날 사람이니 조상님이니 폭언을 하다니. 그때 자신이 한 짓만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리고 헬릭스 볼 낯이 없었다.

    그래서 피해 다녔는데 헬릭스가 ‘모처럼 더블코어가 됐는데 활용해야 하지 않겠나’라며 데려온 것이다.

    ‘맞는 말이라 피할 수가 없었어……!’

    부끄럽고 미안한 것과 별개로 그녀가 빨리 마법사로 성장해야 하는 건 맞았다.

    레아는 애써 헬릭스 쪽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하면서 고개를 들었다.

    고색창연한 책장들이 탑처럼 쌓여 있는 거대한 도서관이 그녀의 시야를 채웠다. 대단한 위용에 가슴이 두근거리면서도, 마법 엘리베이터가 떠올라 절로 긴장이 되었다.

    그때 훅, 청량한 향이 풍겼다.

    헬릭스가 레아 옆에 바짝 붙어 선 것이다. 그가 도서관을 향해 말했다.

    [더블코어.]

    긴장으로 차갑게 굳은 손에 그의 손가락이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퐁.

    마나가 손을 따뜻하게 데우는 것과 동시에, 도서관 앞의 공기가 일렁였다.

    “……어?”

    거대한 책의 탑을 빙 둘러 올라가며 빛의 경사로가 생겨나고 있었다.

    헬릭스가 손을 내밀었다.

    “올라가자.”

    “어? 어, 그래야지?”

    레아가 얼떨떨해하면서 제 앞의 손을 잡고 그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떼었다. 빛의 경사로는 둘이 끄트머리를 밟자마자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에스컬레이터?”

    혼자 중얼거리던 그녀가 고개를 홱 그에게로 돌렸다.

    “헬릭스, 이거 어떻게 한 거야? 저번에 왔을 때하고는 다른데?”

    “네가 놀라지 않도록 탑에 올라가는 설정을 바꾸었다.”

    레아의 눈이 커졌다.

    “레어 주인도 아닌데 그게 가능해?”

    “별것 아니다.”

    무뚝뚝하게 말한 헬릭스가 말을 보탰다.

    “나는 수호자가 아닌가. 사흘밖에 안 걸렸다.”

    ‘……사흘이나 이거 바꾸려고 애를 썼단 말이야?’

    미안함과 고마움에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말을 못 잇고 올려다보자 헬릭스가 긴장한 얼굴로 물어 왔다.

    “어떤가, 레아? 덜 무섭나? 탈 만한가?”

    “탈 만하다니 무슨 소리야?”

    레아가 그의 손을 꽉 잡았다.

    “진짜 멋지거든? 끝내주거든? 누가 이런 배려를 한 건지 너무너무 세심하고, 다정하고, 믿음직하거든?”

    “……그런 칭찬을 받을 만한 자인가?”

    “당연하지. 세상에 하나뿐인 내 계약자인데.”

    헬릭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신기했다.

    이렇게 세게 쥐면 부서질 것처럼 작고 하얀 손인데. 이 손의 주인은 어떻게 그를 말 한마디로 들었다 놨다 하는 것인지.

    그가 괜히 레아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레아, 나는 말주변이 없고 옛날 사람이라 너처럼 마음을 잘 전할 줄 모른다.”

    “아니 그건 내가 울컥해서…… 미안해.”

    “아니다. 옛날 사람인 건 맞지 않나. 그렇지만 알아 다오.”

    헬릭스가 말했다.

    “나는 지금, 네 옆에서도 살고 있다.”

    “…….”

    “그러니 불안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의 말에 레아가 손을 더 힘주어 잡는 게 느껴졌다. 약하고 필사적이면서 대담한 그녀의 성정이 모두 녹아 있는 움직임이었다.

    그게 사랑스럽고, 지키고 싶고, 돕고 싶었다.

    “내가 옆에 있지 않나. 레아 너는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거침없이 지내는 게 어울린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고 싶었다.

    믿지 않는다고 하고 싶었다.

    계약 끝나면 갈 거면서. 드래곤이 나타나면 복수하러 갈 거면서.

    그렇지만 그런 생각들은 헬릭스의 진중한 눈빛 앞에서 사라지고, 지금 이 순간 레아를 꽉 채운 건 저도 의식하지 못하는 기쁨이었다.

    “여기 있다, 더블코어에 대한 책.”

    헬릭스가 빛나는 책을 뽑아 들었다.

    레아가 받으려고 손을 내미는데 그가 잠시 주저했다.

    “뭔데 그래? 책 아니야?”

    책을 잡은 헬릭스의 손을 위로 끌어당긴 레아가 책을 휙 펼쳤다. 두꺼운 책 중간에 꽂혀 있는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보석처럼 여러 가지 색으로 투명하게 반짝이는 책갈피였다.

    “예쁘다. 뭘로 만든 거야? 크리스탈? 마나석?”

    “마음에 드나?”

    말과 달리 헬릭스는 약간 굳은 얼굴이었다.

    “이건 아즈라의 마나 조각이다.”

    “여기 주인이었던 드래곤로드 말이야? 너 가뒀다던 그 대형 도마뱀?”

    레아의 눈꼬리가 치켜올라 갔다.

    “네 드래곤 마나의 원래 주인인 자가 너를 또 겁박할 수도 있지 않나. 그래서 준비했지만…… 이 마나를 네게 줘도 되는지 모르겠다.”

    “왜? 드래곤로드 거면 엄청 센 마나일 거 아니야.”

    “원수인 아즈라의 마나를 네게 주는 게 싫어서 그런다. 그렇지만 당장 구할 수 있는 다른 드래곤 마나가 이것밖에 없으니…….”

    말을 흐리던 그가 약한 한숨을 쉬었다.

    “레아 네게는 제일 귀하고 안전한 것을 주고 싶었는데 말이다.”

    무뚝뚝한 얼굴로 한숨을 쉬는 커다란 남자가 귀여워 보였다. 레아가 웃음을 빼물며 잡은 손을 흔들었다.

    “누가 헬릭스한테 말 못한대?”

    회색 눈이 그녀에게 집중하며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레아는 눈을 맞추며 웃었다.

    “이렇게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서 예쁜 말만 하는데.”

    “칭찬인가?”

    “칭찬이지.”

    헬릭스는 안심한 듯 마주 미소 지었다.

    “기분이 풀렸나?”

    “어떻게 안 풀려?”

    레아가 콧등을 찡그렸다. 장난스러운 미소가 얼굴 가득 번졌다.

    “나 다른 마법책도 찾아 줘. 헬릭스랑 같이 볼래.”

    “물론이다.”

    ❀ ❀ ❀

    팔랑팔랑.

    레아는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책갈피를 흔들었다.

    이리저리 움직일 때마다 다른 빛으로 빛나는 게 무척 예뻤다.

    “공녀님, 그건 뭔가요?”

    그녀의 다리를 마사지해 주던 자넷이 물었다.

    “헬릭스가 준 건데, 예쁘지?”

    “예쁘긴 한데 좀 무서워요.”

    레아가 빙긋 웃었다.

    “자넷 감이 좋구나. 마법 배워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어휴, 아니에요.”

    자넷이 손사래를 쳤다.

    “공녀님은 불꽃도 쏘고 그러시잖아요. 전 겁나서 공녀님처럼 못 해요.”

    “화염마법 말고 다른 마법도 있을 텐데.”

    “전 그냥 공녀님이 마법 쓰고 오시면 그 얘기 듣는 게 더 좋아요.”

    “자넷한테 들려주게 활약 좀 해야겠네.”

    그럼 더블코어 활용도 더 제대로 해야겠지. 레아는 책갈피의 모서리로 입술을 쿡쿡 누르면서 생각에 잠겼다.

    더블코어에 대한 마법서.

    책에서는 인간들 중 두 개의 마나 코어를 가졌던 이들이 얼마나 훌륭한 대마법사가 되었는지, 드래곤조차 넘어선 그들의 마법이 얼마나 고강했는지 한참 설명해 댔다.

    흥미진진하게 읽고 있었더니 무서운 부분도 나왔다.

    ‘더블코어…… 확실히 양날의 검이긴 했어.’

    전생 식으로 치면 연비 엄청 떨어지는 최강 엔진이라고 할까?

    엄청난 출력을 내는 대신 마나가 빨리 닳아서, 늘 마나 공급에 신경을 써야 한다고 했다.

    마나가 부족한 곳에서는 마법의 효율이 무척 떨어지고, 최악의 경우 과열된 마나 코어끼리 마나를 두고 경쟁하다 깨져서 마법사가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다고.

    ‘으으, 무서워라.’

    건강하게 오래 살려고 마법사가 됐는데 그렇게 끔찍하게 죽을 순 없었다.

    ‘헬릭스 옆에 꼭 붙어 있어야 되나 봐. 그때 그냥 계약을 확 종속으로 해 버렸어야 했는데!’

    악덕 사장 같은 생각을 하며 책갈피를 손에 쥔 채 이리저리 궁리하는 레아에게 자넷이 말을 걸었다.

    “공녀님 마법 생각하시나 봐요. 만날 바쁘셔서 어째요.”

    “뭘. 자넷이 뭉친 근육도 풀어 주고, 할 만해.”

    “그래도 조금 더 쉬어 가며 하세요. 공녀님 북부에 오신 뒤엔 마법 수련하시느라고 여기 구경도 많이 못 해 보셨죠?”

    “듣고 보니 그러네.”

    드래곤 레어와 헬 산맥과 별장만 오가는 생활이었다.

    ‘뭔가 직장, 학원, 집 루트 같다. 전생에도 그렇게 살았는데, 이게 뭐람.’

    어쩔 수 없지만 씁쓸해지는 그녀였다.

    ‘이번 생에서는 입에 물린 금수저 휘두르면서 잘살아 보려고 건강을 부르짖은 건데!’

    정작 건강 되찾으면서 마법 배우고, 몬스터 처치하고, 애들 구하느라, 그냥 편하게 관광한 적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요 공녀님.”

    자넷이 조심스레 얘기를 꺼냈다. 자기네 고향 마을에서 매년 수확이 끝나면 조촐하게 먹고 마시는 축제를 한다고.

    “축제?”

    “예. 공녀님 보실 만큼 크고 화려한 건 아닌데, 그래도 꽤 흥겨워요. 공녀님도 바람 좀 쐬셔야죠. 헬릭스 님과 놀러 오세요.”

    “내가 가면 오히려 축제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아유, 방해는요! 다들 공녀님 같은 분이랑 축제를 같이 즐겼다고 나중에 손주한테까지 자랑할걸요. 언니도 좋아할 거예요.”

    레아는 솔깃했다.

    ‘헬릭스와 마을 축제라니, 재밌을 거 같은데.’

    루이지의 약초밭도 확인하고 싶고, 딜런 경이 호위 업무에 적응 잘하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그럼 확인할 겸 한번 갈까?”

    ❀ ❀ ❀

    “공녀님! 헬릭스 님! 같이 오셨군요!”

    루이지는 환하게 웃으며 뛰어나와 둘을 맞았다. 그새 더 통통해진 아기 조도 문간을 잡고 방긋방긋 웃으며 환영했다.

    “누야!”

    “조, 공녀님께 그렇게 버릇없이 굴면 못써.”

    “이픈 누야!”

    꿋꿋한 조의 환영 때문에 난감해하는 루이지에게 레아가 손을 저었다.

    “괜찮아. 아기가 사회생활 잘해서 나중에 크게 되겠어.”

    “레아, 네가 예쁜 건 사실이니 예쁜 누나라고 하는 게 사회생활 잘하는 건 아니지 않나.”

    헬릭스의 진지한 지적에 레아가 푸하 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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