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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32)화 (32/120)
  • 32화

    레아는 민망해하며 몸서리를 쳤다.

    주치의 이 양반, 꼬장꼬장한 의사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제 전생 한국에 갖다 놔도 사내 아부 일등상을 탈 인재였다.

    ‘아부 용비어천가라는 게 이런 거구나!’

    아무튼 그 효과 때문인지 아이들은 레아에게서 떨어지려고 하질 않았다. 그녀는 좋으면서도 곤란해했다.

    “나 애들하고 어떻게 노는지 모르는데.”

    “공녀님, 이참에 화염마법을 보여 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파이어볼! 파이어볼 보고 싶어요!”

    적절한 응원에 레아의 기가 살아났다.

    “훗. 그 정도는 어렵지 않지.”

    “와아아!”

    “인기가 좋으시군요.”

    함께 간 마스터가 그 모습을 지켜보다 고개를 돌렸다.

    옆에 있는 헬릭스는 미동도 없이 서서, 아이들과 어울린 레아를 보고 있었다.

    “수호자님, 혹시 저분이 드래곤의 성녀란 생각은 안 해 보셨습니까?”

    “…….”

    “여러모로 정황이 그렇습니다. 몇백 년 만에 최초로 마법사가 된 것도 수상하고요.”

    “정황이라.”

    “예. 지금 세계의 마나량에서 마법사가 나오다니…….”

    솔직히 확률상 기적에 가까웠다.

    멸종된 지 오래라는 드래곤 마나를 먹고, 하필 그걸 먹었을 때 마나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수호자가 발견했고, 또 몸이 너무 약해서 마나가 혈맥에 퍼지질 못하는 바람에 마나의 길을 뚫을 수 있었다.

    그 모든 우연이 기적처럼 겹쳐서 레아가 마법사가 되었으니까.

    “과연 우연일까요?”

    마스터가 지적했다.

    “드래곤로드 아즈라가 약초사로 꾸미고, 속여서 수호자님께 인도했다면서요. 그녀가 수호자님을 깨우고 마법사가 된 일 모두가 아즈라의 계략일 수도 있습니다.”

    헬릭스는 고개를 저었다.

    “드래곤의 성녀였다면 드래곤 마나를 먹고 죽을 뻔하지 않았을 거다.”

    마스터가 멈칫했다.

    맞는 말이었다. 드래곤의 성녀가 드래곤 마나를 못 받아들일 리가 없으니까.

    “그리고 느낌도…….”

    “느낌 말입니까?”

    “의심스럽거나 꺼림칙한 느낌이 전혀 없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를 쳐다보는 레아의 푸른 눈을 바라보면, 약간의 못 미더움도 의심도 혀 위에 올려놓은 설탕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스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호자의 느낌이라면 믿을 만했다.

    “……그럼 저도 의심을 거두지요. 피어트 공녀가 수호자님의 우군이라 생각하고 움직이겠습니다.”

    마스터가 말을 덧붙였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두 분이 수도로 오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수도? 페이런의 수도 말인가?”

    “예.”

    그가 레아 쪽과 아이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공녀님은 더블코어의 마법사가 되셨고, 저 아이들도 마법능력자나 마법사로 자랄 게 아닙니까. 마법 병기를 만들려던 놈들도 있으니…… 분명히 위협의 손길이 뻗어 오겠지요.”

    “트로우 백작 같은 놈들 말인가?”

    “그 뒤에 누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럴 겁니다. 드래곤이 멸종하지 않았다면 드래곤도 그러지 않겠습니까?”

    헬릭스는 침묵했다. 마스터가 조심스레 설득했다.

    “저희 암흑길드는 페이런의 정보에 빠삭합니다. 공녀님의 가문인 피어트 공작가도 수도에서 못 할 일이 없고요.”

    “…….”

    “수도로 오시면 힘을 합쳐, 빨리 드래곤을 조사하고 수호자님의 힘도 되찾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 ❀ ❀

    레아는 요즘 입맛이 없었다.

    “세상에, 푸딩을 남기시다니요?”

    자넷이 놀라 걱정스레 물었다.

    “공녀님, 무슨 근심 있으세요? 몸이 아직 안 좋으신가요?”

    “그냥 잘 안 먹혀서 그래.”

    “그렇지만…… 공녀님은 푸딩이라면 산삼푸딩도 드시는 분이잖아요!”

    그 맛이 떠올랐는지 자넷은 제 입으로 말해 놓고 진저리를 쳤다.

    “자넷 네가 아직 꽃띠…… 아니 어려서 그 맛을 몰라. 건강해지는 맛이라고.”

    “공녀님도 이제 열아홉 살이시거든요?”

    “신체나이는 여든둘이거든?”

    어이가 없는지 자넷이 입을 뻐끔댔다.

    “할매 입맛에 산삼푸딩이 얼마나 맛있게요. 헬릭스도 꿀 듬뿍 얹어서 먹으면 더 맛있다고…….”

    신나서 말하던 레아가 갑자기 침울해졌다.

    헬릭스.

    ‘그분의 심장은 밖에 있지요.’

    마스터의 말이 떠올랐다. 헬릭스에 대해 잘 안다고 확신하는 말투였다.

    ‘보통 사람은 자신의 감정에 따라 살아가지만, 수호자님은 아니지요. 그분의 심장은 감정이 아니라 사명이니까요. 공정, 정의, 보호…… 그런 것들 말입니다.’

    ‘그분이 내리는 철퇴는 친구도 제자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정에 이끌려 사명을 저버릴 분이 아닙니다.’

    마스터가 했던 말들이 생각나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나도 안다고 말했지만, 진짜 아는 걸까?’

    헬릭스가 아주 가끔 툭 던지던 과거를 진짜 옛날이야기 듣는 것처럼 들어 온 게 아닐까?

    ‘헬릭스와 가장 가까운 건 나라고 생각했는데.’

    마스터는 수호자로 활약하던 헬릭스를 오래 본 것처럼 얘기하는데, 자신은 고작 꿀 얹은 산삼푸딩 이야기나 하고 있었다.

    묘하게 가라앉은 기분은 헬릭스와 헬 산을 한 바퀴 돌 때에도 이어졌다.

    “레아, 왜 이렇게 기운이 없나.”

    시들시들한 레아에게 헬릭스가 걱정스레 물었다.

    “저 원래 연약하고 기운 없는 사람이거든요.”

    “아니다. 연약하긴 하지만 늘 생기 넘치지 않나.”

    “아니거든? 헬릭스가 잘못 알고 있는 거거든?”

    톡 쏘아붙였지만 그는 빙긋이 웃었다.

    “이제 내가 아는 레아 같다.”

    레아는 미소 짓는 헬릭스를 빤히 올려다봤다.

    너는 나를 안다고 말하는데, 나는 왜 너에 대해 아는 게 없는 거 같지.

    “……마스터 말이야.”

    “아, 케론 말인가.”

    친숙하게 부르는 이름에 레아가 잠시 멈칫했다.

    “친했어?”

    “글쎄. 오래 알고 지내긴 했다.”

    헬릭스의 눈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 시절엔 수호자로 활동하면서 그와 친하게 지내긴 위험했지.”

    “아. 앙심 품은 드래곤들이 해코지할까 봐?”

    “드래곤들만 아니라 마법사들 중에도 있었다. 왕과 영주 중에도…….”

    아니 우리 우직한 치트키가 뭘 잘못했다고 다들 물어뜯지 못해서 안달이었대? 레아가 눈을 사납게 떴다.

    “솔직히 지들이 잘못해 놓고 헬릭스 탓하던 거 아니야?”

    “아닐 수도 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듣기만 해도 딱 각이 나오는구먼!”

    헬릭스가 회색 눈을 크게 뜨며 레아를 내려다보다, 조금 딱딱하게 말했다.

    “……레아 너는 날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 같다.”

    회한이 느껴지는, 먼 곳에 있는 목소리였다.

    의무와 원한을 짊어지고 살던 사람 특유의 지치고 허망한 목소리.

    레아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헬릭스가 수호자로서 치열하게 활동하던 과거를 그녀는 모르니까. 보지 못했으니까.

    “……마스터는 언제부터 알고 지냈어?”

    “확실히는 모른다. 갇혀 있던 세월까지 합쳐도 천 년은 안 되었겠지.”

    단위가 뭐 이래?

    레아는 새삼 헬릭스와 거리감을 느꼈다. 어쩐지 마스터한테 진 기분도 들었다.

    ‘알아 온 세월의 단위가 다르잖아!’

    불공평해.

    그녀는 생각했다.

    ‘나는 헬릭스 없으면 죽는데.’

    헬릭스는 아니었다.

    그래도 자기랑 계약도 하고 특별한 사이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제대로 아는 것도 없었다.

    ‘그에 비해 마스터는…….’

    헬릭스와 묘하게 닮은 분위기를 풍기는 마스터.

    그는 레아가 상상도 못 하는 오랜 세월 동안 헬릭스와 알고 지냈다고 했다.

    ‘그러니까 헬릭스에 대해 아는 것도 많은 게 당연하겠지. 당연한데…….’

    레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당연한데 왜 이렇게 섭섭한 걸까.

    “……그럼, 헬릭스는 아무래도 마스터와 있는 게 편하겠네? 통하는 얘기도 많을 테니까.”

    “아무래도 그렇다.”

    헬릭스가 긍정했다.

    “지금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옛 시대를 기억하는 사람이니까.”

    “……거 요즘 사람이라서 미안하게 됐네.”

    날 선 목소리에 헬릭스가 흠칫했다.

    “레, 레아? 왜 그러나?”

    “왜 이러는지 모르겠지! 옛날 사람이니까!”

    앞뒤가 안 맞는 날카로운 말이 막 튀어 나가는데 막을 수가 없었다. 이게 아닌데 싶었지만 엎질러진 말을 들은 헬릭스는 이미 망연한 얼굴이었다.

    ‘아, 진짜! 나 왜 이래, 진짜!’

    그 와중에 속마음과 달리 말이 마구 터져 나왔다. 레아가 소리치며 도망쳤다.

    “조상님은 가서 옛날 친구하고나 노셔!”

    ❀ ❀ ❀

    “……도대체 레아가 갑자기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하하.”

    마스터가 곤란한 웃음을 흘렸다.

    “그걸 상담하시러 오신 겁니까?”

    “아니다. 레아가 자네하고 놀라고 했으니까 온 거다.”

    그 와중에 착실하게 레아 말대로 옛날 친구를 만나러 온 헬릭스였다.

    마스터가 이마를 짚었다.

    “수호자님은 참 여전하시다고 할지, 한결같으시다고 해야 할지…….”

    “보통 나에게 그런 말을 할 때는 답답하다, 요령 없다, 그런 뜻이던데.”

    “……이럴 때는 왜 눈치가 빠르고 그러십니까?”

    헬릭스는 씁쓸한 얼굴을 했다.

    “제대로 눈치가 있었다면 레아가 저러지 않았겠지.”

    살다 살다 처량 맞아진 수호자를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속으로 한숨을 삼킨 마스터가 입을 열었다.

    “공녀님이 섭섭하신가 봅니다.”

    “섭섭하다고?”

    “예.”

    “나한테 화가 난 게 아닌가?”

    “그러니까 화가 난 건 맞는데…… 수호자님이 잘못했다거나 싫어서라기보단, 서운한 감정이 폭발하신 거겠죠.”

    헬릭스는 마스터의 말을 곰곰이 곱씹었다.

    “내가 레아를 서운하게 했군.”

    모르는 사람이 듣기엔 무감정하고 차가운 목소리였지만, 오랜 세월 그를 봐 왔던 마스터는 속으로 놀랐다.

    ‘저런 목소리는 옛날에 미친 마법사 왕 때문에 왕국 하나 엎으셨을 때에나 내셨던 건데?’

    당황한 마스터에게 헬릭스가 물었다.

    “레아가 왜 섭섭해했을까?”

    “……모르십니까?”

    “알면 묻고 있겠나.”

    하긴 오래 살며 나름 인간심리에 정통한 헬릭스였지만 그가 잘 아는 심리 분야는 정해져 있었다.

    악당들의 마음이라거나, 권력자들의 속마음, 피해자의 마음 같은 것들. 그야말로 수호자의 업무에 관련된 분야뿐이었다.

    마스터는 어쩐지 한숨이 나왔다.

    “저 때문에 질투가 나고 섭섭하신 거겠지요.”

    “레아가? 자네를? 왜?”

    그 반응에 이번엔 마스터가 섭섭해질 지경이었다. 그는 한숨을 꾹 누르고 설명했다.

    “들어 보니 공녀님은 수호자님과 계약도 맺고 친근하게 지내시지 않았습니까? 수호자님과 제일 가깝다고 생각하셨을 텐데.”

    “그랬지.”

    “그런데 갑자기 옛날 지인이라면서 제가 나타나 공녀님은 모르는 과거 얘기를 하고 있으니…… 공녀님 입장에선 수호자님과 제가 더 친한 거 같고, 질투가 나고 섭섭할 만하지요.”

    “그러니까 자네 말은, 레아가 나와 가장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질투하고 서운해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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