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역시 더포드 남작이 훔쳐 간 비약을 페이릴리에게 몰래 먹인 게 분명했다.
이번 암살자도 페이릴리에게 보낸 것일 테고.
‘그대로 죽어 버렸으면 좋았을 것을. 명도 질긴 것 같으니.’
트로우 경이 아쉬움에 입술을 핥았다.
‘아직 일이 크게 틀어진 건 아니야.’
서두를 건 없었다.
예상 밖의 일이지만 오히려 기회일 수 있었다.
더포드 남작은 범인이 자신인 게 들통날까 두려워 암살자까지 고용했지 않은가.
남작이 왜 암살자를 고용했겠는가?
레아만 죽이면 자신이 비약을 먹인 일을 묻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리라.
‘피어트 공작가에서 남작을 의심하지 않고 즉각적인 반응도 안 보이니, 레아 피어트가 왕실과의 관계를 생각해 입 다물었다고 여기는 거야.’
그렇지만 암살은 실패했다.
한 번 실패하면 두려움은 더 커지는 법.
남작은 더욱 적극적으로 레아 피어트를 죽이려 들 터였다.
‘피어트 공작가에서 눈이 벌게져서 범인을 색출하려 애쓴다지만, 왕실 일원인 더포드 남작까진 건드리지 못하겠지.’
트로우와의 연관을 불어도 발 뺄 구멍이 있었다.
이쪽에선 사랑의 묘약이랍시고 비약을 준 일도, 암살을 사주한 일도 없었으니까.
그저 이런저런 일을 처리하는 길드를 소개해 줬을 뿐!
비약을 훔쳐 간 것도 암살을 직접 의뢰한 것도 남작이니, 칼로시 대공은 일을 덮으려 할 터였다.
여러모로 더포드 남작은 쓸 만한 트러블메이커였다.
트로우 경은 남작을 살살 달랬다.
“크게 염려치 마십시오. 감히 왕실 인사를 의심하는 이가 있겠습니까?”
“그, 그렇겠지?”
❀ ❀ ❀
레아는 마스터와 둘만의 자리를 마련했다.
“피어트 공녀님을 뵙습니다.”
“아까 인사했으니 형식적인 인사는 됐고.”
그녀가 마스터의 눈을 마주쳤다.
“암흑길드에 의뢰를 하고 싶어서 불렀어.”
“의뢰 말씀입니까?”
“응. 별거 아니긴 한데.”
의뢰 자체는 별것 아니었다. 길드의 신용이 달려 있어서 그렇지.
마른 입술을 축인 레아가 입을 떼었다.
“트로우 백작이 관련된 의뢰는 내 쪽에도 알려 줘.”
“그러니까, 저희 길드에 들어온 트로우 백작의 의뢰를 공녀님께 알려 달라는 말씀이군요.”
“가능할까?”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고객의 내부정보를 알려 주는 게 쉽진 않겠지만, 보상은 넉넉히 할게.”
마스터는 약간 놀란 기색을 감추며 레아를 쳐다봤다.
귀족들은 제 손을 더럽히기 싫어 암흑길드의 손을 빌리면서도 늘 고압적으로 명령하려 굴었다. 그런데 이 아가씨는 거래를 제안하고 있지 않은가.
‘수호자님이 왜 이분을 계약자로 삼았는지 알겠군.’
마스터가 빙글 웃음을 띠었다.
“알겠습니다. 해 드리지요.”
“정말?”
기대하고 있진 않았는지, 그녀의 얼굴이 눈에 띄게 환해졌다. 그 모습에 마스터도 기분이 좋아졌다.
‘트로우 백작이 큰 고객이긴 해도, 피어트 공작가를 적으로 돌릴 만큼은 아니지.’
솔직히 이번에도 피어트 공작가가 마음만 먹었다면 암흑길드 정도는 무 뽑히듯 뽑혀 나갔을 터였다. 길드에 몸담고 있던 하프엘프들도 다시 뿔뿔이 흩어졌을 거고, 트로우 백작은 돕기는커녕 제 흔적을 지우기 위해 길드 건물에 불이라도 지를 놈이었다.
게다가 그런 한결같은 일처리와 냉혹함으로 인해 벼르고 있는 적도 많았다.
‘트로우 백작은 끝까지 같이 갈 상대는 아니야.’
냉정하게 판단하는 마스터에게 레아가 물었다.
“그럼 값은 얼마 정도 치르면 될까?”
“공녀님껜 공짜입니다.”
뜻밖의 말에 레아가 눈을 깜박였다.
“……언제까지?”
“글쎄요, 수호자님과의 계약이 끝나실 때까지?”
마스터가 빙글 웃으며 앉은 채로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수호자님에 대해서는 안 물어보십니까?”
순간 레아의 눈동자가 흔들렸지만, 곧 새침하게 대꾸했다.
“필요한 건 헬릭스가 말해 주겠지.”
“그건 그렇겠지만 말입니다.”
긍정하며 자리에서 일어선 마스터가 입을 떼었다.
“그분은 확실히 믿을 만한 분이지만.”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너무 믿지는 마십시오.”
“…….”
“제가 옛날에 듣던 엘프 속담에는, 심장이 밖에 있는 자는 신도 악마도 될 수 있다 했습니다.”
헬릭스 심장은 가슴에 잘 있는데?
쿵쿵 뛰던 박동을 떠올리자 왜인지 제 심장도 빨라졌다. 그렇지만 지금 마스터가 말하고자 하는 건 그게 아닐 터였다.
“심장이 밖에 있는 자는 신도 악마도 될 수 있다고……?”
“예. 그분의 심장은 밖에 있지요.”
마스터가 단언했다.
“보통 사람은 자신의 감정에 따라 살아가지만, 수호자님은 아니지요. 그분의 심장은 감정이 아니라 사명이니까요. 공정, 정의, 보호…… 그런 것들 말입니다.”
“…….”
“그분이 내리는 철퇴는 친구도, 제자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정에 이끌려 사명을 저버릴 분이 아닙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어.”
“그러시다면 다행입니다만.”
마스터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레아 앞에서 물러났다.
❀ ❀ ❀
레아의 방에서 나온 마스터는 바로 헬릭스와 마주쳤다.
수백 년 만에 보는 수호자는 혼자 세월을 비켜 간 모습이었다. 여전히 모든 것에 거리를 둔 냉정한 눈으로, 무표정하게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스터가 탄식했다.
“정말 하나도 안 변하셨군요.”
“너도 그대로가 아닌가.”
마스터는 쓰게 웃었다. 늙지 않아도, 고생한 세월은 표정과 눈빛에 상흔을 남겼다. 그가 말을 돌렸다.
“몇백 년 만에 다시 세상에 나오신 소감이 어떻습니까?”
“음…….”
헬릭스가 눈앞의 하프엘프를 쳐다봤다.
“케론 자네가 암흑길드를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게다가 마스터라니…….”
“엘프들이 이 대륙을 떠났잖습니까? 하프엘프들은 정말 소수라서, 오랫동안 인간사회에서 살아가려니 쉽지 않았습니다.”
처음엔 하프엘프들도 더 뛰어난 신체능력과 수명을 이용해 작은 왕국이나 영지를 운영하려고도 해 봤다.
그렇지만 워낙 소수였고, 멸망의 날 이후 혼돈에 빠진 세상은 기아와 전쟁이 계속되어 하프엘프들의 땅을 노리는 이들도 많아졌다. 할 수 없이 인간세상에 섞여 살기를 선택한 하프엘프들은 정체를 숨긴 채 먹고 살기 위해 개고생을 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암흑길드를 이끌게 됐지 뭡니까. 사람 해치는 일은 몇백 년 동안 늘 수요가 있더라고요. 정체를 감추고 신분 세탁하기도 좋고 말입니다.”
“…….”
헬릭스는 뭐라 말해야 할지 애매한 얼굴이 되어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에 마스터는 속으로 놀랐다.
‘달라지셨다?’
그가 알던 수호자라면 ‘사람 해치는 일을 수요라 말해선 아니 된다. 그걸 업으로 삼는 것은 더 악한 일이고’ 하고 서릿발처럼 말했을 텐데. 마스터는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아무 말씀 안 하십니까?”
“……자신이 겪은 상황이 아니면 함부로 왈가왈부하는 게 아니라고 하더군.”
“……누가 말입니까?”
물어 놓고도 마스터는 대답을 알 것 같았다.
“레아가.”
드래곤로드 아즈라가 헬릭스를 깨우게 보냈다던 그 아가씨 말인가.
“확실히 묘한 아가씨이긴 하더군요.”
헬릭스의 기색을 살핀 마스터가 말을 돌렸다.
“수호자님은 앞으로 어쩌실 생각입니까?”
“봉인 이후 약해진 힘을 되찾고, 드래곤들의 멸종을 조사할 생각이다.”
“그러면…… 혹시 성녀는 찾으셨습니까?”
“드래곤의 성녀 말인가.”
헬릭스가 고개를 저었다. 마스터가 속삭였다.
“죽이실 겁니까?‘
“죽여야지.”
단호한 말에 마스터가 침을 삼켰다.
‘……달라지셨다고 느낀 건 내 착각이었군.’
얼어붙은 눈빛과 차가운 목소리엔 한 톨의 자비도 망설임도 없었다. 그가 알던 수호자 그대로였다.
얼음칼 같은 능력을 휘두르며 미친 드래곤들과 대마법사들을 처단하던, 바로 그 수호자.
마스터는 오랜만에 느끼는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 ❀ ❀
오켄 제국 뱀 기사단의 단장도 떨고 있었다.
부하가 가져온 손바닥만 한 서신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찾은 거겠지?”
그가 두려워하며 중얼거렸다.
제 실질적인 주군이나 마찬가지인 아르카이크 오켄 황자는 얼마 전 기이한 명령을 내렸다.
‘헬 산맥 근처에서 죽다 살아난 금발의 귀족 여자를 찾아내라.’
황자는 꿈에서 저를 내쫓은 마법사를 찾을 셈이었다.
멀리 있어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긴 금발에 고급 옷감으로 지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라면 귀족일 터였다. 마나 서클이 위험했다는 건 마법사의 목숨도 위험했다는 뜻이고.
그래서 그가 가진 단서들을 추려 낸 게 저 조합이었다.
헬 산맥 근처에서 죽다 살아난 금발의 귀족 여자.
찾아야 하는 부하들 입장에선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였지만 해야만 했다.
아르카이크 황자는 불복종도 자비도 모르는 주군이었으니까.
“후우.”
심호흡을 하며 뱀 기사단장이 서신을 열었다. 그가 놀라 입을 벌렸다.
“황자님…… 찾았습니다.”
❀ ❀ ❀
레아는 몸이 확실히 나았다고 판단되자 마법학교의 아이들을 보러 갔다.
아이들은 그사이 모두 깨어나 있었다.
“공녀님!”
“누나!”
“주인님!”
저를 향해 외치며 달려오는 아이들에게 웃어 보이던 그녀가 멈칫했다.
“……마지막에 뭔가 이상한 게 끼어 있던 거 같은데?”
카라이가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자, 잘못 들으신 게 아닐까요?”
레아는 모르는 척 넘어가 주기로 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카라이가 애쓴 덕에 아이들이 이렇게 건강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으니까.
“깨어 있을 때 날 봤던 건 필밖에 없을 텐데, 애들이 날 잘 따르네.”
“하하, 저희가 입이 닳도록 얘기했습니다.”
주치의가 사람 좋게 웃으며 무서운 말을 했다.
“어릴 때 세뇌시켜야죠.”
“……그거 농담인 건 아는데, 애들 상황 생각하면 좀 무서운 거 알지?”
“아이고, 당연히 농담이죠. 저희는 그냥 사실만 얘기했습니다. 공녀님이 얼마나 용감하게 혈혈단신 뛰어들어 노예상을 협박하셨고, 망설임 없이 내가 이 애들을 거두리라 살려 내라 하셨고, 그 노력에 너희들이 지금 이렇게…….”
“그만. 제발 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