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친구가 몇백 년도 더 산 하프엘프에 암흑길드 마스터라니, 예전 같으면 뭔 동화책 씹어 먹는 소리냐고 했을 텐데…….”
“대개의 인간분들은 저희 존재를 모르시지요.”
하프엘프 암흑길드 마스터가 빙긋 웃어 보였다.
마스터 케론은 오렌지색 단발머리에 쭉 뻗은 몸매의 중성적인 미인이었다. 늘씬한 몸의 선이나 도도하고 신비한 느낌의 눈빛이 어쩐지 헬릭스와 닮아 보였다.
레아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고 보니 헬릭스더러 옛 친구라고 했지?’
친구라기엔 좀 거리감이 있는 것 같지만.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마스터가 헬릭스에게 말을 걸었다.
“수호자님께서 살아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흐릿하나마 원망이 묻은 말투였다. 그에 헬릭스의 어깨도 잠시 흠칫했다.
“……나도 이렇게 세상에 풀려날 줄 몰랐다.”
“풀려났다면…… 그동안 갇혀 있었단 겁니까?”
마스터가 놀라 물었다. 헬릭스가 침묵으로 긍정했다.
“누가 감히 수호자를 가둔단 말입니까?”
“드래곤로드 아즈라.”
“그……!”
아니 지금 이 분위기 뭔데.
졸지에 자기 집에서 이방인이 된 느낌에 레아가 끼어들었다.
“저기, 오랜만에 만난 건 알겠는데, 둘만 그러지 말고 지금 상황을 설명 좀 해 주지?”
“그거 맞는 말씀이군요. 저도 설명이 간절합니다.”
“지금 여기서 제일 설명이 필요한 게 나다.”
레아와 마스터와 루얀이 동시에 헬릭스를 쳐다봤다.
헬릭스가 한숨을 쉬었다.
“……레아가 아즈라의 레어에 갇혀 있던 나를 깨운 데서부터 말하는 게 낫겠군.”
❀ ❀ ❀
간간이 레아의 추임새가 보태진 헬릭스의 설명이 끝나자, 마스터와 루얀은 심각해졌다.
“……그러니까 피어트 공녀님이 최근 두 번이나 독을 드신 거군요. 두 번째는 저희가 한 일이고.”
“의뢰인이 누군지 아나?”
“원칙적으론 모르는 일입니다만.”
그가 헬릭스와 레아를 쳐다봤다.
“수호자님을 구해 주신 분이시자 계약자이신데, 저희가 다른 편이 될 수는 없는 일이지요.”
마스터가 낮게 말했다.
“짐작하신 대로 트로우 백작입니다.”
순간 세 사람은 조용해졌다.
레아와 헬릭스는 너무 예상대로라 할 말이 없었고, 루얀은 열이 뻗쳐서 입이 벌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 이 쳐 죽일 영감탱이가……!”
“그렇지만 걸리는 것이 있군요.”
마스터는 벌떡 일어나려는 루얀을 진정시키며 말을 이었다.
“걸리는 것?”
“트로우 백작은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높은 분’의 대리로 의뢰한다는 걸 상당히 강조했습니다.”
“그야 자기들이 빠져나가려고 하는 수작이 아닌가?”
“아닐 겁니다. 트로우 백작은 저희 길드와 오래 거래한 사이라, 굳이 다른 이의 이름을 팔 필요가 없으니까요.”
마스터가 말했다.
“정말 대리의뢰를 한 것이거나, 소문을 내고 싶어 하는 걸 겁니다. 둘 다일 수도 있고요.”
“하긴.”
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긴 했어. 암살사건은 그렇다 쳐도, 쿠키 사건은 트로우 백작처럼 노련한 영감이 쓸 방식이 아니잖아. 날 해치는 데 드래곤 마나처럼 특수한 물질을 쓰면 쉽게 꼬리가 밟힐 텐데.”
“그럼 공녀님은 두 사건의 범인이 다르다고 보시는 겁니까?”
“아직 같은 놈들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는 거지. 아닐 수도 있잖아?”
헬릭스가 끼어들었다.
“처음에 드래곤 마나를 레아에게 먹인 자가 드래곤과 연결되어 있는지도 알아봐야 한다.”
“드래곤을 말입니까? 멸종된 지가 언젠데…….”
“나도 그 말을 믿고 레아가 먹은 드래곤 마나가 유물일 거라 생각했지.”
헬릭스가 말을 이었다.
“하나 이번에 독 때문에 레아의 마나 균형이 무너지자, 그녀 안의 드래곤 마나가 비정상적으로 날뛰었다. 마치 예전에 드래곤들이 제 마나로 만든 마법사들을 복종시키려던 것처럼 말이다.”
마스터의 표정도 진지해졌다.
“드래곤들이 할 법한 짓이죠. 독점욕이 어마무시한 놈들이니까요.”
“그렇다. 만약 생존한 드래곤의 마나가 레아에게 흘러든 거라면…… 위험한 일이다.”
레아가 침을 꼴깍 삼켰다.
“그…… 드래곤들은 살아 있어도 헬릭스가 복수할 거니까, 나중엔 괜찮아지지 않을까?”
“그동안 놈들이 레아 너를 괴롭힐 수 있지 않은가.”
헬릭스는 걱정스레 말했다.
“드래곤의 마나 덕분에 네가 마법사가 되었지만…… 솔직히 드래곤의 마나는 인간이 다룰 힘이 아니다. 초보 기수가 강력한 야생마의 고삐를 억지로 잡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지.”
그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 몸의 균형이 무너질 때마다 그 빈틈을 타고 드래곤의 마나가 날뛸 게 분명하다고. 레아를 제 마법사로 여기는 드래곤이 있다면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
“아니, 나 그렇게 몸의 균형이 잘 무너지지는 않는…….”
“무슨 말도 안 되는 거짓부렁인가.”
“…….”
할 말이 없었다.
마법사가 되면서 건강해진 거지, 원래 레아 피어트는 약체 중의 최약체, 심정지 직전의 개복치였으니까.
마나의 힘이 없어지면 그 건강상태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다.
‘절대 싫어!’
그녀의 굳은 얼굴을 보고 헬릭스가 낮게 말했다.
“걱정 마라. 내가 그렇게 두지 않을 것이다.”
새삼스레 코끝이 찡했다.
이번 암살사건으로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그의 수려한 얼굴은 좀 수척해져 있었다.
‘내가 아프거나 암살 위협받을 때마다 헬릭스가 또 이렇게 고생할 거 아니야.’
든든한 한편 미안했다.
‘헬릭스를 계속 이렇게 무리시키긴 싫어.’
레아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내 건강을 멸종했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드래곤 놈한테 저당 잡힐 수도 없고.’
유령이든 실물이든, 제 꿈에 나타나 말하는 꼬락서니나 헬릭스와 마스터가 말하는 양을 보니 얽히기 싫은 놈이었다.
‘어떻게 하면 될까? 방법이 있을 거 같은데…… 꿈에서도 그 기분 나쁜 놈이 그냥 간 걸 보면, 나한테도 뭔가……!’
그녀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헬릭스, 나 몸 상태 좀 봐 줘.”
“몸 상태 말인가?”
“응. 뭔가 달라졌을지도 몰라.”
헬릭스가 의아해하며 레아의 손목을 잡았다. 맥을 짚은 그가 중얼거렸다.
“……더블코어?”
❀ ❀ ❀
“더블코어?”
“마나 코어를 하나 더 만들었지 않나.”
레아가 눈을 깜박였다.
물론 자신이 꿈속에서 헬릭스의 마나를 받아 마나 코어를 다시 만들긴 했다.
‘단전 마나 코어가 함락되면 심장에 마나 코어를 만들면 되지!’
그렇지만 그게 꿈이 아니라 진짜였다니. 혹시나 싶었지만 현실이 되자 얼떨떨했다.
헬릭스가 말했다.
“게다가 단전에 있던 기존의 마나 코어도 다행히 깨지지 않았군.”
기쁨에 레아의 얼굴이 환해졌다.
옆에서 조마조마하게 듣고 있던 마스터가 말했다.
“그, 그럼 공녀님께선…… 마나 코어가 두 개가 되셨다는 겁니까?”
루얀도 숨을 들이켰다.
“그럼 두 배로 강하다는 거냐?”
레아가 헬릭스에게로 휙 고개를 돌렸다.
“헬릭스, 정말이야?”
“아까 말했잖나. 더블코어라고.”
“……그게 그 소리였다니.”
레아는 실감이 안 나서 머리를 흔들었다.
“죽다 살아나서 얻은 것도 있네.”
“이러다 최연소 대마법사가 되실지도 모릅니다. 마나 코어가 두 개라니, 마법의 역사에서도 몇 명 없던…….”
“좋은 것만은 아니다.”
헬릭스가 말을 잘랐다.
“워낙 희귀한 케이스고…… 더블코어는 마나도 두 배로 필요하다.”
지금처럼 마나가 마른 세상에서는 오히려 위험할 수도 있었다.
“음…… 연비 나쁜 슈퍼카 같은 거야? 그런데 지금은 석유가 부족한 상태인 거고?”
“……슈퍼카는 뭐고 연비는 뭔가?”
저도 모르게 속마음을 뱉었던 레아가 얼른 손을 저었다.
“암튼 강하고 멋지긴 하지만 마나 공급이 되어야 써먹는단 거네.”
“그렇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헬릭스를 쳐다보다 얼른 마음을 다잡았다.
헬릭스가 늘 옆에서 마나를 불어넣어 줄 순 없었다. 그는 수호자고, 드래곤에게 복수해야 한다는 목표도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헬릭스한테 마나를 맡겨 둔 것처럼 굴면 안 돼. 어디까지나 계약관계잖아.’
레아는 헬릭스를 향해 씩씩하게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일단 마나 공급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는 욕심 안 부리고 천천히 적응해 볼게.”
그녀의 말에 헬릭스는 잠시 침묵했다.
“……내가 도와줄 수도 있다.”
“그렇지만 헬릭스는 마나 공급 배터리 취급받는 거 싫어하잖아.”
싫어했다.
그런데 어째선지 그렇게 말하는 레아에게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
‘내가 마나를 주는 게 부담스러운 건가.’
공작가의 몸 약한 외동딸로 자라 부탁하고 부려 먹는 데 익숙한 것처럼 보이는 그녀였지만, 레아는 늘 선을 지켰다. 호의는 상대가 조금 부담스러워해도 밀어붙이지만 부탁은 상대가 딱 부담스러워하지 않을 만큼만 청하곤 했다.
‘그런 모습도 좋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자신에게까지 선을 긋는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가 불쑥 말했다.
“레아 너는 더 부탁해도 된다.”
“어?”
“내 계약자가 아닌가.”
“계약자니까 서로 더 조심해야지.”
그야말로 올바른 자세였지만 지금 헬릭스에게는 와닿지 않았다.
“우리 계약은 훨씬 더 특수하다. 전폭적인 지원을 서로 약속하지 않았나.”
“그, 그러긴 했지?”
“그렇다.”
그러니 내게 더 부탁해라.
그가 차마 뒷말은 덧붙이지 못하고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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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페이런 왕국의 수도.
돈을 바른 암살자의 소식이 끊어지자 더포드 남작은 파랗게 질렸다.
“실패했잖소!”
그가 트로우 경을 향해 버럭 화를 냈다.
“트로우 백작가에서 소개한 암살자라서 믿고 맡겼던 것인데!”
“그럴 리가 없는데…… 뒷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자라고 추천받은 아이입니다.”
“추천한 놈이 눈이 삐었나 보군. 어떻게 이런 의뢰를 실패할 수가 있나? 영식은 이 일을 책임져야 할 겁니다!”
더포드 남작이 씩씩댔다.
트로우 백작가의 장남, 얀 트로우가 그에게 말했다.
“송구하게 되었습니다. 어디로 보내셨는지 알려 주시면 제가 책임지고 다음 암살자를 보내도록 하지요.”
“아, 아니 그게.”
더포드 남작은 순간 당황해서 우물댔다.
“내, 내가 영식에게 그런 것까지 고해야 하겠소?”
“그렇지만 알려 주셔야 저희 쪽에서도 수습을…….”
“에잇, 되었소!”
남작의 모습에 트로우 경은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