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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29)화 (29/120)
  • 29화

    “헬릭스, 울어?”

    레아는 모를 것이다.

    카라이의 말에 달려와, 레아의 마나 폭주를 알게 된 그가 깨어나지 않는 그녀를 지켜보며 어떤 심정이었는지.

    봉인진에 갇혀 있을 때에도 이 정도로 절망적이진 않았다.

    레아의 자신만만한 표정.

    실수하거나 민망할 때 딴청 피우는 옆얼굴.

    잘생겼다고 칭찬하며 짓는 특유의 장난스러운 미소.

    단호하게 말할 때 그를 똑바로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

    그 모든 것이 사라지자.

    심장은 뛰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처럼 잠잠하기만 했다.

    산 채로 깊은 뻘에 처박힌 듯한 시간이었다.

    그걸 다시 느끼느니 이대로 레아를 지키다 죽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레아.”

    헬릭스의 섬세한 손가락이 레아의 손등을 쓸었다.

    확인하고 싶어 하는 듯 머뭇대는 동작에, 레아가 그의 손가락을 꽉 잡았다.

    “……다 죽일 거야?”

    “원한다면.”

    “원해.”

    레아의 눈이 파랗게 반짝였다.

    “그렇지만 다치지 말고 해. 할 수 있지?”

    레아의 말에 헬릭스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떠올랐다.

    그래.

    이게 레아지.

    심장이 뛰었다.

    그의 계약자, 레아 피어트.

    그가 속삭였다.

    “레아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무엇이든.”

    “그렇게 말하면 더 나쁜 짓도 시키고 싶어지는데.”

    “아닐 거 다 안다.”

    얼굴 가득 웃던 헬릭스가 첩자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수려한 얼굴이 순식간에 서늘해졌다.

    저벅.

    그가 레아의 곁에서 발을 떼었다.

    “윽.”

    어깨를 강하게 잡힌 카라이가 신음했다. 큰 손아귀에서 마나가 울컥 밀려들었다.

    “이 마나로, 레아를 지켜라.”

    “……예!”

    저벅.

    한 걸음 앞으로 나설 때마다.

    헬릭스를 중심으로 마나가 휘돌고, 방 안의 공기가 일렁이며 바뀌었다.

    첩자들이 동요했다.

    “뭐, 뭐야?”

    헬릭스가 입술을 끌어 올렸다.

    “내 계약자의 뜻대로.”

    그 순간.

    레아의 침실에서 마나가 폭주했다.

    ❀ ❀ ❀

    동쪽 오켄 제국의 황궁.

    호화로운 서재에 홀로 앉아, 커다란 창 가득 쏟아지는 볕을 받고 있던 흑발 남자가 눈을 떴다.

    “…….”

    녹인 황금처럼 선명한 금빛 눈동자가 서서히 검은색으로 변했다. 그가 주먹을 그러쥐었다.

    콰앙!

    흑발 남자가 책상을 내리쳤다.

    분노로 달아오른 손끝에서 단단한 마호가니 책상은 순식간에 재로 변했다. 불이 지펴질 필요조차 없는 극강의 화염마법이었다.

    “건방진……!”

    남자의 검은 눈동자에 황금빛 불꽃이 휙 떠올랐다 사라졌다.

    “감히 나를 제 꿈에서 쫓아내?”

    이런 어이없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제 마나로 만들어진 마법사의 정신에 간섭하는 건 그의 고유한 권리. 남자는 허락도 없이 제 마나를 가지고 마법사가 된 그 계집에게 경고를 할 요량이었다.

    그래서 마법사의 꿈에 침입했다.

    꿈에 나타나 힘의 차이를 과시하고, 그에 두려워하는 인간들을 복종시키는 건 숨 쉬듯이 쉬운 일이었다. 간혹 뻣뻣하게 구는 놈들도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아무리 꿈이라 해도 산 채로 불길에 휩싸인 뒤에 제정신인 놈은 없었으니까.

    미치거나, 죽거나, 제 발이라도 핥으려 들거나.

    그 계집도 마찬가지였다. 겁을 주면 복종하거나 미치리라 여겼다. 그러다 안 되면 죽어도 아무 상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굴복하지 않고 스스로 빠져나갈 줄이야.’

    기껏해야 제 마나를 조금 훔쳐 간 미물 주제에 마법의 주인처럼 굴던 태도라니. 게다가 진짜 마나의 주인인 그를 놔두고 꿈의 터전을 옮겨, 결국 남자를 꿈에서 내쫓기게 만들었다. 건방지기 짝이 없었다.

    ‘과자들이 병사로 등장하는 웃기는 꿈이나 꾸는 주제에…….’

    이를 갈던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믿는 게 있어서 그렇게 까부는 것인가?’

    마법사 계집에게서는 제 마나 말고도 다른 마나가 느껴졌다. 이질적이고 강력한, 헬 산맥에서 깨어난 기운과 흡사한 마나였다.

    알아볼 필요가 있겠군.

    남자가 슬쩍 고갯짓하자 은신해 있던 부하가 앞에 나타났다.

    “페이런 왕국에 조사할 대상이 생겼다. 준비하도록.”

    부하가 머리를 조아렸다.

    “명을 받듭니다, 황자님.”

    ❀ ❀ ❀

    레아는 첩자들이 퇴치된 뒤 꼬박 하루를 더 잤다.

    일어났을 땐 한밤중이었다. 어둠 속에서 눈을 깜박이자, 옆에서 조심스러운 기척과 함께 청량한 숲의 향이 났다.

    “……헬릭스?”

    “레아.”

    그가 안도하며 손을 잡았다. 그녀는 자연스레 꼭 맞잡으면서 물었다.

    “어떻게 됐어?”

    “잘 해결되고 있다.”

    마음이 놓였다. 레아가 얼른 일어나 앉았다.

    “범인들은? 오빠가 취조하고 있어?”

    “네가 나한테 죽이라고 하지 않았나.”

    “아.”

    아차. 그땐 죽이고 싶어서 그만.

    당황한 그녀에게 헬릭스가 말했다.

    “걱정 마라. 카라이가 놈들의 증거와 서신을 찾아내서 수사에는 전혀 문제가 없을 거다.”

    “다행이다. 카라이가 협조하니까 생각 못 한 이점이 있네.”

    “옆에 두고 보니 쓸 만한 놈인 것 같다. 레아 네게 단단히 감화된 모양이고.”

    레아가 약간 당황해서 물었다.

    “나한테?”

    “당연하지 않나.”

    헬릭스는 약간 언짢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네게 충성을 바치고 싶어 안달이 났더군.”

    “카라이한텐 딱히 그럴 만한 일을 한 것 같진 않은데…….”

    “무슨 소린가.”

    그의 목소리에서 어이없음이 묻어났다. 레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애들 구하는 데 도움이 될 거 같아서 받아 준 거잖아? 헬릭스가 마도구로 맹세도 시켜서 안전장치도 만들었고.”

    “그렇다 해도 첩자였던 자를 바로 영입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이들을 돕게 하면서 능력과 충성심을 입증할 기회도 주지 않았나.”

    헬릭스가 부드럽게 덧붙였다.

    “게다가 카라이 그자는 아이들에게 동병상련의 애틋함을 느끼고 있으니, 망설이지 않고 아이들을 구한 레아 네가 여신처럼 보일 거다.”

    그의 음성만 들으면 레아를 여신처럼 여기는 건 카라이가 아니라 헬릭스 같았다. 레아는 살짝 부끄러워져서 코를 찡그리며 괜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큼. 헬릭스 얘길 듣고 보니 나 진짜 좀 멋지잖아?”

    “많이 멋지다.”

    진심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레아는 어쩐지 가슴께가 간질간질했다. 진지하게 말하는 헬릭스의 얼굴을 보고 싶은데, 그냥 이대로 어둠 속에서 목소리만 듣고 싶기도 했다.

    “언젠가.”

    헬릭스가 말했다.

    “드래곤 레어를 뒤져서 방어 아티펙트를 찾아야겠다. 레아 너도 입을 수 있게 가볍고, 몸에 맞춰 크기도 변하는 걸로.”

    “그런 게 있어?”

    “예전에 들었던 기억이 있다.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물건이라 했지.”

    “그렇게 귀한 걸 나한테 줘도 돼?”

    그녀의 말에 헬릭스는 오히려 의아한 듯 반문했다.

    “그런 걸 너에게 주지 않으면 누구한테 주겠나?”

    레아는 순간적으로 대답을 못 하고 눈만 깜박였다.

    “레아?”

    헬릭스가 물으며 얼굴을 가까이 내렸다.

    하필 이 순간, 구름이 물러갔는지 방 안에 달빛이 들어찼다. 너무 가까운 그의 얼굴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귀가 빨갛다. 아직 열이 있는 게 아닌가?”

    염려하는 목소리에 귀를 양손으로 눌러 숨기면서 레아가 얼른 대꾸했다.

    “멋져서 그래.”

    “또 칭찬인가?”

    “아, 아닌데? 헬릭스가 아니라 내가 입을 갑옷이 멋지단 거였거든?”

    ❀ ❀ ❀

    “내 그럴 줄 알았네.”

    루얀을 마주한 패트릭 왕자가 혀를 끌끌 찼다.

    “루얀 자네는 너무 불같아. 암살 시도 같은 사안은 감정만으로 처리할 게 아니란 말이지.”

    루얀은 할 말이 없어 제 앞에 놓인 와인을 후룩 들이켰다. 왕자가 말을 덧붙였다.

    “헬릭스란 그자가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나?”

    그랬다면 레아를 첩자들의 손에 잃었으리라. 생각만 해도 등골이 서늘해서, 루얀은 진저리를 치며 와인을 넘겼다.

    “아무래도…… 그자를 레아 옆에 둬야 하나 봅니다.”

    말을 하면서도 목이 모래를 넘긴 양 까끌까끌했다.

    “잘 생각했네. 듣자 하니 그자가 레아 공녀의 치료에도 많은 도움을 줬다면서?”

    “…….”

    “깨끗이 사과하고 잘해 주게. 도움이 되는 사람과의 인연은 귀한 법이야. 내가 그래서 경이 이렇게 까칠하게 굴어도 비위를 맞춰 주고 있지 않나.”

    “……오늘따라 옳은 말만 하십니다?”

    “경이 들을 준비가 된 거겠지.”

    오랜만에 터놓고 얘기하는 패트릭 왕자는 편안하고 느긋해 보였다. 지금 말하는 게 가감 없는 속마음이라는 반증이리라.

    “경의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토벌대도 여기 머물 테니, 언제든 내 조언이 필요하면 찾아오게.”

    “객으로 오래 있겠단 소리를 무척 생색내며 하시는데요.”

    “그게 정치의 소양 아니겠나.”

    느물거리며 웃던 왕자가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북부 이상현상의 중심지가 아무래도 이 부근 같네. 경이 피어트 공녀의 요양을 핑계로 시간을 벌어 주면 좋겠어.”

    어차피 레아가 괜찮아지는 걸 확인할 때까지 별장에 머물 작정이었다. 루얀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 잔 더 따랐다.

    둘이 와인 한 병을 다 비웠을 때는 늦은 저녁이었다.

    왕자와 헤어져 방으로 돌아가던 루얀은 잠시 고민하다, 방향을 틀어 헬릭스의 방으로 향했다.

    ❀ ❀ ❀

    레아가 건강을 되찾으면 드래곤 레어로 가서, 그녀를 보호할 방어구를 찾으려던 계획은 미뤄졌다.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던 것이다.

    “수도 암흑길드의 마스터, 케론이라고 합니다.”

    암흑길드? 마스터?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출현에 레아는 눈을 크게 떴다. 그에 비해 루얀과 헬릭스는 놀라지 않는 모습이었다.

    “먼 길이었을 텐데 빨리 왔군.”

    “옛 친구가 빚을 지우며 부르는데 달려와야지요.”

    마스터 케론이 루얀의 말에 대답하며 헬릭스에게 시선을 주었다.

    “오랜만입니다, 수호자님. 저희 막내를 돌려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피어트 경이 동의해 주셨기에 가능했다.”

    헬릭스의 말에 레아가 루얀을 돌아봤다.

    “작은오빠가 헬릭스랑 뭘 했어?”

    “하녀로 분장하고 너를 죽이려 했던 암살자를 그냥 보내자고 하더라. 암살자가 하프엘프라고.”

    그녀는 귀를 의심했다.

    “하프……엘프?”

    “그래. 몸놀림도 자기가 알던 하프엘프하고 비슷하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암살자한테 확인해 봤더니 놀라면서, 자기네 정체를 어떻게 알았냐고. 헬릭스가 아는 하프엘프가 자기들 길드 마스터라지 뭐냐.”

    루얀이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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