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루얀은 말 그대로 미쳐 날뛰고 있었다.
침실 한쪽에서 발견된 의식 잃은 하녀와 레아 옆에 있던 헬릭스. 둘 다 지하실에 끌려가 갇히고, 별장을 지키던 기사들이 소집되었다.
“너희 대체 뭐 하는 놈들이야!”
루얀이 피어트 기사단 2조를 향해 버럭 소리치며 발을 굴렀다.
콰직!
그가 발로 찬 곳이 파이며 바닥 대리석이 비스킷처럼 부서졌다.
“미친…….”
루얀을 발견하고 다가가던 토벌대 기사들은 눈을 의심했다.
“어쩐지 몬스터를 숭덩숭덩 잘도 썰더라니…….”
“저, 저거…… 피어트 경 쪽이 몬스터 아닙니까?”
토벌대 기사들이 허옇게 질려 수군댔다.
페이릴리에 대한 호기심과 환심으로 좀 거들어 보려 했던 생각이 쏙 들어갔다.
‘저거 꼭지가 제대로 돌았는데.’
‘잘못 건드렸다간 좋은 꼴 못 보겠어.’
슬금슬금.
토벌대 기사들이 물러나는 동안, 루얀은 피어트 가문의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별장의 수상한 놈들을 싹 다 잡고 반항하는 놈은 손을 써도 좋다고 말이다.
그의 서슬 퍼런 모습에 별장 사람들은 찍소리도 못 하고 명을 따랐다.
“불안한데…….”
패트릭 왕자는 그런 모습을 보며 걱정했다.
유일한 왕자이자 왕세자로서 어릴 때부터 정치판에 있었던 그의 눈엔 루얀의 행동이 아슬아슬해 보였던 것이다.
“피어트 경을 좀 말려야겠다.”
토벌대 기사들이 손을 내저었다.
“왕자님, 지금은 왕자님이라도 무리십니다. 미친 새끼…… 아니, 피어트 경 눈 돌아간 거 좀 보십쇼.”
“맞습니다. 피어트 경 성질 아시잖습니까? 저렇게 날뛰다 제풀에 그만두겠죠.”
“으음.”
토벌대 기사들이 적극적으로 말리는 통에 패트릭 왕자는 일단 더 지켜보기로 했다.
루얀 피어트야 괜찮을 것이다.
걱정되는 건 레아 공녀였다.
마녀사냥에서 용감하고 뻔뻔하게 자매를 구해 내던 모습은 아직도 인상 깊게 남아 있었다.
그런 성격인 줄 알았으면 수도 사교계에서 좀 더 가까이 지내 볼 걸 하고 아쉬울 정도로.
‘사교계에서 가끔 지나칠 때는 세상 우아하고 청초한 귀족 영애처럼 보였는데. 페이릴리라는 별명이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었지.’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그녀는 훨씬 더 생기발랄하고 흥미로운 사람이었다.
그런 레아 공녀가 독에 당했다는 소리에 마음이 무거운데, 루얀은 저렇게 미쳐 날뛰고 있으니. 왕자가 걱정스레 중얼거렸다.
“쥐새끼들을 너무 몰아세우면 무는 법인데…….”
❀ ❀ ❀
패트릭 왕자의 걱정은 적중했다.
피어트 별장의 으슥한 낡은 창고.
그곳에선 트로우 백작가에서 심어 놓은 첩자들이 모여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미친개 저건 왜 갑자기 북부로 와서…….”
“저게 어떻게 미친개냐? 미친 호랑이지.”
트로우 백작이 만날 미친개라고 부르며 무시하던 루얀 피어트는 생각보다 훨씬 더 무서운 인물이었다.
“걸렸다간 당장 몸통이랑 사지가 분리될 판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피어트 공작가에 잠입하지 않는 거였는데…….”
“이제 어떡하지?”
누군가 제안했다.
“차라리 도망치자.”
“……여기서 도망치면 트로우 백작이 우릴 가만둘 거 같아?”
첩자들은 머리를 싸쥐었다.
도망쳐서 수도로 돌아가면, 수도 암흑가에 발이 넓은 트로우 백작이 그들을 가만두지 않을 터였다.
그렇다고 연고 없는 다른 지역 암흑가에서 자신들을 받아 줄 리도 없었고.
암흑가는 폐쇄적인 집단이었고, 그들은 할 줄 아는 게 첩자질, 독질, 암살질 따위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동냥질이라도 배울걸…….”
앞 루얀 피어트, 뒤 트로우 백작.
인생 출구가 다 막힌 기분에 첩자들이 절망스러워할 때였다.
“이판사판이야.”
누군가 말했다.
“어쨌건 레아 공녀가 쓰러지긴 했으니까 일이 아주 실패한 건 아니잖아.”
“그, 그건 그렇지.”
“제닌이 쓰는 독이 오죽 강력해? 공녀는 지금 빈사상태일 거라고.”
놈이 목소리를 낮췄다.
“공녀를 마저 죽이고 튀자.”
꿀꺽.
첩자들이 침을 삼켰다.
“그게 될까?”
“들키지 않겠어?”
“가만있으면 안 들키냐? 루얀 피어트가 저렇게 눈이 벌건데.”
그건 그랬다.
“지금까지야 안 들키려고 따로 행동했지만, 이제 죽느냐 사느냐야. 힘을 합치자고.”
첩자들이 서로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죽여 버리고 튀자고.”
“언제 할까?”
말을 꺼냈던 첩자가 그들을 휘 둘러보더니 속삭였다.
“오늘 밤. 신호하면 다 나와.”
❀ ❀ ❀
헬릭스는 번뇌에 빠져 있었다.
체격이 큰 그가 몇 걸음 움직이면 끝인 좁은 지하실. 어두운 지하실엔 빛도 없고, 구석에는 레아를 죽이려 했던 암살자가 정신을 차리고 웅크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헬릭스는 어둠도, 발에 간혹 밟히는 이질감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걷고, 서성이고, 한숨을 누르고.
머릿속을 채운 건 걱정과 후회뿐이었다.
모든 게 다 자신의 탓 같았다.
‘쓸데없이 레아를 괴롭히지 말고 안전에 더 신경을 썼어야 했다.’
그는 자신을 질책하며 다시 서성였다.
한숨을 쉬며 몸을 죽 펴자 새삼 그의 팔에 안겨 있던 레아의 온기가 떠올랐다.
바들바들 떨면서 그의 목을 조르듯 매달리던 것도. 겁먹지 않은 척하다가 금세 털어놓는 솔직한 말투도. 잠깐씩 두려움을 잊을 때 눈앞의 경이에 진심으로 감탄하며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도.
마치 그림을 그린 듯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순간순간 반응하는 그녀가 너무도 예뻐서, 그만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계속 안고 다니고 말았다.
제 실수를 자각했을 때는 이미 별장에 돌아온 뒤였다.
레아가 씩씩한 척해도 은근히 여린 데가 있는데, 자면서 악몽을 꿀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걱정되어서 찾아간 것인데…… 그를 기다리는 건 생각지도 못한 장면이었다.
‘더 주의 깊게 지켰어야 했다. 더 일찍 찾아갈 걸 그랬다.’
옆에 더 붙어 있어야 했는데. 늦은 후회에 떠밀리듯 서성이던 그가 지하실 입구 앞에 섰다.
빗장 걸린 육중한 떡갈나무 문이 그를 가로막았다.
헬릭스가 커다란 손을 문에 갖다 대었다. 이까짓 것, 마음만 먹는다면 여는 게 아니라 부수고 나가는 것도 가능하리라.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게 옳은 일인가?
그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헬릭스가 망설이며 문에 얹힌 제 손을 바라보았다. 계약의 증표인 마나석 반지가 어젯밤과는 달리 평온한 빛으로 반짝이며, 계약자가 무사하다고 알려 왔다.
“…….”
서서히 문에서 손을 내렸다.
레아의 곁에서 순순히 물러난 건 그 스스로 선택한 일이었다. 루얀이 하는 의심은 합당했고, 헬릭스를 가두고 죄를 조사할 자격 또한 있다고 여겼으니까.
‘그래 놓고 이제 와서 멋대로 나가는 건, 루얀의 권위를 무시하는 처사가 아닌가.’
자신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었다.
자신의 역할은 레아의 계약자였지, 보호자가 아니었다. 레아가 의식을 잃고 있는 지금 그녀의 가장 믿음직한 보호자는 오빠인 루얀 피어트였다.
그는 스스로를 다잡았다.
‘헬릭스, 너는 수호자다.’
귓가에 찡 하고 과거의 목소리가 들렸다.
‘헬릭스, 너는 실패한 수호자다.’
드래곤로드 아즈라의 음성이었다. 헬릭스가 이를 사려 물었다.
‘나는 실패한 수호자가 아니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이제껏 그가 했던 모든 행동은 수호자로서 올바르고 공정하게, 세계를 지키고 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올바른 수호자는 정당한 권위를 흔들지 않는다.’
루얀 피어트의 방식이 옳고, 따르기로 했다면 그대로 지켜야 했다. 그게 수호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행동이었다.
헬릭스는 마나석 반지를 낀 손을 내리고 주먹을 쥐며 돌아섰다.
어두운 지하실 벽에 레아의 새하얀 얼굴이 떠올랐다.
그가 주먹 쥔 손을 움찔했다.
손에 잡히던 그녀의 맥박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독으로 뒤집히고 드래곤의 마나가 요동치던 마나의 흐름이. 헬릭스는 저도 모르게 손을 올려 마나석 반지를 확인했다.
‘레아는 무사하다.’
알고 있는데, 왜 그녀가 처음 드래곤 마나를 먹고 쓰러졌을 때 짚었던 맥이 떠오르는 것일까. 왜 죽은 사람과 별다를 게 없었던 그 미약한 기운이 생각나는 것인가.
그가 이를 악물었다.
무사한 것처럼 보여도 금방 나빠질 수 있는 몸이었다. 만약에 이러다 레아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레아를 잃는다고?
갑자기 숨 쉬기가 어려워 헬릭스는 가슴을 짓누르듯 부여잡았다.
봉인진 안에서 가끔 그랬던 것처럼 가슴이 조여들었다. 앞으로도 기약 없이 이렇게 석상처럼 갇혀 있어야 하나 느꼈을 때의 절망감. 세상에 혼자 떨어진 기분.
오래전의 일도 아닌데 무척 옛날 일 같은 기분이 들었다. 레아가 나타난 뒤 그의 세상은 너무나 달라졌으니까.
‘……괜찮다.’
괜찮았다. 괜찮아야 했다.
자신은 수호자니까.
쿵.
헬릭스는 지하실 석벽에 고개를 박았다. 차가운 냉기가 이마 가운데에서부터 번져 갔다.
“……괜찮다.”
❀ ❀ ❀
루얀과 첩자들이 각각 난리를 치며 피어트 별장에 폭풍이 휘몰아칠 때.
정작 폭풍의 눈인 레아가 누워 있는 침실은 고요했다.
쌕, 쌔액.
큰 침대에 파묻혀, 그녀는 임종 직전의 할머니처럼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레아의 하얀 손엔 맥이라곤 없고, 젖은 수건으로 닦을 때마다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공녀님은 어떠세요? 좀 나아지셨어요?”
물수건을 갈아 온 자넷의 걱정에 주치의가 대답했다.
“너무 걱정 말게. 이번엔 쉬이 이겨 내실 거야.”
지난번 드래곤의 마나와 달리, 이번 독은 어떤 독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암살자들이 흔히 쓰는 마비계 독이었으니까.
예전의 레아였다면 하루도 못 버티고 목숨을 잃을 극독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아무래도 헬릭스 님이 잡혀 가시기 전에 조치를 취하신 게 분명해.’
주치의의 생각대로였다.
독은 이미 주치의의 약으로 해독되고 있었지만 그 틈을 타 드래곤의 마나가 균형을 깨고 레아의 몸을 점거하려 드는 게 문제였다.
헬릭스가 급히 넣은 마나는 그렇게 날뛰는 드래곤의 마나를 진정시키려 하고 있었다.
‘마나의 일이니, 평범한 의사인 나로서는 알 수가 없군. 그저 헬릭스 님의 조치를 믿을 수밖에…….’
그는 그저 짐작할 뿐이었다. 설명할 수 없는 힘이 레아의 몸속에서 버티며 싸우고 있다는 걸. 생각에 잠겨 있던 그에게 자넷이 소리쳤다.
“주치의님, 공녀님이……!”
비명 같은 외침에 주치의가 얼른 레아를 살폈다. 그는 혀를 깨물 뻔했다.
열이 미친 듯이 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