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26)화 (26/120)
  • 26화

    그녀는 심장을 눌렀다. 아무도 없는데 이상하게 긴장이 되어, 심호흡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욕실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달빛에 대리석으로 치장한 욕실이 은빛으로 반짝였다. 제 시야를 커튼처럼 가리며 펄럭이던 긴 은발이 눈에 선했다.

    깜박.

    레아는 얼른 눈을 빠르게 깜박이며 시선을 내렸다. 김이 오르는 목욕물을 보자 헬릭스의 걱정스러운 얼굴이 떠올랐다.

    ‘레아, 약욕도 너무 오래 하면 몸에 안 좋다.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러나.’

    챠륵.

    그녀는 손을 휘저어 물을 훑었다.

    그렇지만 소용없었다. 자꾸 다른 모습까지 떠올랐다.

    다급한 표정으로 달려와 노예상 일당을 밟아 놓고, 저를 보면서 인상을 찌푸리던 그 얼굴. 그러더니 다가와서 제 떨리는 손을 잡고 마나를 넣어 주던 더 떨리는 손.

    그녀는 물 안에 잠긴 하얀 손을 뒤집어 옅은 분홍빛을 띤 손바닥을 빤히 내려다봤다.

    왠지 손바닥이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뭐야, 진짜.”

    중얼거린 말이 욕실에 울려 레아는 화들짝 놀랐다. 들은 사람이라곤 저밖에 없는데 뺨에 열이 올랐다.

    진짜 미쳤나 봐.

    그녀는 욕조에서 얼른 몸을 일으켰다. 계속 이러고 있으면 안 되겠다 싶었다.

    “헬릭스는 수호자라고.”

    레아가 소리 내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악당 빼고 노약자한테 친절한 건 당연한 거야.”

    난 약체 중의 최약체니까.

    게다가 계약자기도 하니까 더 잘해 주는 거겠지.

    제가 한 생각에 괜히 기분이 가라앉아, 그녀는 시중들 하녀도 부르지 않고 대충 가운을 걸쳤다.

    욕실 밖으로 나오자 밤기운이 서늘했다. 레아는 그 찬 기운을 느끼려 오도카니 서서 창밖을 쳐다보았다. 차가운 달빛에 마음이 가라앉자 뺨의 열기도 식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왜.

    왜 계속 싱숭생숭할까.

    “후…….”

    한숨을 뱉으며 몸을 돌리던 그녀가 멈칫했다. 어두운 침실에 언뜻 인영이 보였다.

    ❀ ❀ ❀

    “……자넷?”

    들려온 건 다른 목소리였다.

    “공녀님, 약차입니다.”

    레아는 어둠에 익숙해지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떴다. 낯선 하녀가 쟁반을 들고 있었다.

    “자넷은 어디 가고?”

    “하녀장님이 갑자기 부르셔서 제가 대신 왔습니다.”

    미심쩍은 대답이었다.

    자넷은 아직 교육을 받고 있는 수습하녀 신분이었지만, 레아가 명령해서 약차만은 그녀가 들고 오게 되어 있었다.

    “그럼 누가 널 보냈지?”

    “하녀장님이요.”

    하녀장도 주치의도 자넷이 맡은 임무를 알고 있었다.

    레아의 경계심이 높아졌다.

    이 하녀는 누구고, 지금 이건 어떤 상황일까.

    “…….”

    침묵이 길어지자 쟁반을 든 하녀가 가만히 레아를 살피듯 바라봤다.

    짧은 순간.

    무언가 가늠하는 시선이 지나가더니,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 들었다.

    “끼아……!”

    꺄악이라고 소리치기도 전에 억센 손아귀가 머리채를 잡았다.

    레아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상상도 못 해 본 강한 힘에 머리채가 잡혀 고개가 위로 들렸다.

    “허억!”

    고통에 절로 입이 벌어졌다.

    하녀가 다른 손으로 약차 주전자를 들더니 주둥이를 그녀의 입가에 대고 콸콸 부었다.

    “컥! 콜록!”

    입으로 쏟아지는 독차에 숨이 막혔다. 도리질을 치려 해도 억센 손아귀는 머리채를 꽉 붙든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암살자였어! 누가 올 때까지 시간을 더 끌어야 했는데……!’

    레아는 필사적으로 독차를 입에 머금고 삼키지 않으려 애썼다.

    그런 그녀를 비웃듯 암살자가 손날을 세웠다.

    “빨리 삼켜!”

    손날이 그녀의 목으로 날아왔다. 레아가 혼신의 힘을 다해 고개를 꺾었다.

    그녀의 눈에 분기가 어렸다.

    ‘너나 처먹어!’

    그 순간 허공에서 갑자기 불꽃이 생겨났다.

    불은 작은 벌레처럼 암살자의 눈과 코를 향해 날아들었다.

    “으악!”

    순간적으로 비명을 지르며 손을 놓은 암살자를 향해, 커다란 사람이 몸을 날렸다.

    “레아!”

    헬릭스였다.

    쿠당탕! 콰직!

    뭔가 쓰러지는 소리와 함께 그가 레아에게 급히 다가왔다.

    “레아! 빨리!”

    햄스터처럼 볼에 독차를 머금고 굳어 있던 그녀가 눈을 더 동그랗게 떴다.

    “얼른 뱉어라!”

    다급한 헬릭스의 말에 레아가 정신을 차렸다.

    “푸읍!”

    그녀가 바닥에 독을 뱉는 사이 헬릭스는 얼른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가 테이블 위의 물병을 낚아채며 레아를 붙들었다.

    “입안을 게워야 한다! 어서!”

    “으응…….”

    레아는 고개를 들어 헬릭스를 쳐다보기만 했다. 눈빛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사이 독을 좀 삼킨 건가?’

    맘이 급해진 그는 레아를 끌어안고 입에 물을 흘려 넣었다.

    “으으……!”

    조금 전 암살자의 기억 때문에 반사적으로 도리질 치는 뺨이 벌써 창백했다. 헬릭스는 그녀의 입가를 꽉 붙들고 물병을 기울였다. 레아가 놀란 새처럼 몸을 잘게 떨었다.

    “힉…… 딸꾹!”

    “삼키면 안 된다, 뱉어라!”

    목을 누르며 채근했지만 그녀는 점점 더 늘어져 갔다.

    마나 코어가 맹렬히 움직이며 독을 밀어내는 게 느껴졌지만 역부족이었다. 헬릭스가 이를 악물었다.

    ‘마나 코어가 활발하게 움직여서 오히려 독이 빠르게 퍼지고 있다.’

    이대로는 마나 코어도 깨질 것이고, 레아의 목숨도 위험했다.

    독으로 인해 손끝부터 차가워지던 그녀의 몸이 늘어지며 점차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신체 균형이 무너지면서 마나가 폭주하기 시작하는 게 분명하다.’

    레아를 붙든 헬릭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무슨 수든 써야 했다. 그가 들쭉날쭉 제멋대로 뛰기 시작한 레아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이걸로 어떻게든……!’

    그때였다.

    기척도 없이 도달한 칼끝이 헬릭스의 뒷덜미를 눌렀다.

    목이 쭈뼛해지는 살기와 함께, 이를 가는 듯 사나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 손 안 치워?”

    ❀ ❀ ❀

    한밤중에 기습적으로 도착한 루얀은 별장을 뒤집어 놓았다.

    눈앞에서 레아가 쓰러지고 추행까지 당하는 꼴을 봤는데, 그러고는 동생이 깨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공녀님이 또 큰일을 당하셨다고?”

    “우리 공녀님한테 왜 자꾸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피어트 별장 안에는 빠르게 소문이 퍼졌다.

    고용인들은 놀라 낮게 수군댔고, 레아를 지켜야 하는 피어트 기사단 2조장 바이든 경은 얼굴이 잿빛이 되었다.

    “면목이 없습니다.”

    바이든 경은 자책했다.

    레아의 방 앞에 늘 호위를 세워 뒀어야 하는데, 요즘 이른 폭설을 치우고 몬스터를 경계하느라 해이해졌다고 말이다.

    그렇지만 루얀은 다른 고용인들의 태도에서 미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호위를 안 세운 게 정말 그 이유 때문이냐?”

    “예?”

    “내가 얼마 전에 근처 마을에서 본 게 있어. 레아가 그 헬릭슨가 뭔가 하는 놈과 둘이서만 같이 돌아다니던데.”

    루얀이 매섭게 추궁했다.

    “그때부터 쭉 호위가 없었던 게 아니냐?”

    “그, 그것이…… 공녀님께서 헬릭스 님과 늘 같이 다니셔서…… 다른 호위를 붙여도, 두 분은 무슨 수를 쓰시는 건지 휙 벗어나시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 수상한 놈을 레아의 호위처럼 생각하고 내버려 뒀다고?”

    “단장님, 그렇지만 단장님도 직접 보셨으면 허락하셨을 겁니다.”

    바이든 경이 쩔쩔매면서도 조심스레 말했다.

    “헬릭스 님은 치료능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그분과 같이 다니면서 공녀님은 뛰기도 하셨습니다.”

    뛰어? 레아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정말입니다. 저와 기사들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단 말입니다. 주치의도 보장했고요.”

    루얀은 헬릭스가 독 먹은 레아를 구해 왔으며, 주치의가 그를 환영해 받아들인 뒤 공녀가 점점 더 건강해졌다는 말을 인내심을 가지고 들었다.

    속이 폭발 직전의 화산처럼 들끓었다.

    웬 놈이 레아에게 딱 붙어 친근하게 구는 걸 봤을 때도 영 찜찜했는데, 그놈이 갑자기 나타난 정체도 모르는 놈이었단 말인가? 레아도 고용인들도 순순히 그런 놈을 받아들였고?

    “주치의를 불러와라.”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는지 한참 만에 나타난 주치의는 해쓱한 모습이었다.

    “헬릭스 님은 공녀님을 해칠 분이 아닙니다!”

    확신에 차서 대뜸 주장하는 모습에 루얀의 기분은 더 흉흉해졌다.

    독 사건 같은 큰일이 일어났었는데 헬릭스를 레아의 은인으로 여기고 받아들인 일도 경솔했고, 그런 자를 고용인들이 신용하는 것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런데 바이든 경이나 주치의 같은 최측근들까지 놈을 깊이 믿고 있다니. 루얀이 헛웃음을 흘렸다.

    “하. 너희 같은 놈들을 믿고 레아를 맡겼다니.”

    평소라면 루얀의 흉포한 기세에 바로 쭈그러들었을 주치의였다. 그런 그가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루얀을 쳐다보며 반박했다.

    “공자님은 헬릭스 님이 공녀님을 어떻게 챙겼는지, 그분이 온 뒤 공녀님이 얼마나 건강해지셨는지 못 보셔서 그렇습니다. 그분은 심지어 공녀님을 마……!”

    뭐라 더 덧붙이려던 주치의가 황급히 입을 닫았다.

    루얀이 조소했다.

    “그런 자가 쓰러진 애한테 그따위로 군단 말이냐?”

    “예? 그게 무슨…….”

    어리벙벙한 주치의를 대신해 바이든 경이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단장님, 발견된 건 헬릭스 님만이 아니잖습니까. 그 자리엔 의식 잃은 하녀도 있었고, 몸에서 독약과 단검도 발견되었습니다. 어쩌면 헬릭스 님이 공녀님을 구한 걸 수도…….”

    루얀의 인상이 사납게 구겨졌다.

    그러고 보니 그 수상한 하녀도 있었다.

    “그래. 모조리 조사해야겠어.”

    그가 짓씹듯 말했다.

    “이 별장 안에 수상한 놈들이 얼마나 더 있는지 내가 직접 점검해야겠다.”

    ❀ ❀ ❀

    토벌대가 먼저 사라진 루얀을 따라 헐레벌떡 별장에 도착했을 때는 늦은 오후였다.

    정원의 장미 한 송이, 바닥의 포석 하나까지 신경 써서 꾸민 아름다운 별장이었지만, 토벌대 기사들은 눈앞의 풍경에 감탄할 수 없었다.

    “여기 분위기 왜 이럽니까?”

    기사들이 눈치를 보며 수군거렸다. 그들은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레아가 습격당하면서 어두워진 별장 분위기는 루얀이 폭주하면서 더 깜깜해졌던 것이다.

    그 팔불출 앞에서 페이릴리가 암살 위협을 받고 독에 당하다니, 루얀이 어쩌고 있을지 안 봐도 훤했다. 패트릭 왕자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

    “피어트 경에게 안내하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