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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24)화 (24/120)
  • 24화

    레아 일행 네 사람은 아이들을 아즈라의 레어에 옮겨다 놓고, 내친김에 헬릭스가 가져온 마도구로 비밀유지 서약까지 했다.

    레아와 헬릭스는 별장에서 레어로 매일 아침 출근했다 저녁에 돌아왔다. 주치의는 가끔 좀비 같은 몰골로 별장에 짐을 가지러 와서, 주방을 급습해 선 채로 음식을 흡입하고는 먹을 걸 바리바리 싸서 사라졌다.

    레아는 의아해하는 하녀장과 바이든 경에게 설명했다.

    “내가 맡겨 놓은 일 때문에 바빠서 그래. 새 치료법을 개발하는 중이라.”

    “그러셨군요. 역시 주치의님의 열정은 대단하십니다.”

    네 명이 모두 열심히 한 덕분인지 차도가 있었다. 아이들이 조금씩 열이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주치의와 카라이는 더욱더 불타올랐다.

    주치의는 정신없이 일하다가도 가끔 벅차서 코를 훌쩍였다.

    ‘내가 드래곤의 레어에 들어와 보다니! 내가 구한 이 아이들이 장차 마법의 역사를 새로 쓸 마법사들이 될 거라니!’

    이게 꿈이냐 생시냐.

    평생 마법덕후로 살아왔지만 어릴 때 마법책을 보며 상상한 것보다도 현실이 더 놀라웠다. 주치의는 감동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생각했다.

    레아 공녀님을 모시길 참 잘했다고.

    카라이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이 레아에게 구해지면서 제 과거도 구원받는 느낌을 받았던 그날 이후, 그는 사는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아이들의 열이 내리고 손가락이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가슴이 찌릿찌릿했다.

    ‘사는 게 이런 기분이었구나.’

    산다는 건 이렇게 생생하고, 감정이 느껴지고, 음식의 맛을 알게 되는 거였다.

    동료 부랑아 패거리와 함께 잡혀 왔다 혼자 깨어난 이후 늘 세상에 뚝 떨어진 기분이었는데. 지금은 이 아이들이 제 동료이자 동생들처럼 느껴졌다.

    “어라?”

    레아는 약간 당황했다.

    주치의와 카라이가 아이들에게 딱 붙어서 열심히 치료하는 통에 도울 틈이 없었다.

    “둘이 열의가 너무 넘치는데? 끼어들 틈이 없어.”

    “잘되었지 않나. 우리는 우리 할 일을 하면 된다.”

    “할 일?”

    헬릭스가 손을 내밀었다. 레아는 자연스레 그 손을 잡고 물었다.

    “우리 어디 가?”

    “순찰 간다.”

    둘은 레어 주위를 한 바퀴 돌며 혹시 수상한 놈이나 낯선 물건이 없는지 살폈다.

    “아직 의식 없는 아이들을 보호하고 있는 만큼 철저해야 한다.”

    말하는 것과 달리 헬릭스는 레아의 보폭에 맞춰 느리게 걷고 있었다. 레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순찰보다 산책 기분인데.”

    “……순찰이다.”

    왜 대답이 한 박자 늦게 나오지.

    헬릭스가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곤 덧붙였다.

    “레아 네가 요즘 마법 연습도 훈련도 안 하고 드래곤 레어에 박혀 있으니 걸음이 더 느려졌지 않나. 그래서 산책처럼 느껴지는 거다.”

    레아는 괜히 고개를 돌리는 헬릭스를 보고 속으로 웃었다.

    아무리 봐도 자신이 바깥바람 안 쐬니까 걱정돼서 산책 나온 게 맞는 듯했다. 그녀는 비시시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고 모르는 척 장단을 맞췄다.

    “진짜 계속 레어에만 있어서 그런가? 날씨도 바뀌었어. 그사이 좀 쌀쌀해졌네.”

    “추운가?”

    그가 손을 잡고 따뜻한 마나를 불어넣어 주었다.

    퐁. 퐁.

    손바닥이 따뜻해지며 왜인지 간질거렸다. 그 감각에 눈을 깜박이고 있는데 헬릭스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애들이 깨어나면 어떻게 할 생각인가?”

    “그게, 마법학교를 만들까 해.”

    “학교?”

    그는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응. 애들 모아 놓고 지식이랑 사회생활 가르치는 거지. 교육기관이랄까?”

    “아카데미와 비슷한 건가?”

    “아카데미는 아니고,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는 곳인데…….”

    레아는 설명을 못 하겠어서 끙끙댔다.

    이 세계에는 좀 자란 귀족들이 학문을 닦는 아카데미는 있지만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는 학교는 없었던 것이다.

    귀족들은 가정교사를 붙였고, 평민 아이들은 부모가 하던 일을 물려받거나 도제식으로 기술을 배웠다. 가끔 공부에 자질을 보이는 아이들은 신전 교육을 받기도 했다.

    ‘지금까진 아파서 신경 안 썼는데, 여기 진짜 기초교육이란 게 없네.’

    그녀는 설명하길 포기하고 둘러댔다.

    “어린애들이니까 모아 놓고 기초지식이랑 마법 상식 같은 걸 가르쳤으면 좋겠어.”

    “마법사들을 모아 놓고 가르친다고?”

    헬릭스는 놀랐다. 옛날에도 마법사는 마법의 탑에 이미 한 사람의 마법사가 되어 들어왔지, 마법을 배우러 오진 않았던 것이다.

    그는 경악 반 감탄 반으로 레아를 내려다봤다. 그녀가 그를 쳐다보려고 동그란 머리통을 움직이자 백금발이 나풀나풀 흔들리는 모습이 예뻤다.

    자신의 계약자이자 제자는 알면 알수록 신기했다. 이렇게 작고 귀여운 머리로, 어떻게 이렇게 놀라운 발상을 하는 걸까?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마법사라곤 나랑 너 둘뿐인데, 다 맡아서 가르칠 수도 없잖아.”

    “나는 마법사가 아니라 수호자다.”

    “그래도 마법 전문가잖아.”

    “내가 어린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가르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레아 넌 누굴 가르치기엔 아직 햇병아리고.”

    “내 생각도 그래.”

    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모아서 가르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선생들이 좀 어설퍼도 애들끼리 연구도 하고 배워 나가는 게 낫지 않을까?”

    “일리가 있군.”

    둘은 계속 걸으며 이런저런 것들을 의논했다.

    언제까지 트로우 백작의 눈을 피해 애들을 숨겨 놓을지, 학교를 드래곤 레어 안에 만들면 애들이 위험해지진 않을지.

    과목은 어떤 것으로 몇 가지 정할지, 선생은 지금 넷으로 괜찮을지, 마법능력자들은 생긴 능력에 따라 교육을 달리해야 할 텐데 그 부분은 어떻게 할지.

    “힘이 세지거나 그런 마법능력도 있어?”

    “당연히 있다. 카라이도 발현도가 좀 낮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방어계 능력이고.”

    “방어계라니 쓸모있는 능력이네. 그럼 육체적 마법능력이 생긴 애들은 카라이가 교육시켜도 되겠다. 안 되면 우리 둘째 오빠를 영입해도 되고.”

    “레아 네 오빠는 마법능력자가 아니지 않나?”

    “그 인간은 이미 탈인간이니까 괜찮아.”

    종알거리던 그녀가 걱정했다.

    “그나저나 학교는 어떻게 다니게 하지? 학교야 레어 안에 만들면 되지만, 집에서 학교로 다니게 하면 트로우 백작의 귀에 들어갈 거 아냐.”

    레아가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고 아직 어린애들을 부모한테서 떨어트려 놓을 수도 없고.”

    “떨어트려 놓는 게 나을 거다.”

    헬릭스가 나직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살아난 뒤에는 마법사나 마법능력자로 발현할 것 아닌가. 원래 가족들과 있어도 이질감만 들 거다.”

    레아는 약간 움찔했다.

    “……그래?”

    “물론 아닌 이들도 많지만.”

    그녀를 달래듯 한마디 덧붙인 그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마법이 융성했던 시대에도 마법사들은 비뚤어진 이들이 많았다고. 어릴 때 마법 재능인 줄 모르고 귀신 들렸다느니 하면서 따돌리거나 학대를 당하는 경우가 제법 있었다고 했다.

    레아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안 되겠네. 우리 애들을 기껏 살려 놓고 구박데기로 만들 순 없지. 그냥 우리가 데려다 놓고 키워야겠다.”

    “우리가 어떻게 키우나?”

    “부모처럼 키울 순 없을 테니까, 우린 선생 입장에서 생각해야지. 숙식 제공 다 하는 마법 기숙학교로 만들자.”

    선생 입장에서 생각하자고 해 놓고 이사장처럼 말하는 레아였다. 헬릭스는 묘하게 괴리감을 느끼며 그녀를 내려다봤다.

    “마법 기숙학교라니…… 그게 되겠나?”

    “왜 안 돼?”

    레아가 되물었다.

    “많은 돈과 적절한 관심이면 안 되는 일은 없다니까. 날 믿어.”

    헬릭스가 이마를 짚었다.

    “……일단 내가 옆에서 감시해야 된다는 건 알겠다.”

    ❀ ❀ ❀

    깊은 밤에도 불빛 하나 없는 북부의 산속 마을.

    마을의 북서쪽 능선에서 한 무리의 복면인들이 나타났다.

    “저기다.”

    복면을 유독 올려 쓴 남자가 마을을 가리키며 제 일행에게 속삭였다. 노예상 일당 중 도망쳤던 흉터였다.

    “뭐야. 그냥 깡촌이잖아.”

    복면 일행은 달빛에 비친 마을을 내려다보며 가늠했다. 규모도 크지 않았고, 마을을 둘러싼 건 낡은 목책뿐 감시탑 하나 없었다. 보아하니 자경단도 없을 성싶었다.

    “이거 너무 쉽겠는데. 다 죽이기만 하면 된다 이거지?”

    “너무 긴장 풀지 말라고.”

    흉터는 트로우 백작의 명령을 떠올렸다.

    백작은 인체실험의 증거를 없애라면서, 아이를 팔았던 마을 사람들을 몰살하라고 시켰다. 마을이 몬스터의 습격을 받은 것처럼 꾸미라고 신신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 놈도 놓치지 말라셨다. 사람이 한 게 아니라 몬스터가 한 짓처럼 보이게……!”

    그 순간 갑자기 붕 하고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났다.

    아무 눈치도 못 채고 말하고 있던 흉터가 짚단처럼 쓰러졌다. 복면 일행은 갑작스러운 일에 반응하지 못하고 눈만 끔벅였다.

    “아.”

    흉터 뒤에서 나타난 금발 남자가 실수했다는 듯 중얼거렸다.

    “말이 끝난 다음에 죽일 걸 그랬나?”

    금발에 천사 같은 얼굴.

    거대한 대검을 아무렇지 않게 고쳐 잡는 모습.

    복면인들은 한밤중에 몬스터 떼를 마주친 양 얼어붙었다.

    “루, 루얀 피어트다!”

    정신 차린 누군가가 외쳤다.

    “히익!”

    “루얀 피어트가 왜 북부에!”

    놈들은 귀신이라도 만난 것처럼 소리를 지르며 도망쳤다.

    그렇지만 주위엔 흉터를 단칼에 죽인 루얀 피어트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왕자의 토벌대와 함께 이동 중이었던 것이다.

    도망치던 놈들은 곧 기사들한테 붙잡혀서 아는 걸 다 불어야 했지만, 제대로 알고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의뢰인은 누군지 모르고 선금만 받았습니다! 이 바닥에선 흔한 일이라…… 진짜입니다!”

    “그렇습니다! 저, 저희는 흉터 저놈한테 돈 받고 일하러 왔을 뿐입니다요!”

    심문을 지켜보던 패트릭 왕자가 헛웃음을 지었다.

    “강도살해를 일이라고 하는 패기가 놀랍군.”

    “이놈들 분명 질 나쁜 용병단 출신일 겁니다.”

    왕자는 골치가 아파 왔다.

    점점 수가 줄어드는 몬스터를 쫓아 헬 산맥을 헤매길 며칠. 슬슬 피로도 누적되고 성과도 전 같지 않아 근처 마을로 내려와 쉬면서 주변을 좀 둘러볼 계획이었다.

    ‘이상현상의 원인도 조사하고 말이지.’

    그런데 내려오는 길에 몬스터를 흉내 내 사람을 해치려는 불한당들을 만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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