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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23)화 (23/120)
  • 23화

    “전혀, 어, 없습니다.”

    “그럼 됐네.”

    레아가 말했다.

    “네 협조가 필요해. 넌 이 실험의 생존자고 마법능력자니까, 애들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될 거 같거든.”

    애들을 구하는 데 제 도움이 필요하다니. 카라이는 긴장과 흥분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헬릭스가 옆에서 설명했다.

    “레아는 워낙 약체였고, 내가 발견 즉시 조치를 했으니 이 아이들과는 경우가 많이 다르다. 네 사례를 참고하는 게 나을 듯하군.”

    “그 말씀은…….”

    “이 애들을 마법사로 키우겠다는 말씀입니까?”

    카라이와 주치의의 질문에 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 구한 거 살려야지. 살아나면 마나를 느낄 수 있게 된다니까, 제대로 마법을 하게 되는 편이 좋을 거고.”

    그녀의 말에 카라이의 눈이 흔들렸다.

    트로우 백작은 한 번도 인체실험이 무슨 목적인지 말한 적 없었다. 그저 더욱 많은 애들에게 비약을 먹여 하나라도 더 생존자를 건지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 뿐.

    카라이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괴로웠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런 짓을 하는지, 애들은 왜 죽어 나가야 하는지, 답답한 마음은 출구를 찾지 못하고 고여 썩어 가기만 했다.

    그런데 레아는 비약을 먹인 애들을 살리겠다고, 살려서 마법을 하게 만들겠다고 하고 있었다.

    “……주인님!”

    비장하게 뱉은 단어에 레아의 눈썹이 치켜올라 갔다.

    “엥?”

    “아, 아닙니다.”

    카라이는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진심을 숨겼다.

    제 입장에서야 그녀를 지켜봤고, 매혹되고, 존경심을 품었고, 저를 받아 준 게 꿈꿔 왔던 기적이 이루어진 듯한 행운이었지만 레아의 입장은 달랐다. 그녀에겐 필요하니 받아 준 적의 첩자일 뿐인 것이다.

    ‘아직은 날 경계하고 계실 거다.’

    괜히 더 치대다가 내쫓길 순 없었다. 카라이는 충성, 충성 외치며 꼬리 치고 싶은 마음을 꽉꽉 눌렀다.

    그사이 주치의가 물었다.

    “이자는 그렇다 치고, 헬릭스 님이 계신데 저는 왜 부르셨는지요? 마나 관련 질환은 저보다 헬릭스 님이 훨씬 더 뛰어나실 텐데요…….”

    주치의의 질문에 헬릭스가 대답했다.

    “레아의 계약자로서 그녀를 치료하고 마법을 가르치는 데 집중했더니, 레아의 혈맥과 마나에 너무 익숙해진 것 같다. 그대도 알다시피 레아는 약체 중의 약체지 않나. 지금 이 아이들은 새끼멧돼지처럼 건강하더군.”

    “아, 아아.”

    주치의가 수긍했다.

    “그렇지요. 공녀님은 진짜 너무너무나 약하시지요.”

    “내 많은 사람을 봐 왔지만, 정말 상상 이상이었다.”

    이 인간들이?

    레아는 세모눈을 뜨려다 참았다.

    주치의가 헬릭스의 말에 납득하고 말했다.

    “헬릭스 님은 본래 치료사가 본업도 아니시니, 공녀님의 약체에 익숙해지셨다면 평범하고 건강한 육체를 다루기 난감하시겠습니다.”

    “바로 그렇다. 그래서 나는 뒤에서 지원만 하고, 그대에게 주도권을 맡기고 싶군.”

    헬릭스의 말에 주치의가 레아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진심이십니까, 공녀님?”

    “응. 십이 년간 끈기와 인내를 가지고 나를 살려 낸 주치의잖아. 내가 약 하나를 먹을 때마다 증세를 기록하고, 비교하고, 새 처방을 만드느라 노트가 얼마나 쌓였는데.”

    “그걸 알고 계셨습니까?”

    “그럼 몰랐을까 봐?”

    레아가 빙그레 웃었다.

    “그런 주치의라면 마나의 변화 같은 낯선 증세에도 당황하지 않고, 끈기 있고 철저하게 대응할 거라 생각해. 이렇게 많은 수의 아이들을 살려 내는 덴 그런 노력이 필요할 거고.”

    “…….”

    “주치의라면 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때?”

    “어떠냐고 하시면…….”

    주치의가 부르르 떨다 고개를 휙 들었다.

    “맡겨만 주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콧김을 뿜을 기세에 레아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주치의가 마법덕후인 건 알았지만, 수도 최고 위치의 의원을 약속받을 때보다 기합이 더 들어간 것 같았다.

    “어째 나 살리려고 할 때보다 더 의욕이 넘치는 거 같은데?”

    “오해십니다! 감동받아서 그런 겁니다!”

    네 사람은 아이들을 치료할 방법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헬릭스는 비약이 드래곤 마나를 가공한 물건이며, 드래곤 마나는 인간의 몸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농축마나라고 설명했다. 그가 카라이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이자가 살아났던 것 같다. 이자의 피에는 미량의 용혈이 흐르니…….”

    “요, 용혈이요?”

    “먼 조상 중에 드래곤이 있는 모양이더군.”

    드래곤이 전설 속의 생물로 여겨지고, 오켄 제국의 황실이 드래곤의 후손이니 거룩한 용혈이니 주장하고 있는 이 시국에 용혈이라니! 조상님이 드래곤이라니!

    카라이는 놀랐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레아와 주치의도 카라이의 핏줄에 신경 쓰기에는 최근 너무 많은 일들을 겪었던 것이다.

    주치의가 제안했다.

    “그렇다면 이자의 피를 희석해서 아이들에게 먹이면 어떻겠습니까?”

    “과격한 방법이지만…… 가능성이 없진 않겠군.”

    헬릭스도 고민하며 미간을 문질렀다.

    “드래곤 마나가 백만이라면 일반인은 일, 카라이의 경우는 만 정도쯤 되는 듯하다.”

    “수치를 조절해서 먹여 본다면 아이들이 드래곤 마나에 적응하게 만들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레아는 대화를 들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일종의 백신이잖아?’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카라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카라이, 아이들을 위해 네 피를 좀 나눠 줄 수 있겠어?”

    헬릭스와 주치의도 거들었다.

    “건강에 지장 없도록 조금씩만 채혈하도록 하겠다.”

    “일단 극소량만 채혈해서 가장 상태 좋은 애한테 투여해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카라이의 얼굴이 조금 창백해졌다.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내가 이 아이들을…….’

    돕는다.

    그는 새삼 주위를 둘러보았다.

    얼기설기 지어진 움막 벽 사이로 비치는 미약한 햇빛 아래, 누워 있는 어린아이들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마치 십 년 전 그 창고 안의 친구들처럼.

    ‘내가 이 아이들을 진짜로 도울 수 있다니.’

    카라이의 마음속 어딘가에 늘 남아 있는, 창고에 갇혀 울며 떠는 아이도 이 순간만큼은 희미해졌다.

    “기꺼이, 기꺼이 하겠습니다.”

    ❀ ❀ ❀

    한편 페이런의 수도에선 새로운 소문이 퍼졌다.

    패트릭 왕자가 몬스터 토벌대를 이끌고 조용히 북부로 출발했다는 소문이었다.

    소문이 사실로 알려지자 수도 백성들은 왕자에게 환호했다.

    “역시 우리 패트릭 왕자님 같은 분이 없지!”

    “그분이야말로 왕이 되시면 페이런을 발전시킬 분이시라니까. 용감하시고, 백성들 생각하시고.”

    특히 공을 인정받으려고 하지 않고 묵묵히 싸우러 간 점이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왕실과 힘겨루기를 하는 친제국파 귀족들은 그런 여론에 어이없어했다.

    “뭐? 대가를 바라지 않는 진정한 백성 사랑? 떠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얘기가 도는데, 그 소문을 누가 뿌렸겠습니까?”

    “패트릭 왕자가 진짜 여우라니까요.”

    그런 친제국파 귀족들 중에서도 우두머리 격인 칼로시 대공은 특히 심기가 불편했다.

    자신에게도 아들이 넷이나 있는데 왜 패트릭 왕자처럼 제대로 하는 놈이 없단 말인가?

    “이 모자란 놈들. 이대로 패트릭 왕자가 왕위를 차지하게 둘 셈이냐?”

    칼로시 대공이 못마땅해하며 아들들을 닦달해 댔다.

    “누구든 뭐라도 해서 백성들에게 눈도장을 찍으란 말이다!”

    이 와중에 칼로시 대공의 사생아인 더포드 남작만이 대공의 잔소리에서 자유로웠다.

    그렇지만 남작은 지금 다른 근심에 정신이 팔려, 이불을 뒤집어쓰고 제 저택 침실에 처박혀 있었다.

    요양지에 머물며 수도로 돌아오지 않는 페이릴리.

    그녀의 소식이 궁금해서 공작가에 심어 둔 하녀에게 물었더니, 뜻밖의 말이 돌아왔던 것이다.

    페이릴리가 독 바른 쿠키를 먹고 쓰러졌다고.

    독이라니.

    더포드 남작은 너무나 놀랐다.

    트로우 경이 가지고 있던 약병을 훔쳐 쿠키에 발랐는데. 사랑의 묘약 같은 건 줄 알고 썼던 거였는데 독이었다니.

    얀 트로우는 트로우 백작가의 장남이었다. 트로우 백작가는 친제국파 귀족 중에서도 나름 크고 알려진 가문이었고.

    그런 집안의 귀족 영식이 품 안에 독을 가지고 다닐 줄이야.

    더포드 남작은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지른 건가.

    ‘그럼 내가 페이릴리에게 독을 쓴 거잖아?’

    손이 덜덜 떨렸다.

    루얀의 주먹 한 방에 팽이처럼 돌아 처박히던 귀족이 떠올랐다.

    ‘루얀 피어트가 알면 날 죽일 거야!’

    물론 루얀은 남작이 레아에게 최음제를 썼다고 해도 죽이려 들 터였지만.

    예상보다 큰 사고를 친 걸 알게 되어 놀란 나머지, 더포드 남작은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어떡하지?’

    똑똑.

    누군가 공포에 떠는 남작의 침실 문을 두드렸다.

    “누, 누구냐?”

    “남작님. 얀 트로우 경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벌떡.

    더포드 남작은 이불을 젖히며 일어났다.

    다 저놈이 원흉이었다.

    네놈이 품에 독약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화가 잔뜩 난 그가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트로우 경!”

    “아, 남작님.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이고 자시고, 어쩔 건가?”

    “예? 뭐가 말입니까?”

    따지려던 남작은 멈칫했다.

    네가 품에 독약 같은 걸 가지고 다니니까, 내가 훔쳐서 그걸로 사고 쳐 버렸잖아.

    제정신으론 할 수 없는 말이었다.

    “……페, 페이릴리가 독을 먹었다지 않는가! 루얀 피어트가 알면 날 죽이려 들 걸세!”

    아하.

    트로우 경은 남작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차렸다.

    제게서 훔쳐 간 비약을 페이릴리한테 먹여 놓고, 그게 독이었단 걸 알게 되자 전전긍긍하는 모양이었다.

    ‘꼴에 대형사고를 쳐 놓고 뒷걱정은 되는 모양이지.’

    속으로 남작을 비웃은 트로우 경이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페이릴리가 독을 먹은 게 남작님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 그게 자네 때문…… 아닐세!”

    할 말 안 할 말이 막 새어 나오는 걸 보니 어지간히 속이 타는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쉽겠는데? 조금만 밀어주면 아버지의 뜻대로 되겠어.’

    트로우 경은 시커먼 속을 숨기고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슨 말씀인지는 모르겠지만, 남작님께 근심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 그렇다네.”

    “왕실의 피를 이은 귀한 분께서 이렇게 혼자 근심하셔서 되겠습니까. 고민은 나누면 줄어드는 법이지요. 제가 도울 수 있을 수도 있고…….”

    듣기 좋은 소리를 이어 가던 트로우 경이 말을 늘였다.

    더포드 남작은 저도 모르게 귀를 세우고 집중했다.

    “……제가 돈만 주면 뭐든 하는, 몸 잘 쓰는 이들을 좀 알고 있는데.”

    트로우 경이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때론 원인을 치워 버리는 게 가장 빠른 해결책 아니겠습니까?”

    남작이 멍하니 그 말을 되뇌었다.

    “원인을 치워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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