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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22)화 (22/120)
  • 22화

    “다친 곳은? 없나?”

    “응. 없어.”

    그녀가 걱정 말라는 듯이 웃어 보였다.

    아직 눈이 울망거리는 줄도 모르고 특유의 씩씩한 미소를 짓는 걸 보니, 어쩐지 가슴께가 아렸다.

    ‘도대체 널 어째야 할지 모르겠다.’

    레아가 제 눈이 닿는 곳에서 안전하길 바랐다. 그렇지만 그녀가 믿는 대로, 뜻하는 대로 행동하는 모습에 심장이 크게 뛰었다.

    헬릭스는 깊이 한숨을 쉬었다.

    “제발 내가 보는 데서 사고를 쳐 다오.”

    ❀ ❀ ❀

    아이들을 제대로 눕히고 마나의 흐름을 조절해 놓고 나서, 헬릭스는 레아에게 설명했다.

    “카라이란 자가 내게 네 위치를 가르쳐 줘서 빨리 올 수 있었다.”

    “카라이?”

    “자신이 트로우 백작의 첩자라고 하더군.”

    “뭐?”

    레아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헬릭스는 카라이가 레아를 몰래 살피는 임무를 맡은 첩자였다고 말했다.

    “마나의 흐름을 읽어 봤는데, 거짓말은 아니었다.”

    “너 그런 것까지 할 줄 알……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그럼 이제껏 트로우 백작네 첩자가 날 계속 쫓아다녔는데 우리 기사들이랑 너도 눈치 못 챘단 말이야?”

    “그자는 좀 특수했다. 마법능력자라서.”

    “마법능력자?”

    헬릭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아 너처럼 제대로 된 마법사는 아니지만, 한두 가지의 마법은 쓸 수 있을 거다.”

    카라이에게서 들은 바로는 트로우 백작은 이런 실험을 한두 번 해 온 게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이렇게 비약을 아이들에게 먹이는 인체실험을 해 왔고, 카라이는 그 실험의 유일한 생존자로 마법능력자라고 했다.

    “애들에게 먹인 이 비약이 레아 네가 먹었던 드래곤 마나와 똑같더군. 아마도 드래곤 마나를 먹고 마법능력자가 된 듯싶다.”

    레아는 곰곰이 곱씹었다.

    트로우 백작은 아이들에게 드래곤 마나를 먹여 왔다. 카라이는 거기서 혼자 살아나 마법능력자가 되고, 레아도 먹고 살아나서 마법사가 되었다.

    “……그럼 드래곤 마나를 먹고 살아나기만 하면 마법능력이 생기는 거야?”

    “살아난다면 그렇다.”

    헬릭스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내가 살던 때에도 드래곤 마나를 얻어 마법사가 되려는 이들은 많이 있었다. 마나를 다루는 자질은 없지만 마법사가 되고 싶은 이들에겐 유일한 방법이니까. 하나 거의 다 죽고 말았지.”

    드래곤 마나는 인간의 몸이 감당할 수 없는, 농축된 마나 덩어리나 다름없었다. 대개의 인간은 흡수하자마자 쇼크상태에 빠지기 마련이었고, 극소수의 적합자만 마나를 느끼는 마법사의 자질이 생겼다.

    “이상하네. 트로우 백작은 그 방법을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헬릭스 시대처럼 마나와 마법이 발달한 시대도 아닌데. 다들 이야기 속에나 나오는 줄 안다고.”

    “나 역시 의심스럽군. 어디서 어떻게 드래곤 마나를 얻었는지도 수상하다.”

    헬릭스의 말에 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끙 하고 미간에 주름을 세웠다.

    “역시 날 죽이려고 한 건 트로우 백작일까?”

    트로우 백작은 드래곤 마나를 비약이라 부르고, 레아가 비약을 먹은 것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가 죽지 않자 카라이를 파견해서 지켜보게 시키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미심쩍단 말이야.’

    트로우 백작이 진짜 자신을 죽이려 했다면 이렇게 그와 관련된 특수한 비약이 아니라 흔히 구할 수 있는 평범한 독약으로 죽였을 것이다. 그편이 흔적도 덜 남고, 추적도 피하기 좋을 테니까.

    “트로우 백작을 추적할 생각이라면 힘껏 돕겠다.”

    헬릭스의 단호한 말에 레아는 새삼 그의 눈을 쳐다봤다.

    처음엔 냉랭하다고만 생각했던 회색 눈인데, 요즘 자꾸 따뜻하게 보였다. 특히 그녀에게 집중해서 지그시 내려다보며 눈을 맞출 때면 다정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지금도 그랬다.

    저 눈빛.

    마치 레아를 죽이려 했으니까 트로우 백작을 처단하겠다는 듯한 눈이었다.

    ‘아냐, 아냐. 착각하지 말자.’

    레아는 속으로 생각했다.

    수호자로서의 의무가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고, 약자는 다 지켜야 한다는 헬릭스였다. 레아가 특별해서 저러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헬릭스는 드래곤에게 원한이 있으니까, 드래곤과 관련되어 보이는 트로우 백작 일에 저렇게 적극적으로 나서는 게 당연해.’

    괜히 마음이 긁혔다. 레아는 시선을 내리깔며 말했다.

    “일단 애들부터 살리고. 도대체 뭘 하려고 애들을 이렇게 죽여 가면서까지 일을 벌였는진 모르겠지만…….”

    “내 생각엔 트로우 백작이란 자는 인체실험으로 마법사나 마법능력자를 만들려고 했던 것 같다.”

    헬릭스의 말에 레아가 입을 딱 벌렸다. 전혀 생각도 못 했는데 듣고 보니 아귀가 맞았다.

    “아니…… 그런…… 미친?”

    충격받은 그녀 앞에서 그가 말했다.

    “예전 마법의 시대엔 간혹 그런 실험을 하는 이들이 있었다.”

    “와아, 어떻게…… 악당들 하는 짓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더럽구나?”

    레아의 말에 헬릭스가 쓰게 웃었다.

    “그러게 말이다.”

    “그땐 어땠어? 성공한 경우가 많았어?”

    “거의 실패했다. 가장 최악이었던 건, 한 왕국의 왕이 마법사 군단을 만들려고 젊은이들을 징집해서 강제로 드래곤 마나를 먹였을 때였지.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지만 마법능력자는 한 줌이었다.”

    “아니 그런 국가 단위로 미친놈을 보았나. 그 왕은 어떻게 됐어?”

    물어 놓고 그녀는 아차 싶었다. 헬릭스가 수호자로서 응징했다면 좋은 기억만은 아닐 테니까.

    그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런 표정 지을 것 없다. 좋은 끝은 아니었지만 내가 개입하진 않았으니까.”

    “그래?”

    “그렇다. 반란이 일어나고, 마법능력자들이 배신하고, 마탑에서 응징에 나서고, 마지막에 제 새끼의 드래곤 마나를 빼앗긴 드래곤이 와서 왕궁을 낙뢰로 불태웠다. 내가 나설 사이도 없었지.”

    무슨 마법 복수 종합세트 같은 일화에 레아도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렇게 당해도 싸다.”

    “동감이다.”

    오래 아팠던 그녀로선 남의 목숨 가지고 장난질하는 행태에 더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레아는 속으로 투덜댔다.

    도대체가 일국의 왕이란 놈이 무슨 생각으로 백성들을 상대로 그런 짓을 하는 건지. 자기 아니고 다른 사람 목숨은 파리 목숨인가?

    트로우 백작도 그 왕이란 작자와 똑같은 놈이었다.

    많은 애들을 죽여도, 마법능력자 몇 건지면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을 게 분명했다.

    신분 좀 높으면 다냐? 돈 좀 많으면 다냐?

    전생 소시민 근성을 못 버리고 씩씩대던 그녀는 퍼뜩 깨달았다. 자신이 지금 신분 높고 돈 많은 놈들 욕할 처지가 아니었다.

    ‘잠깐. 그럼 나라고 못 할 게 뭐야?’

    레아는 헬릭스를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헬릭스, 우리도 하자.”

    “뭘 말인가?”

    ❀ ❀ ❀

    레아 일행은 몰랐지만 노예상 일당은 원래 한 명이 더 있었다. 얼굴에 흉터가 있는 사나운 인상의 젊은 사내였다.

    운 좋게 헬릭스를 피한 놈은 도망쳐서 급히 트로우 백작에게 전서구를 날려 보냈다.

    “이, 이게 무슨 말이냐?”

    수도에서 서신을 받은 백작은 놀란 나머지 얼굴빛이 창백해졌다.

    “사들인 애들이 발각됐다니?”

    어쩐지 노예상 맥스에게서 연락이 없다 했더니, 이게 무슨 일인가. 트로우 백작은 식은땀을 훔쳤다.

    이번 인체실험이 발견되면 왕실에서도 이제껏 일어났던 수도의 부랑아 실종사건들을 조사할지 모른다. 부랑아들을 납치한 깡패들이 입을 열면 트로우 백작에게까지 추적이 들어오는 건 순식간이었다.

    ‘어떤 실험을 한 건지, 뒤에 누가 있는 건지 알려진다면…….’

    그 일만은 피해야 했다.

    하얗게 굳은 제 아비를 보고 트로우 경이 서신을 집어 들어 읽었다. 덩달아 긴장했던 그의 얼굴이 풀어졌다.

    “아버지, 걱정 마시죠. 이놈이 제정신이 아닌가 봅니다. 움막을 습격한 놈들이 귀족과 그 수행원이라니…… 북부엔 영주도 없는데 무슨 귀족이 있다고요?”

    “멍청한 놈.”

    “예?”

    “북부에 귀족이 왜 없느냐? 페이릴리가 요양하러 갔지 않느냐!”

    트로우 경의 얼굴이 굳었다. 백작이 핏대를 세우며 아들을 몰아붙였다.

    “하필 페이릴리한테 들키다니! 더포드 남작이 페이릴리한테 비약을 썼으니, 그 계집이 의심하기 시작하면 끝이다! 네놈이 비약을 몰래 가지고 다니지만 않았어도……!”

    “아, 아버지. 진정하세요. 귀족이라고만 했으니, 그게 꼭 페이릴리가 아닐 수도 있잖습니까?”

    트로우 경이 급히 말을 이었다.

    “또 페이릴리가 애들을 발견한 게 맞다고 해도, 비약이 뭔지 어찌 알고 의심하겠어요? 그게 진짜 뭐 하는 물건인지는 우리도 모르잖아요!”

    멍청한 아들이 변명하느라 하는 소리였지만 일리는 있었다.

    십수 년 동안 몰래 애들을 사들이고 비약을 먹여 왔지만 그 정체가 뭔지 짐작조차 못 하고 있었으니까.

    트로우 백작이 이마를 짚으며 숨을 골랐다.

    “……아주 안심할 수는 없다. 페이릴리를 감시하라고 보낸 카라이 놈도 연락이 없으니.”

    트로우 경은 왜 그놈을 보내셨냐고 하려다가 백작의 눈치를 보며 말을 바꿨다.

    “그럼 어쩌시려고요?”

    “들키기 전에 이쪽에서 먼저 제거해야 하지 않겠느냐.”

    트로우 경이 순간 침을 꼴깍 삼켰다.

    “진심이십니까? 뒷감당은…….”

    “뒷감당을 왜 우리가 하겠느냐?”

    여유를 찾은 백작이 느릿하게 말했다. 주름진 눈가 사이로 눈이 교활하게 반들거렸다.

    “페이릴리에게 비약을 먹인 건 우리가 아니라 더포드 남작인데. 마침 잘됐지 않냐. 그자가 찔려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다지?”

    트로우 백작이 낮게 말했다.

    “더포드 남작의 손을 빌려 백합을 꺾자꾸나.”

    ❀ ❀ ❀

    그 시각, 북부에서는 트로우 백작이 상상도 못 하는 모의가 벌어지고 있었다.

    레아가 주치의와 카라이를 불러 자기 계획에 동참하라고 했던 것이다.

    “절…… 공녀님의 사람으로 받아 주시는 겁니까?”

    카라이는 얼떨떨했다. 설마 첩자인 자신을 이렇게 끌어들일 줄은 몰랐다.

    레아는 시원하게 말했다.

    “백 퍼센트 믿을 순 없으니 안전조치는 할 거야. 불만 있으면 그만두고.”

    카라이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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