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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21)화 (21/120)
  • 21화

    필의 이야기는 그에게도 익숙한 내용이었다.

    아이들을 모아 비약을 먹이고, 간혹 살아나는 아이만 거두는 잔혹한 인체실험.

    ‘그렇다면 그냥 노예상이 아닐 텐데…….’

    적어도 트로우 백작과 관련된 놈일 터였다.

    ‘위험하다.’

    지난번 마녀사냥 이후 레아를 전과 다른 눈으로 보고 있었지만, 그는 아직 트로우 백작의 첩자였다. 카라이는 눈을 가늘게 뜨며 레아가 떠난 방향을 쳐다보았다.

    “…….”

    곧 그가 결심한 듯 움직였다.

    ❀ ❀ ❀

    “저기예요.”

    움막 뒤, 약간 높은 바위 위에서 레아와 필은 아래를 내려다봤다.

    레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막상 여기까지 오자 약간 떨렸다.

    ‘무슨 건물이 창문 하나 없어? 안을 들여다볼 수가 없잖아.’

    아무래도 애들 상태를 확인하려면 들어가 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레아가 조심스레 일어섰다.

    “진짜 들어가게요?”

    필이 불안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려면 후딱 해야지. 보초 서는 사람이 안 보이는 지금이 기회야.”

    “아저씨들이 돌아오면 어쩌려고요?”

    “너는 붙잡히면 안 되니까 여기 있어. 혹시 내가 안 돌아오면…….”

    그녀가 제 귀걸이 한쪽을 떼어 필의 손에 쥐여 주며 당부했다.

    “마을로 돌아가서, 요즘 여기 온 귀족 별장이 어디냐고 물어봐.”

    “귀족 별장이요?”

    “응. 이 근처에 하나밖에 없으니까 거기 가면 돼. 별장에 가서 이걸 보여 주면서 레아 피어트 공녀님의 심부름으로 왔다고 하면 네 말을 들을 거야.”

    “레아 피어트 공녀님…….”

    필은 귀걸이를 쥐며 되뇌었다.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는 긴장에 아이가 뻣뻣해졌다.

    “일단 너부터 안 들키게 조심하고. 난 귀족이라 몸값 때문에 너보단 안전할 테니까.”

    레아의 말에 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바위에서 내려가 조심조심 움막으로 다가갔다.

    펄럭.

    움막 입구를 막은 거적때기를 들춘 그녀는 깜짝 놀랐다.

    작은 창고만 한 움막은 빛도 안 들어오는 가건물이었고, 맨 흙바닥에 열댓 명쯤 되는 아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레아는 본능적으로 서둘러 들어갔다.

    “얘들아.”

    그녀가 조심스레 불렀다.

    “얘들아?”

    아이들은 미동도 없었다.

    벌써 잘못된 건 아니겠지? 더 빨리 왔어야 했나?

    레아는 불안으로 크게 뛰는 심장을 눌렀다. 그녀의 손이 덜덜 떨리며 가까운 데 엎어져 있는 아이를 살폈다.

    ‘엄청 뜨거워!’

    아이는 의식 없이 약한 숨을 쉬며 열에 끓고 있었다.

    그녀는 급히 다른 아이들을 확인했다.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일곱 살에서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었다. 하나같이 소매 끝이 꼬질꼬질하고 짧은 손톱 끝이 새카맸다.

    레아는 울컥했다.

    집에서도 돌봄받지 못하는 아이들이었을 텐데.

    얘들이 뭘 잘못했다고 부모 손에 팔려, 이런 데 갇혀서, 이런 꼴을 당하고 있는 거야? 아직 어린애들인데, 왜 이 애들한테 이상한 약을 먹이는 거야?

    그녀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아이를 뒤집어 숨을 확인했다. 어린 여자애가 눈을 떴다.

    “천사…….”

    여자애가 비몽사몽간에도 레아에게 매달렸다.

    “천사님…… 저 데려가요? 저 착한 애예요…….”

    “그래, 착한 애니까 정신 차려 봐, 응?”

    그렇지만 아이는 불덩이 같은 볼을 그녀의 다리에 비비며 끙끙댈 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어떡하지?

    쩔쩔매며, 레아는 제 다리를 붙든 애를 끌어안고 걸음을 떼었다. 생각보다 무거웠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안 되겠어. 일단 놓고 내가 내려가서, 사람들을 데려와야…….’

    그 순간 밖에서 새된 휘파람 소리가 났다.

    ‘뭐지?’

    레아가 급히 아이를 내려놓고 움막 입구를 향해 다가갔다.

    그렇지만 너무 늦었다.

    펄럭!

    움막의 입구를 젖히고 두 남자가 씩씩대며 나타났다. 투실투실한 중년남자 하나와 얼굴이 거의 수염으로 가려진 덩치 큰 남자였다.

    “이 쥐새끼가!”

    덩치 큰 수염은 한 손으로 누군가의 멱살을 쥐고 끌고 있었다.

    ‘필!’

    놈이 솥뚜껑만 한 손으로 필을 붙들어 올렸다.

    “겁도 없이 도망을 쳐? 후, 너 때문에, 후, 온 산을 다 뒤졌다! 넌 뒤졌어, 이 쥐새끼!”

    “켁! 케엑!”

    필이 버둥댔지만 그럴수록 수염의 손은 더 억세게 아이의 멱살을 잡았다.

    레아는 상황을 알아차렸다.

    ‘방금 그 소리가 필이 낸 소리였구나!’

    혼자 도망치라고 했지만 차마 못 그러고 그녀에게 위험을 알리려 했던 것이다.

    레아가 하얗게 질린 채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필이 붙들려 있는 데다 저쪽은 두 명. 섣불리 파이어볼을 쓸 순 없었다.

    ‘화염마법은 이게 문제라니까!’

    다른 화염마법을 쓸까? 아니었다. 지금 걸어 다니는 화염방사기가 되어 봤자 자신도 아이들도 위험해진다.

    마법 말고 다른 방법을 써야 해.

    그녀가 놈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 애를 놔줘라!”

    중년과 수염의 시선이 레아에게 쏠렸다. 수염은 너무 놀라 필을 떨어트릴 뻔했다.

    “우와, 대장.”

    수염이 멍청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예쁜 여잔 처음 봐요. 저런 여잔 얼마나 받아요?”

    “부르는 게 값 아니겠냐?”

    레아의 표정에 금이 갔다.

    ‘저놈들이?’

    레아 피어트로 살면서 예쁘다 아름답다 소리는 지겹게 들어봤지만, 제 미모를 바로 돈으로 계산하는 기분 더러운 반응을 보이는 놈들은 또 처음이었다.

    레아는 구겨지는 표정을 애써 폈다.

    “나는 귀족이다. 파는 것보다 몸값을 받는 게 남는 장사지.”

    “웃기시네!”

    수염이 희번득 눈을 굴리며 비웃었다.

    “부르는 게 값이랬어. 네년만큼 예쁘면 파는 게 남지!”

    눈이 돌아 레아에게 다가오려는 수염을 중년이 제지했다.

    “아니야. 진짜 귀족 같다.”

    “대장, 여기 귀족이 어딨어요? 영주도 없다면서?”

    “무슨 영문인진 모르겠지만 귀족이야. 저 드레스, 한두 푼짜리가 아니야.”

    중년이 눈을 가늘게 뜨며 품평하듯 레아를 자세히 훑었다.

    “머릿결도 봐라. 하루 이틀 관리한다고 저런 백금발이 나올 거 같냐? 귀족이 아니고서야 누가 저렇게 머리카락에 오래 정성을 들이겠느냐?”

    “보는 눈이 있군.”

    레아가 제 백금발을 과시하듯 쓸어내리며 눈앞의 남자들을 새삼 살폈다.

    대장이라 불리는 중년남자가 노예상이고, 수염은 덩치만 큰 힘쓰기 담당 같았다. 그녀는 노예상 쪽을 향해 몸을 틀었다.

    “그쪽은 말이 좀 통하겠네.”

    레아가 도도하게 말했다.

    “나는 피어트 공작가의 공녀 레아 피어트다.”

    “……피어트 공녀?”

    예상 못 한 거물의 등장에 노예상은 놀라 그녀를 쳐다보았다.

    듣고 보니 소문대로 장님도 눈을 뜰 만한 미모였다. 진주 같은 뽀얀 피부와 긴 백금발, 새파란 눈동자.

    “진짜 페이릴리?”

    “……그 별명은 대체 어디까지 퍼진 거야?”

    눈썹을 찡그렸던 레아가 다시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잘됐어. 얘기가 통할지도 몰라.

    그녀는 속으로 안도했다. 페이릴리까지 알고 있으면 피어트 공작가에서 후사할 거라고 생각할 테니까.

    그렇지만 노예상은 예상과 다르게 반응했다.

    “얼른 죽여!”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수염에게 명령한 것이다.

    “뭐?”

    레아는 놀랐다. 수염도 놀랐다.

    “대장, 무슨 소리쇼? 죽일 거면 팔아야지!”

    “이 멍청한 놈, 피어트 공작가란 말이다, 피어트! 그런 집 딸을 해치면 백작이 우릴 감싸 주겠냐?”

    “그러니까 우리 가문에 전령을 보내서 몸값을 받으면 되잖아!”

    “몸값?”

    노예상이 히스테릭하게 외쳤다.

    “날 바보로 알아? 피어트 가문에서 페이릴리를 얼마나 애지중지하는지 페이런 전체에 소문이 파다한데, 순순히 몸값만 줄 리 있냐?”

    레아는 당황했다.

    이게 아닌데? 돈으로 협상하면 통할 줄 알았는데?

    “돈 준다니까? 얘들 파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준다니까?”

    “몸값 주는 척하면서 뒤로 찾아내서 죽일 거 아니냐!”

    그녀는 깨달았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내가 범죄자 놈들한테 일반인 상식을 바랐구나!’

    레아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아니야! 우리 가문에서 내 목숨 가지고 장난칠 리 없어!”

    “웃기시는군. 귀족들 앞뒤 다른 걸 한두 번 겪은 줄 알아? 공녀님 발이 공작가에 닿는 순간 페이런 암흑길드에 내 목 현상금이 걸릴 텐데!”

    노예상의 눈이 두려움과 악으로 번들거렸다.

    “피어트 공녀께서 왜 여기서 어슬렁거리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오늘 여기서 죽어 주셔야겠어. 야, 그 쥐새끼한테 약 먹여! 같이 치워 버리게!”

    “안 돼!”

    레아가 사색이 되어 손을 뻗었다.

    콰광!

    그 순간, 움막 한쪽 벽면이 내려앉으며 무언가가 수염을 덮쳤다.

    “커억……!”

    긴 은발이 펄럭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수염이 무릎을 꿇었다.

    쿵!

    놈의 거대한 몸이 큰 소리를 내며 바닥에 무너져 내렸다.

    그사이 아이를 구해 낸 헬릭스가 레아를 향해 다가왔다.

    “헤, 헬릭스?”

    “……일단 애부터 받아라.”

    필을 그녀에게 넘긴 그가 고개를 돌리며 팔을 뻗었다.

    “크악!”

    문간을 향해 뛰던 노예상이 화살에 맞은 것처럼 엎어졌다.

    헬릭스가 마나를 쏴서 맞힌 것이었다. 그가 쓰러진 노예상에게 다가가 다리를 밟았다.

    뽀각.

    팔도 밟았다.

    뽀각. 뽀각.

    고통에 이미 기절해 소리도 못 내는 노예상을 보며, 레아는 얼떨떨해졌다.

    ‘헬릭스가 이렇게 강했었나?’

    지난번 몬스터 잡을 때도 힘 봉인됐다고 그랬던 거 같은데?

    “헬릭스…….”

    헬릭스는 대꾸 없이 성큼성큼 레아에게 다가왔다. 평소에도 냉정한 얼굴은 가면이라도 쓴 양 무표정했다.

    그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퐁.

    떨리는 손으로 마나가 들어오자 온몸의 긴장이 확 풀렸다.

    “……무사한가.”

    레아의 손을 잡은 헬릭스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목소리도.

    그녀는 어쩐지 같이 울컥해져서 헬릭스의 양손을 꽉 잡아 올리고 제 이마를 파묻었다.

    “응. 미안.”

    그가 제 손에 이마를 묻은 레아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파란 눈이 빤히 그를 담는 걸 보니 그제야 피가 도는 기분이었다.

    둘이 헤어졌던 공터에 레아가 없는 걸 봤을 땐 가슴이 내려앉았다. 손에 낀 계약자의 반지가 반짝여서 그녀가 무사한 줄은 알았지만,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헬릭스는 떨리는 양손으로 레아의 뺨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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