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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20)화 (20/120)
  • 20화

    “헬릭스가 그거 조사하러 가면 나 혼자 연습해야 하잖아. 차라리 같이 갈래. 쫓아다니다 보면 뭐라도 배우겠지.”

    그녀가 조심스레 덧붙였다.

    “혹시 방해되면 말고.”

    방해되긴 했다.

    레아가 근처에 있으면 온 신경이 그쪽으로 쏠리고, 안전한지 별일이 없는지 자꾸 손에 낀 반지를 확인하게 되었으니까.

    “전혀 아니다.”

    그렇지만 헬릭스는 강하게 부정하며 고개를 저었다.

    “진짜? 같이 가도 되지?”

    “당연하다.”

    어울리지 않게 재차 거짓말을 하며, 그는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레아가 좋아하며 환하게 웃는 걸 보자 제가 한 말이 참말인 것 같았다.

    ‘옆에 레아가 있으면 심장박동과 머리가 좀 이상해지는 것 같지만…….’

    그 정도는 수호자인 자신의 철통같은 이성으로 커버할 수 있었다.

    ‘계약자의 실력을 키우는 게 더 중요한 일이다.’

    ❀ ❀ ❀

    한편 헬 산맥의 어느 산자락.

    얼기설기 지은 움막 안에서 노예상 맥스는 어린애들을 머릿수를 세고 있었다.

    “뭐야? 왜 수가 안 맞아?”

    맥스가 버럭 외쳤다. 옆에 있던 수염이 머리를 긁적였다.

    “하나, 둘, 셋…… 열여섯 명 맞는뎁쇼.”

    맥스가 성질을 냈다.

    “이런 빙충맞은 놈을 봤나. 어제 온 하나는 왜 빼먹어?”

    그제야 수염이 놀라 다시 아이들의 수를 세었다. 열여섯. 다시 세어도 열여섯 명이었다.

    “한 놈이 모자랍니다!”

    “어디 갔어? 도망친 거 아냐?”

    “제가 이제껏 문 앞을 지키고 있었는데, 제까짓 게 어떻게 도망을 갑니까요?”

    수염이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산만 한 덩치에 움막 문이 거의 가려졌다.

    “빙충맞은 놈. 애새끼들이 얼마나 영악한데…….”

    노예상 맥스는 눈을 부라리며 움막 안과 아이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일이 거의 끝나 가는데 이렇게 망칠 순 없었다.

    수염 옆에 있던 비열한 인상의 흉터가 찍 침을 뱉었다.

    “남은 애들부터 실험하시죠?”

    “찾아야 돼. 한 놈 없어진 건 그렇다 쳐도, 고놈이 어디 가서 어른들이라도 불러오면 낭패야.”

    맥스가 인상을 찡그렸다.

    ‘트로우 백작가의 일만 아니었어도 이런 일은 안 맡는 건데.’

    노예상으로 잔뼈가 굵은 그였지만 이렇게 찝찝한 의뢰는 처음이었다.

    ‘수도에서 먼 시골로 가서 애들을 사들이게. 북부가 좋겠군. 다스리는 영주가 없으니.’

    ‘예, 예. 작년부터 흉년이니 농가에선 애들을 헐값에 팔 겁니다.’

    입을 줄이려는 가난한 집에서 돈 몇 푼에 애들을 사들이는 건 맥스도 많이 했던 짓이었다.

    그렇지만 그 뒤에 이어진 트로우 백작의 말은 귀를 의심케 했다.

    ‘사 놓은 애들을 모아서 이 약을 먹이고, 사흘 후에 살아남은 애만 데리고 오게.’

    한마디로 애들을 사 모아서 독약을 먹인다는 게 아닌가?

    살아남는 애만 데리고 오라는 걸 보니 먹으면 거의 죽는 게 틀림없었다.

    ‘사다가 노예로 부려 먹는 것도 아니고, 돈 버리고 죽이는 그딴 짓을 왜 하는지 알 수가 없어.’

    그렇지만 언제는 귀족들의 속 생각까지 알고 일했던가. 그는 제게 의뢰하던 트로우 백작의 낮고 가느다란 목소리를 떠올렸다.

    ‘들키지 말고 은밀하게 해야 하네.’

    맥스는 부르르 떨었다.

    트로우 백작은 귀족 중에서도 손속이 더럽기로 유명한 자였다.

    여기서 애들로 실험한 게 알려지면, 소문을 묻으려는 백작의 손에 제 목부터 뎅겅 떨어지리라.

    “어서 찾아야 한다!”

    “대장! 여기에!”

    함께 움막을 뒤지던 흉터가 한구석을 가리켰다.

    언제 팠는지 개구멍만 한 땅굴이 파여 있고, 그 바로 앞에 토기를 놨던 자국이 선명했다.

    “영악한 놈이 굴을 파고 요강 항아리로 가려 뒀나 봅니다.”

    화가 치솟은 노예상 맥스의 얼굴이 시커메졌다.

    “이 애새끼 당장 잡아 와!”

    ❀ ❀ ❀

    그 시각, 레아와 헬릭스도 헬 산맥을 뒤지고 있었다.

    둘은 오염된 티고네 나무 근처를 조사했지만 별다른 이상을 찾지 못했다.

    “아무리 봐도 마나의 흐름이 이상한 건 모르겠는데?”

    레아의 말에 헬릭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느끼기에도 그렇다.”

    “마나 때문이 아니라 다른 것 때문에 꽃 색깔이 바뀐 건 아닐까? 수국은 토양 성질에 따라 꽃색이 바뀐대.”

    “그 방향도 생각해 봐야겠군.”

    대답하던 헬릭스가 레아를 빤히 내려다봤다.

    “왜?”

    “레아, 지금 좀 지친 거 아닌가?”

    그녀가 움찔했다.

    “……아닌데.”

    “숨소리가 좀 높아졌다. 바위를 보자마자 와서 앉은 걸 보니 다리도 아파하는 것 같고.”

    “……많이 지친 건 아니야.”

    그가 걱정스레 레아의 손목을 잡고 맥을 짚었다.

    “이렇게 체력이 없어서야.”

    “내가 약했던 건 맞지만 지금은 귀족 영애 평균이거든? 헬릭스 네가 너무 강한 거거든요?”

    “믿을 수 없다.”

    레아는 한숨을 폭 쉬었다. 아무래도 헬릭스는 처음 치료했던 기억 때문에 그녀를 유리인형처럼 약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 상태로 나와 함께 돌아다니는 건 무리다. 내가 주위를 돌아보는 동안 쉬고 있는 게 어떤가.”

    “으…….”

    함께하고 싶었지만 좀 지친 것도 사실이었다.

    이대로 다니다간 헬릭스의 조사에 방해가 되겠지. 레아는 포기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여기서 햇볕 쬐고 있지 뭐.”

    “겸사겸사 호흡하면서 마법훈련을 하는 건 어떤가?”

    “아니 스승님, 그건 아니죠.”

    레아가 정색하자 헬릭스가 피식 웃었다.

    “이럴 때만 스승님인가.”

    “그럼요.”

    헬릭스는 빤빤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레아의 코를 살짝 꼬집었다.

    “훈련이나 해라.”

    “아야, 안 한다니까?”

    헬릭스가 혼자 주위를 돌아보러 간 뒤, 레아는 구시렁거리며 가부좌를 하고 마나를 느끼는 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후. 난 너무 성실한 학생인 거 같아. 이렇게 성실해서 단박에 대마법사 되고 그러면 어쩌지?”

    종알거려 봐도 틱틱대는 헬릭스가 없으니 재미가 없었다.

    진짜 훈련이나 열심히 해야겠네. 그녀는 탁탁 어깨를 흔들고는 자세를 바로 했다.

    “……후우.”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이 점점 느릿해졌다. 고개가 앞으로 기울었다.

    초가을의 낮 공기는 아직 따뜻했고 햇빛도 따사로워서 자꾸 졸음이 왔다.

    부스럭.

    ‘응?’

    잠결에 들리는 소리에 그녀가 몸을 곧추세웠다.

    ‘잘못 들었나?’

    버석.

    분명 뭔가 움직이는 소리였다. 잠이 싹 달아나, 레아는 숨을 죽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였다.

    파바밧!

    갑자기 눈앞에서 덤불이 갈라지며 시커먼 게 튀어나왔다.

    “으악!”

    “으히이익!”

    레아의 비명에 튀어나온 상대도 놀라 소리를 지르며 주저앉았다.

    ‘사, 사람?’

    속도가 무시무시해서 사슴 같은 건 줄 알았는데 사람이었다. 그녀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린애잖아?’

    열 살 좀 넘었을까? 아직 작은 소년이 숨을 몰아쉬며 그녀를 올려다봤다.

    얼굴과 온몸에 나뭇가지들에 쓸린 생채기가 가득했다. 길도 아닌 산자락에서 빠르게 계속 달린 게 틀림없었다.

    “도, 도와주세요!”

    “뭘 말이니?”

    레아의 물음에 아이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는데.

    급박한 동작에 지켜보는 그녀의 마음도 급해졌다.

    “말해 봐. 어떻게 도와 달란 소리니? 무슨 일인데?”

    “아저씨들을 막아 주세요!”

    “아저씨들?”

    아이가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아저씨들이…… 애들한테 약 먹인대요! 죽을 거래요!”

    “뭐?”

    ❀ ❀ ❀

    아이를 채근하고 달래 가며 들은 사연은 충격적이었다.

    어린 소년의 이름은 필, 근처 마을의 양치기였는데 며칠 전 웬 아저씨들에게 팔렸다. 마을에 갑자기 나타나 아이들을 사 가는 아저씨들이었다.

    “……노예상인가?”

    레아가 중얼거렸다.

    페이런 왕국에는 공식적으로는 노예가 없지만 암암리에 거래되고 있었다. 보통 가난한 집 아이들을 푼돈에 사다가 노예가 제도화되어 있는 오켄 제국에 팔아넘기는 식이었다.

    그렇지만 좀 이상했다.

    아무리 여론이 안 좋아도 노예상들이 북부처럼 외지고 먼 곳까지 와서 아이들을 사다니, 수지가 안 맞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 아저씨들이 너희에게 어떻게 했어?”

    이어지는 필의 이야기는 더 이상했다.

    필은 다른 형제들도 많은데 저를 파는 것에 반항해서 산으로 도망쳤다가, 결국 잡혀서 다른 애들보다 늦게 끌려갔다고 했다.

    하루 먼저 가 있던 동네 애들은 그사이 병든 닭처럼 변해 있었다.

    필은 형제들 사이에서 치이면서 자랐고, 코찔찔이 때부터 양치기로 일해서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아이는 노예상 일당이 주는 물과 빵을 안 먹고 감추고는 다른 애들처럼 잠든 척했다.

    애들이 다 자는 줄 알고 방심한 노예상 일당은 떠들었다.

    ‘한 명만 더 사 오면 진행할 거다. 약을 준비해 둬.’

    ‘먹이면 죄다 죽는다면서요?’

    ‘대개는 죽는다지. 사흘간 지켜보고 안 죽는 애가 있으면 데려오라 하셨다.’

    ‘니미, 여기서 사흘이나 더 죽치고 있으라고요?’

    ‘시체는 어떻게 할깝쇼?’

    ‘태워야지.’

    “뭐?”

    듣고 있던 레아가 눈을 크게 떴다.

    “애들한테 약을 먹이고, 죽으면 태운다고?”

    필이 작은 머리를 열심히 끄덕였다.

    “똑똑히 들었어요!”

    레아는 고민했다.

    노예상이 돈 주고 사 온 애들을 일부러 죽이려 하다니. 의심스러운 이야기긴 했지만, 도망치던 아이가 지어낸 얘기라고 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구체적이었다.

    “그럼 다른 애들은 아직 거기 있고?”

    “예.”

    필이 기죽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레아는 그 표정을 살피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만에 하나라도 아이의 말이 사실이라면 큰일이었다.

    확인해 봐야겠다.

    ‘애들이 위험하다는데, 가서 살펴보는 거에 돈 드는 것도 아니잖아. 슬쩍 보기만 하고 오는 거면 괜찮지 않을까?’

    그녀가 흘깃 헬릭스가 걸어간 산 쪽을 바라봤다.

    ‘여차하면 마법을 써도 되고. 애들한테 이상한 약을 먹인다니까, 일단 나라도 빨리 가 봐야겠어.’

    결심한 그녀가 물었다.

    “필, 나를 그 노예상의 움막으로 안내해 줄 수 있겠어?”

    ❀ ❀ ❀

    부스럭.

    레아가 필과 함께 떠난 바위 근처에서 풀숲을 헤치며 한 남자가 나타났다.

    레아를 따라다니던 첩자 카라이였다.

    ‘애들을 사 와서 약을 먹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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