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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19)화 (19/120)
  • 19화

    북부의 별장을 지키는 피어트 기사단 2조는 실력이 출중한 기사들이었다.

    ‘아무래도 루이지 혼자 두기 불안해. 우리 기사 한 명이 빨리 호위로 가 주면 든든하겠는데.’

    레아는 고민하다 바이든 경을 불러 의논했다.

    “마침 적당한 단원이 있습니다.”

    바이든 경이 밝은 얼굴로 말했다.

    “북부 출신인데 은퇴를 고민하는 기사라, 말씀하신 호위 임무에 딱일 겁니다.”

    “은퇴? 나이가 많나?”

    “아닙니다. 이제 갓 서른인데 부상이 잘 회복되지 않아서요.”

    바이든 경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 기사는 기사단에 짐이 될까 봐 은퇴를 신청했을 뿐, 어디 가서 뒤지는 실력이 아니라고 말이다.

    “충성심도 높고, 눈에 띄는 활약이 적어 그렇지 지금까지 쌓은 공도 적지 않습니다. 아직 젊은 기사인데 벌써 검을 놓는 게 안타까워 말려 왔습니다만…….”

    “그래? 검을 놓을 정도로 부상 입었으면 호위 업무는 괜찮나?”

    “피어트 기사단의 정예업무를 못 맡는다는 거지, 이런 산골의 호위쯤이야 끄떡없습니다. 마을 장정들이 17대 1로 덤벼도 이길 겁니다.”

    그 정도면 안심이었다.

    하긴 누가 훈련시켰는데. 제 둘째 오빠를 떠올린 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런데 그 정도면 은퇴 신청 안 하고 계속 근무해도 될 텐데, 왜 은퇴 신청을 했지?”

    “기사의 자존심이 뭔지, 정예기사단인 피어트 기사단에 자신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사기가 떨어질 거라더군요.”

    “아하.”

    그런 성격이라면 루이지의 호위로 믿을 만했다. 실력이며 처지도 호위 업무에 적합할 것 같았고. 그녀는 결정을 내렸다.

    “알았어. 그럼 바이든 경이 조치하도록 해.”

    “이런 기회가 생기다니, 녀석도 공녀님께 감사드릴 겁니다.”

    ❀ ❀ ❀

    그날 오후.

    북부 출신 기사 딜런 경이 찾아와 깊이 고개를 숙였다.

    “공녀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렸다.

    “이제 고향으로 내려가 검술 선생을 하는 길밖에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직 피어트의 기사로 남아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 보니까 진짜 아직 젊구나.’

    바이든 경이 왜 걱정했는지 이해가 갔다.

    그녀도 오빠 때문에 기사가 어떤 건지 조금은 알고 있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검을 수련하고, 그중에서도 재능이 있는 소수만이 기사가 되었다.

    피어트 공작가의 기사가 될 정도라면 노력도 미친 듯이 했을 테고, 인생의 태반을 검과 함께 보낸 이들이었다. 그런 젊고 재능 있는 기사들은 제 인생에서 검이 빠지는 걸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루얀 오빠도 검 못 잡을지도 모르게 됐을 땐 세상 무너지는 줄 알았으니까.’

    딜런 경도 비슷했겠지. 루얀처럼 공작 아들도 아니니 밥벌이도 걱정이었을 테고.

    “우리 가문을 위해 젊음과 재능을 바치는데, 이 정도 배려는 해 줄 수 있지.”

    딜런 경은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레아를 쳐다봤다.

    몸 약한 공녀님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윗전의 권위를 내세우면서도 너그러운 모습이 과연 피어트 공작가의 일원다웠다.

    “……저에겐 크나큰 배려십니다.”

    “그랬으면 다행이고.”

    그녀가 덧붙였다.

    “너무 고마워할 것 없어. 고용 관계가 아닌가? 내가 필요해서 경의 능력과 성실함을 산 것이니 은혜라고만 생각지 말게.”

    딜런 경은 어쩐지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북부 출신의 촌뜨기였던 자신을 기사로 뽑아 주고, 어엿하게 한 사람 몫을 하게 만들어 준 단장님. 그분만으로도 피어트 가문에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했었다.

    그 은혜를 갚지 못하고 기사를 그만두게 될 것 같아 얼마나 부채감이 들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공녀님은 이제 끝났다고 생각한 기사 인생에 동아줄을 내려 주면서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필요해서 경의 능력과 성실함을 산 것이니 은혜라고만 생각지 말게.’

    빚진 듯 주눅 들어 있던 마음에 따뜻한 온기가 스며들었다. 새 출발 해서 뭐든지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딜런 경이 무릎을 꿇었다.

    “……제 충심이 피어트 공작가에 있듯, 제 검과 목숨 또한 공녀님의 것입니다. 언제든 써 주십시오.”

    레아는 눈을 깜박였다.

    ‘요즘 자꾸 나한테 목숨 거는 사람들이 생기는 기분인데. 착각인가?’

    어째 건강해지면서 제멋대로 살기 시작하니까 자꾸 충성, 충성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내가 뭘 했다고 그러지. 그냥 자본주의에 찌든 금수저의 마음으로 돈지랄 해 주고 복지 좀 신경 써 줬을 뿐인데.

    그녀는 떨떠름한 마음을 숨기며 답해 주었다.

    “언제든 쓰지 말고 아껴서 써. 하나뿐인 목숨이잖나.”

    역효과였다.

    딜런 경은 이제 숫제 눈물을 흘릴 기세였다.

    “공녀님을 위해서라면 아끼지 않겠습니다.”

    “아니, 아끼라고.”

    “……공녀님, 제가 손끝에 입을 맞춰도 되겠습니까?”

    페이런에서 기사가 손끝에 입을 맞추는 건 목숨과 영혼을 다 바쳐 지키겠다는 맹세였다. 레아는 속으로 뒷목을 잡았다.

    ‘목숨 걸지 말라니까 내 말 어디로 듣고 있냐?’

    왜 사람 말을 자꾸 곡해해서 듣는 건데.

    그녀가 끙끙댈 때였다.

    “안 된다.”

    갑자기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들어온 헬릭스가 레아 앞으로 다가와 몸으로 딜런 경을 가렸다.

    “……레아는 마법사로 훈련 중이라 함부로 접촉하면 몸 안의 마나가 뒤틀릴 수 있다.”

    “그, 그렇습니까?”

    딜런 경이 놀라 물러났다.

    그, 그랬어?

    더 놀란 레아도 얼른 한 발짝 뒷걸음질 쳤다.

    헬릭스는 그런 그녀 앞을 더 단단히 막으며 주의를 주었다.

    “조심해라.”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제 가슴을 쓸어내린 딜런 경이 레아를 향해 깍듯이 인사하고 물러났다. 헬릭스는 나가는 딜런 경을 가만히 노려보고 있었다.

    문이 닫히자 레아가 물었다.

    “진짜 접촉하면 마나 뒤틀리는 거야? 왜 말해 주지 않았어?”

    “……평소엔 그렇게 위험하지 않다.”

    헬릭스가 레아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뭔가 수상한데.

    레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의 건강이라면 끔찍하게 챙기는 헬릭스가 이런 위험한 주의사항을 빼먹었을 리가 없었다.

    “그거 거짓말이지.”

    “…….”

    “왜 안 어울리게 거짓말을 하고 그래?”

    헬릭스는 대꾸 없이 인상을 썼다. 딜런 경의 눈빛을 떠올리자 속이 더부룩한 기분이었다.

    “딜런 경이 싫어? 불편해?”

    “아니다.”

    헬릭스가 빠르게 부정했다. 좀 전의 기사에게는 악감정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 눈빛.

    레아 주위에서 사람들이 내비치는 그 맹목적인 눈빛이 싫었다.

    “뭐야. 그럼 나 인기 있는 게 싫어?”

    “……아니다.”

    “아닌 게 아닌 거 같은데에…….”

    레아의 말꼬리가 눈꼬리처럼 길게 늘어졌다. 웃음기 어린 목소리. 가늘게 접히는 눈. 헬릭스는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레아 너는 너무 무방비하다.”

    “응?”

    “사람을 쉽게 믿고 곁을 내준다. 그러니 저렇게들 구는 게 아닌가.”

    “저렇게?”

    “한두 번 만에 선을 넘고 맹목적으로 구는 것 말이다.”

    헬릭스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방금 기사도 그랬고, 네 전담 하녀가 되긴 했지만 자넷도 그렇다.”

    아니, 나도 좀 지나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선 넘고 맹목적이라고 들을 만한 건 아닌 거 같은데.

    레아가 반박했다.

    “딜런 경이야 피어트가의 기사니까 그럴 수 있지. 그리고 자넷 경우는 특수한 거 너도 봤잖아.”

    “물론 네게도 이유가 있다는 걸 안다.”

    “알면서 왜 그러는데?”

    레아가 톡 쏘았다.

    “헬릭스 네가 내 계약자긴 하지만, 이런 말까지 하는 건 좀 아니잖아.”

    헬릭스가 잠시 침묵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그렇지만 옆에서 보고 있으면 어쩐지…… 거슬리고, 조마조마했다.

    “……조심하란 얘기다.”

    “뭘?”

    “드래곤의 마나를 먹인 범인도 밝혀내지 못했잖나. 내부에 첩자나 내통자가 있을지 모르는데, 너는 툭하면 그들을 믿어 주고 배려해 주고…….”

    “그치만 내가 안 그랬으면 헬릭스 너도 안 주워 왔을 텐데?”

    헬릭스가 움찔했다.

    “……그건 레아 네 말이 맞군.”

    잔소리처럼 걱정을 늘어놓다가, 또 맞다고 느껴지는 말엔 빠르게 수긍했다. 헬릭스는 수려한 눈썹을 잔뜩 찡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다.

    레아는 빤히 쳐다보며 생각했다. 저 체격에 저렇게 냉랭한 얼굴로 눈썹까지 찌푸리고 있는데.

    왜 귀엽지?

    갑자기 그 모습이 너무도 귀엽게 느껴져서 레아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헬릭스의 찡그린 미간을 꾹 눌렀다. 그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뭐 하는 건가.”

    “어…… 귀여워서?”

    “뭐가 어떻다고?”

    생전 처음 듣는 말에 헬릭스의 미간이 더 찌푸려졌다.

    “아니 그게, 칭찬인데? 진짠데? 칭찬타임인데?”

    제가 해 놓고도 무슨 말인가 싶었지만, 주워 담을 수 없는 건 밀고 나가는 거랬다. 레아는 꿋꿋하고 어색하게 덧붙였다.

    “아, 아이참, 눈썹도 잘생겼다아.”

    “……그거 아무 데나 갖다 붙이는 거 아닌가?”

    매서운 말투로 투덜대면서도, 헬릭스는 그녀의 손을 살짝 잡아 부드럽게 내려놓았다.

    역시 귀여운 데가 있다니까. 레아가 쿡쿡 웃었다.

    “왜 웃나.”

    “아무것도 아냐. 근데 이 시간에 웬일이야? 오늘 마법수업 쉰다고 하지 않았어?”

    ❀ ❀ ❀

    “의논할 게 있어 왔다.”

    헬릭스가 레아가 먹다 만 티고네 열매 접시를 가리키며 말했다.

    “……티고네 열매 말이다.”

    “응.”

    “지난번에 티고네 꽃을 조사하러 가지 않았나.”

    그가 설명했다.

    원래 보라색인 티고네 꽃.

    그 꽃이 푸른색인 건 오염되었다는 뜻이기에 헬릭스는 급히 나무와 근처를 살폈었다.

    “네가 본 그 나무만 오염되어 있었는데 오염원을 발견하지 못했다. 티고네 나무는 부정적인 마나에 쉽게 반응하는데…….”

    “설마 결계 문제는 아니겠지?”

    “한 그루만 그런 걸 보니 결계 탓은 아닌 것 같다. 확인해 보니 결계가 무사하기도 했고.”

    그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 티고네 나무 주위를 다시 조사해 보면 좋겠군.”

    레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음. 듣고 보니 수상하네. 같이 조사해 보자.”

    “……같이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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