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미친 건 그쪽이지.”
레아가 말했다.
“산골 마을에서 오랫동안 신의 대행자입네 떠받들려 지내니까 현실감각이 희미해졌나 본데…… 너희 교단은 말단 신관이 피어트 가문의 공녀를 건드려도 잘 감싸 준대?”
흙빛이 됐던 신관이 얼굴이 이젠 창백하게 질렸다.
레아의 말이 맞았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교단은 자신을 바로 쳐 낼 게 분명했다.
공포로 잘게 떠는 신관을 보며 레아가 말을 이었다.
“분명 자기네 교단이랑 관계없다고 할걸. 너를 악마로 모는 것도 얼씨구나 할 거야. 얼마나 반갑겠어? 너 하나만 이단으로 몰아서 화형시키면 일이 깔끔하게 해결되는데.”
“나, 난…… 악마가 아니오!”
신관이 소리를 짜내듯 외쳤다.
그 틈에 레아가 자넷에게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자넷은 후다닥 달렸지만 신관이 더 빨랐다.
“아니야!”
“꺄악!”
자넷의 머리채를 잡고 신관이 미친놈처럼 칼을 휘둘렀다.
“난 악마가 아니라고……!”
“자넷!”
우두득.
괴상한 소리가 나며 칼 든 손이 반대편으로 꺾였다.
“으아아악!”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신관의 팔을 쥔 채, 헬릭스가 말했다.
“반성을 모르는 놈이로다.”
“헬릭스!”
제때 도와준 그가 너무도 반가워서 레아의 얼굴이 환해졌다.
헬릭스가 신관을 붙든 사이 자넷은 레아에게 달려왔다.
“공녀님!”
“자넷, 다친 데 없어? 괜찮아?”
“괘, 괜찮아요!”
자넷이 덜덜 떨며 말했다.
그렇지만 묻는 쪽도 답하는 쪽도 알고 있었다.
‘생각보다’ 괜찮을 뿐이다.
한 놈에게 두 번이나 이런 일을 겪고 어떻게 괜찮을 수 있을까?
레아는 자넷의 떨리는 어깨를 끌어안았다.
떨림이 제 손과 팔로 번지는 걸 느끼면서, 그녀는 헬릭스의 손에 붙들린 신관을 노려보았다.
레아가 나직하게 말했다.
“너 악마 맞아.”
목소리에 담긴 분노에 신관이 흠칫했다.
“적어도 자넷과 루이지에겐 악마였어.”
“그건…… 저 마녀들이……!”
“아직도 그 소리야?”
어이없다는 듯이 웃은 레아가 손을 뻗었다.
“그렇게 원한다니 마녀답게 굴어 줄게. 파이어볼!”
그녀의 손끝에서 새빨간 불꽃이 뻗어 나왔다.
화르르륵!
신관의 한 줌 남은 머리에 불이 붙었다.
“으아아악!”
비명을 지르는 놈을 헬릭스가 바닥으로 떨쳐 냈다.
첨벙!
놈의 손에 들려 있던 칼도 그가 차서 냇물로 빠트렸다.
헬릭스는 바닥을 구르는 신관을 발로 밀어 레아와의 거리를 더 벌린 뒤, 신중하게 뒷걸음질로 다가왔다.
레아와 자넷을 등 뒤에 숨긴 그가 말했다.
“이제부터 별장에 도착할 때까지 내가 뒤에 서겠다.”
든든한 벽처럼 선 헬릭스에게 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좀 놀랐는데…….”
“놀라고 무서운 게 당연하다.”
그의 회색 눈에 잠깐 미안함이 스쳤다.
“더 빨리 왔어야 했는데.”
“넌 네 볼일이 있었잖아.”
“레아 네 안전이 우선이다.”
단호하게 말한 헬릭스가 덧붙였다.
“이제 안심해라.”
그 말에 자넷으로부터 옮겨 왔던 떨림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헬릭스는 여진처럼 아직 떨고 있는 레아의 손을 잡고 마나를 흘려 넣었다.
퐁.
익숙하고 시원한 마나.
헬릭스의 체온.
조심스러운 손길.
불길처럼 배 속에 번지던 무서움과 분노가, 보슬비에 꺼지듯 사그라들었다.
레아가 답하듯 그의 손을 꼭 마주 잡았다.
“……응.”
헬릭스가 미소 지었다.
“그럼 출발하지.”
떠나는 셋을 향해 신관이 비명처럼 애걸했다.
“살려 줘! 꺼 줘!”
“내가 왜?”
레아는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헬릭스, 자넷. 가자.”
❀ ❀ ❀
“뜨, 뜨거워! 신이시여 살려 주……!”
신관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바닥을 굴렀다.
머리에 붙은 불은 바닥을 아무리 굴러도 꺼질 줄을 몰랐다.
“으악!”
미친 사람처럼 몸을 흔들며 냇가로 가던 그가 넘어졌다.
철퍽.
발을 걸었던 자의 우악스러운 손아귀가, 신관의 머리를 물속에 처박았다.
“우, 우읍!”
물 위로 보글보글 거품이 올라오며 신관이 발버둥 쳤다.
그렇지만 그의 머리를 누른 손은 미동도 없었다.
“커업!”
신관이 늘어지자 그제야 손을 뗀 남자가 시체를 그대로 물에 흘려보낸 뒤, 냇가에서 고개를 돌렸다.
레아가 멀어지는 모습을 조금이라도 보고 싶었으니까.
‘레아 피어트 공녀님.’
자신이 트로우 백작가의 첩자인 게 이렇게 후회된 적이 없었다.
어젯밤 낯선 마을 광장에서 마녀사냥이 벌어질 때 용감하게 나섰던 그녀.
그는 제 처지도 잊고, 그 자리에서 튀어 나가 자신을 받아 달라 레아의 다리에 매달리고 싶었다.
밤바람에 너울거리던 긴 백금발.
불빛을 받아 하얗게 도드라지던 얼굴.
그 입술로 단호하게 소녀에게 말했더랬다.
너 내 하녀가 되어라.
비약을 먹은 이후 죽은 줄만 알았던 심장이 뛰었다.
그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고, 그 붉은 입술로 자신에게 똑같이 말해 준다면.
너 내 개가 되어라.
상상만으로도 황홀해서 오싹할 지경이었다.
그의 입술이 달싹였다.
“……주인님.”
남자의 이름은 카라이.
그는 트로우 백작이 어릴 때부터 키워 낸 첩자였다.
거리를 떠돌던 비렁뱅이 고아 시절, 그는 건달패들의 손에 끌려가 인체실험 재료로 팔렸다.
어린애들을 모아 강제로 비약을 먹이는 실험.
같이 비약을 먹었던 많은 실험체 중에 살아난 것은 그 하나뿐이었고, 실험을 주도하던 트로우 백작은 며칠 만에 깨어난 그를 애지중지했다.
그렇지만 관심은 잠깐이었다.
아무 능력이 없다고 밝혀지자 백작은 바로 그를 밥버러지 취급했으니까.
비약을 먹고 살아나 특별할 줄 알았더니, 별거 아니라고 구박하며 굶기기 일쑤였다.
‘도대체 쓸데가 없군.’
‘얼굴은 반반하잖습니까. 여자들 좋아하는 귀염상이니, 그런 취향 귀부인들한테 보내면 어떨까요? 밤시중 겸 첩자로.’
그렇지만 카라이는 그쪽으로도 소질이 없었다.
비약을 먹고 깨어난 뒤 매사 심드렁하고 가슴 뛰는 법이 없었던 것이다.
사랑을 속삭이는 것도, 복종하는 척하는 것도, 그에겐 너무 어려운 연기였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트로우 백작은 그를 피어트 공작가에 잠입시키면서 말했다.
레아가 비약을 먹고 살아난 사람이라, 비약을 먹고 살아났던 그에게 기회를 주는 것뿐이라고.
그렇지만 백작은 몰랐을 것이다. 카라이가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무슨 능력을 숨기고 있는지.
카라이는 레아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꿈꾸듯 중얼거렸다.
“주인님.”
생각지도 않았던 단어가 너무도 달콤했다.
트로우 백작은 늘 말했다.
개새끼면 개새끼답게 굴라고, 집을 지키든 재롱을 피우든 쓸모를 증명하라고.
웃기는 말이었다.
개로 살건 사람으로 살건, 사는 것도 죽는 것도 관심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불길을 등진 채 마을 사람들 앞에 나서고, 칼을 들고 위협하는 놈 앞에서 이리 오라고 손짓해 주는 주인이라면.
“멍.”
카라이가 작게 짖었다.
그런 주인이라면 기꺼이 개가 되어 드릴 텐데.
“멍멍.”
그의 갈색 눈동자가 휘어졌다.
당신이 시키는 대로 무엇이든 하고, 당신의 칭찬을 듣는다면 얼마나 달콤할까?
얼마나 더 가슴이 뛸까?
히죽 웃은 그가 레아 일행을 뒤쫓았다.
❀ ❀ ❀
레아는 별장에 돌아와서 둘러댔다.
“헬릭스랑 새벽에 훈련하면 효과가 좋을까 싶어서 일찍 나갔는데, 길을 잃었지 뭐야.”
그녀의 말에 바이든 경과 하녀장이 한숨 쉬었다.
“제발 말씀 좀 해 주시고 외출해 주십시오…….”
“주의할게.”
레아는 약간 찔리고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화염마법으로 몬스터 잡으러 간다고 하고 나갈 순 없잖아.
“데리고 오신 이 아이는?”
“우연히 인연이 닿게 되었는데, 마음에 들어서 내 직속 하녀로 키우려고. 자넷, 인사해.”
자넷이 공손하게 인사했다.
“자넷입니다.”
“경력은? 추천장은?”
“……없습니다.”
하녀장이 레아를 조심스레 쳐다보았다. 그녀가 당당히 말했다.
“내가 추천하는 건데.”
“……공녀님의 하녀에 걸맞도록 교육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수습기간을 마치면 꼭 내 전담으로 배정하고. 일단 거처는 내 방 옆의 곁방으로…….”
“아닙니다, 공녀님. 저도 다른 하녀들과 함께 방을 쓰고 싶습니다. 선배들한테 배우기도 해야 하고요.”
그 말에 레아가 흘깃 하녀장의 표정을 보니, 자넷의 처신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하긴 고용주가 너무 편애해도 따돌림당할 수 있으니까.’
레아는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도록 해.”
자넷을 하녀장에게 맡기고, 레아는 씻고 방으로 돌아왔다.
개인응접실의 탁자 위에 작고 예쁜 접시가 놓여 있었다.
“이게 뭐지?”
접시엔 처음 보는 보라색 열매들이 가득했다. 레아는 옆에 놓인 쪽지를 집어 들었다.
<티고네 열매다. 많이 먹으면 속이 쓰리니 한 번에 두세 알씩만 먹어라.>
동글동글한 열매들과 안 어울리는 수려한 필체였다.
레아는 저도 모르게 빙그레 웃었다. 내가 궁금해하니까 따 왔구나.
“티도 안 내더니, 이건 언제 또 따 왔대.”
결계랑 오염만 살피러 간 줄 알았더니 열매까지 챙겨 온 모양이었다.
어쩐지 몽글몽글한 기분이 들어 한참을 쳐다보다가 한 알을 집어 혀에 굴려 보았다.
“으으, 써.”
첫입엔 강한 쓴맛이 나고 물고 있을수록 조금씩 단맛이 돌았다.
레아는 용기를 내어 콱 씹었다.
생각 외로 부드러운 단맛이 입안에 퍼졌다.
“홍삼 같아. 따 온 사람 닮았네.”
레아는 헬릭스를 떠올리며 티고네 열매를 씹었다.
까칠하고 융통성 없어 보이는데 알고 보면 강강약약 인격자에 세심하고 몸에도 좋다니, 겪을수록 약재 같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어마무시하게 미남이잖아. 왜 저런 남자가 솔로지?’
오래 봉인되어 있어서 그런가?
그녀는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땅속에 묻혀 있던 산삼이네.’
심 봤다.
제가 이 구역의 대박 심마니입죠, 무려 산삼 같은 계약자를 캐냈습니다.
레아는 콧노래를 부르며 편지지를 꺼내 들었다.
‘생각난 김에 진짜 산삼밭 일도 처리해야지. 약초 전문가와 호위를 보내 달라고 본가에 연락해야겠어.’
그들을 제가 한번 보고 루이지에게 보낼 셈이었다.
‘잠깐.’
그녀는 편지를 쓰다 펜을 멈췄다.
‘약초 전문가는 수도에서 와야 하지만 호위는 여기서 바로 보낼 수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