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역시 관광은 현지인 소개가 최고였다.
“와! 저기 좀 봐 헬릭스.”
초가을에서 가을로 접어드는 산은 그 자체로도 아름다웠고, 여기저기 가을에 피는 야생화가 둔덕을 하얗게 뒤덮고 있었다.
헬릭스는 레아가 가리킨 꽃밭을 보다가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북부가 이렇게 예쁜 줄 몰랐다고 종알대는 말간 얼굴 위로, 성기어지는 나뭇잎들 사이로 가을 햇빛이 비치며 반짝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심장이 빨리 뛰며 기분이 가라앉았다.
‘왜 이렇게 기분이…….’
헬릭스는 레아를 바라보며 이 정체 모를 감정을 곱씹었다.
아까 레아가 인기가 많은 걸 볼 때부터 기분이 영 이상했다.
‘심장도 어젯밤부터 빨리 뛰고.’
레아가 화형대 앞으로 나설 때부터 빠르게 심장이 뛰기 시작하더니, 멈출 줄을 몰랐다.
‘놀라서 그런가. 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군.’
헬릭스가 제 심장 위에 손을 얹고 미간을 좁혔다.
불타는 화형대를 등지고 나서던 레아의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불길에 너울대던 백금발.
순수한 분노로 타오르는 파란 눈.
입술은 두려움을 숨기려고 꽉 다물었지만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지금도…….’
야생화 군락을 바라보며 감탄하는 레아의 옆모습, 얼굴에 드리우는 나뭇잎의 그림자, 그녀의 머리카락에 붙은 낙엽까지.
하나하나 느리고 선명하게 눈에 각인되는 느낌이었다.
헬릭스는 고민했다.
‘봉인이 풀린 부작용인가?’
그러고 보면 지난번 아즈라의 레어에서 결계를 보완할 때도 똑같은 심장박동과 증상을 느꼈다.
‘이상한 증상이군.’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증상에 그가 미간을 찌푸릴 때였다.
“헬릭스, 왜 그래?”
레아의 물음에 헬릭스는 얼굴을 폈다.
“별일 아니다.”
“별일인 거 같은데? 표정도 안 좋고, 아까부터 말도 없고.”
걱정하는 눈빛에 그는 제 이상한 증상을 숨겼다.
“……네가 인기가 많은 걸 보니 수호자로 활동하던 때가 생각났다.”
“아? 하긴 수호자로 일하면 나쁜 놈들 퇴치도 많이 했겠네.”
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인기 진짜 많았겠다.”
“전혀 없었다.”
헬릭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없었다고? 왜?”
레아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공정하고, 강강약약이고, 인성 갑이고, 배려 넘치고, 외모까지 남신인데?”
“수호자는 그런 게 아니다. 인기보단 원망을 얻기 쉬운 일이지.”
대꾸하는 헬릭스의 목소리에 씁쓸함이 묻어났다.
“네 말대로면 정의의 사도 같은데 원망을 듣는다니, 그게 다는 아닌가 봐.”
“정확히 봤다.”
“수호자란 게 정확히 어떤 직책이야? 뭘 하는 거고?”
마나를 통제하고 질서를 수호하고 약자를 보호하고, 정의롭게 들리는데 어딘가 두루뭉술했다.
헬릭스가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떼었다.
“수호자의 주된 사명은…….”
“응. 사명은?”
“……폭주하는 드래곤과 대마법사를 막는 거다.”
네?
❀ ❀ ❀
헬릭스는 설명했다.
자기밖에 모르는 어린 드래곤, 너무 오래 레어에 혼자 살아서 사회성 소멸된 드래곤, 변신 놀이를 많이 하다가 전생만 구백구십구 번째를 외치게 된 미친 드래곤.
마탑에서 연구만 하다가 맛이 간 대마법사, 권력자 발닦개 노릇을 하다가 팽 되고 도시를 다 불태워 버린 대마법사, 전쟁통에 학살 벌이다가 진짜 살인광 된 대마법사.
“마법의 시대에는 이런 이들이 세계평화의 가장 큰 적이었다.”
레아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뭔가 의외긴 한데…… 설득력이…… 있네…….”
그녀가 이마를 짚었다.
“나도 마법사로서 인성 관리, 멘탈 관리 잘해야겠다.”
“레아 너라면 충분히 잘할 수 있을 거다.”
그가 설명을 이어 갔다.
드래곤이나 대마법사처럼 힘을 너무 많이 가진 이들이 폭주하면 피해도 커서, 몇 왕국은 멸망까지 가고, 산이 무너지거나 강이 마르는 일도 생겼다.
드래곤들의 수장인 드래곤로드와 마법의 탑 수장 마탑주는 해결책을 고심했다.
“그대로 가다간 마법이 다 흑마법 취급을 받거나 세상이 망하거나 둘 중 하나일 테니까.”
“그렇지.”
“그래서 그들은 폭주하는 이들을 제어할 존재를 만들기로 했다.”
“그게 수호자였고?”
“그렇다.”
고개를 끄덕인 헬릭스가 말을 이었다.
“마나에 가장 민감하고 공정한 종족인 엘프 중에서 수호자를 뽑아, 마나 통제 능력을 주고 임무를 맡겼지.”
레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헬릭스, 역시 너 엘프…….”
“아니다.”
“아니야?”
아무리 봐도 엘프왕 외모인데?
레아의 시선에 헬릭스가 쓰게 웃었다.
“엘프들이 다른 대륙으로 이주하려 하면서, 최초로 인간 중에서 수호자를 뽑았지.”
“그게 헬릭스 너고?”
“그렇다.”
그가 덧붙였다.
“엘프 스승들이 나를 데려다 가르쳤지.”
생각보다 무거운 임무였다.
누군가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으면서, 신처럼 큰 힘을 다루는 일.
“네가 만날 공정해야 된다고 입버릇처럼 그랬던 게 그래서였구나…….”
“공정해야만 하지. 최소한의 피해를 내도록 해야 하고. 가능한 한 억울한 이들이 없도록 판단해야 한다.”
헬릭스가 늘 자신은 수호자라고 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처음 만났을 때도 떠올랐다.
‘누가 보냈는가?’
‘바깥에 전쟁이라도 일어났나?’
바로 의심하던 시선과 말투가 이제 이해되었다.
“마나를 다루니까 다른 마법사들도 도와 달라고 했을 테고. 권력자들도 귀찮게 했겠네.”
“그렇다.”
헬릭스는 짧게 대꾸했지만, 레아는 그의 무표정한 얼굴이 어두워 보였다.
‘생각보다 힘들었겠다.’
큰 힘을 홀로 다루며 늘 이용당할까 봐 경계해야 하는 삶.
도와주면 더 도와 달라고 하고, 공익을 위해 외면하면 원망을 받고, 힘을 빼앗긴 이들은 저주했을 터였다.
그를 이용하기 위해 약점을 노릴 테니 섣불리 친구도 가족도 만들기 힘들었겠지.
“엘프들이 배려심이 없네.”
“……배려심?”
레아가 투덜거렸다.
“그렇잖아. 자기들은 수호자 노릇해도 같이 나눌 동족이라도 있지, 혼자 달랑 뽑아 놓고 가면 넌 어떡하라고?”
헬릭스가 레아를 내려다봤다.
“……그런 말은 처음 듣는군.”
“진짜? 원망스럽지 않았어?”
“원망해 본 적 없다. 누군가는 해야 했을 일이니까.”
레아는 저도 모르게 거리감을 느끼며 그를 쳐다봤다.
‘아니, 이 인성 무엇……?’
당장 뒤에서 후광이 나온다고 해도 놀랍지 않을 것 같았다.
“헬릭스 너 정도 인격은 돼야 수호자 하나 봐.”
헬릭스는 고개를 잘래잘래 젓는 레아의 동그란 정수리를 내려다봤다.
스윽.
그가 무심코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 위에 붙은 빨간 낙엽을 떼었다.
“레아 너도 좋은 사람이다.”
레아가 눈을 깜박이며 헬릭스를 올려다봤다.
“인격 끝판왕한테 그런 칭찬을 들으니 좀 현실감이 없는데……?”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무뚝뚝한 칭찬에 그녀는 기분 좋게 웃었다.
“하긴 내가 그냥 봐도 예쁘고, 까고 봐도 멋있긴 해.”
“……사실이긴 하다.”
어쩐지 좀 목이 졸린 듯한 목소리로 긍정하는 헬릭스였다.
떨떠름해도 인정하고 넘어가는 게 너무도 헬릭스다워서, 레아는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하하, 하여간 고지식해…… 어?”
레아가 눈을 깜박였다.
“저거 뭐지? 꽃인가?”
온통 마른 색으로 뒤덮인 가을 산에 어울리지 않는 파란 몽우리가 보였다.
“헬릭스, 저거 봐. 저기 산봉우리 쪽에. 저거 꽃이야? 열매?”
“티고네 꽃이다.”
헬릭스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백 년에 한 번 핀다는 드문 꽃인데, 여기서 보는군.”
“운이 좋네. 꽃이 폈으니 열매도 맺을까?”
“가끔 맺는다.”
“맛있어?”
레아의 눈이 기대에 차서 반짝였다.
“백 년 만에 맺는 열매면 맛이 없어도 몸에는 좋겠지?”
“꼭 그렇지만은 않다.”
그가 설명했다.
“티고네 꽃은 원래 보라색이다. 파란 꽃을 피운다는 건 근처에 오염원이 있다는 뜻이지.”
“오염원……?”
“혹시 산맥 너머 북쪽 오염된 땅에서 흘러왔다면 헬 산맥의 결계가 약해졌단 뜻이니…….”
헬릭스가 약간 굳은 얼굴로 말했다.
“저길 살펴봐야겠다. 레아 너는 먼저 내려가라.”
❀ ❀ ❀
한편 레아와 헬릭스가 산책하는 사이, 그들을 쫓아온 신관은 근처에 몸을 숨기고 때를 노리고 있었다.
‘슬슬 공녀와 그놈이 올 텐데.’
신관은 마음이 급했다.
자넷이 혼자 있을 때 먼저 해치워야 하는데 그녀가 있는 공터는 너무 훤하게 트여 있었던 것이다.
‘그냥 나가서 이리로 끌고 와?’
그때였다.
자넷이 수통을 들고 그가 숨은 냇가 쪽으로 향했다.
‘지금이다!’
신관은 냇가 옆 덤불 사이에서 휙 튀어나와 자넷에게 칼을 휘둘렀다.
“꺄악!”
어설픈 공격에 자넷은 넘어지며 겨우 칼날을 피했다.
“이, 이 건방진 것!”
신관이 칼을 고쳐 쥐다 말고 발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자넷!”
비명을 듣고 레아가 달려오고 있었다.
“가까이 오지 마!”
그가 어정쩡한 동작으로 허공에 대고 칼을 휘둘렀다.
“가까이 오면 이년부터 죽여 버리겠어!”
“공녀님 위험해요! 오지 마세요!”
“넌 조용히 해! 얼굴부터 그어 버리기 전에!”
레아는 발을 멈췄다.
“그래, 그렇게 말을 잘 듣…….”
그녀가 그 자리에서 팔을 뻗었다.
“파이어볼!”
화륵.
화염구가 신관의 어깨를 스쳐 지나갔다.
자넷이 놀라 외쳤다.
“부, 불덩이?”
어깨에 불을 맞은 신관이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마, 마, 마녀!”
화륵!
한 손에 파이어볼을 든 채, 레아가 대꾸했다.
“넌 아는 단어가 그거밖에 없냐?”
레아의 비웃음에 신관의 얼굴이 벌게졌다. 놈이 칼을 든 채 그녀를 향해 삿대질했다.
“신관에게 이렇게 굴고 무사할 줄 알았냐? 피어트 가문의 공녀가 마녀라고 교단에 알리겠다!”
“아, 그래?”
레아가 느긋하게 되물었다.
“그럼 난 왕국 곳곳에 알릴까? 예쁜 여자만 보면 껄떡대는 악마가 신관의 탈을 쓰고 마녀사냥을 주도하고 있더라고.”
“뭐, 뭐라고?”
“악마라 그런지 공녀도 공격하고 제정신이 아니더라고 말이야. 악마 이름은 그걸로 하자. 발정의 악마 추하다우스 어때?”
모욕에 신관의 얼굴이 흙빛이 됐다.
“이, 이…… 미친 마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