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13)화 (13/120)

13화

“왜 소리는 지르나.”

“아, 안 보여 줘도 돼!”

상의까지 벗은 헬릭스가 돌아보았다.

망했다.

레아는 순간 생각했다.

뭐가 망했는진 모르겠지만 강렬하게 망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냉랭하고 수려한 얼굴은 물에 젖어 청초하면서 야한 느낌을 풍겼다.

넓은 어깨를 타고 젖은 은발이 흩어져 야성미를 뿌리고, 머리카락에서 흘러내린 물이 떡 벌어진 가슴과 조각상 같은 배를 지나 움푹한 배꼽에 고였다.

이런 남자를 봤으니 이번 생에 연애는 못 하는 거 아닐까?

눈을 깜박이며 숨도 못 쉬고 있는 그녀에게 헬릭스가 제 옷을 내밀었다.

“입어라.”

“……응?”

“춥다고 하지 않았나. 네 옷보단 좀 더 말랐을 거다.”

❀ ❀ ❀

한편.

북부에는 레아 말고도 몬스터를 잡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패트릭 페이런 왕자가 이끄는 토벌대 일행이었다.

크오오!

콰직!

대검이 가볍게 공중을 가르자, 기세등등하게 울부짖던 몬스터의 머리도 가볍게 공중을 날았다.

목을 잃은 몬스터가 그대로 무너졌다.

쿠웅.

“열세 마리.”

루얀은 심드렁하게 말하며 대검을 한 손으로 빙빙 돌렸다.

“더 없나?”

“헉, 헉.”

그를 따라붙은 토벌대의 기사 하나가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저었다.

“열두 마리나, 해치워 놓고, 헉, 그런 말이 나옵니까? 헉, 오늘 나타난 몬스터는, 피어트 경이 다 죽였잖습니까.”

기사가 질린 얼굴로 루얀을 쳐다봤다.

얼마나 깔끔하게 절단했는지, 거대한 몬스터를 막 죽였는데도 눈부신 금발에 피 한 방울 튀지 않았다.

몇 번을 봐도 볼 때마다 놀라운 솜씨였다. 다른 기사들도 따라와 한마디씩 했다.

“헥헥, 우리 칼질할 것도 좀 남겨 주십쇼.”

“휴. 경은 진짜 토너먼트 같은 데서 만나지 맙시다.”

패트릭 왕자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짜 검술 하나만은 페이런에서 제일이군.”

여러모로 탐나는 인재였다. 패트릭 왕자의 눈이 루얀을 담고 이글거렸다.

왕자에겐 야심이 있었다.

토벌대를 기회로, 루얀 피어트를 자신의 오른팔로 삼으려는 야심!

피어트 공작가는 정치적으로 온건한 데다 친제국파도 아니었다.

그런 피어트 공작가의 검술천재 차남이라니, 그가 오른팔이 되어 주면 왕위에 올랐을 때 훨씬 더 안정적인 왕권을 세울 수 있으리라.

‘피어트 가문을 잡아야 미래가 있다.’

그는 절박했다.

패트릭 페이런. 페이런 왕의 유일한 자식이며 왕위계승자.

호리호리하고 미끈한 몸은 죽은 왕비를 닮았고, 왕실의 혈통을 이어받아 적금발에 붉은 눈이 뚜렷했다.

성실하고 우아한 태도는 강렬한 기세와 달리 호감 가는 인상을 만들어 내어, 페이런의 여론은 그를 ‘왕재다운 카리스마와 자비로운 군주의 자세, 양쪽 모두를 갖춘’ 성군의 재목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렇지만 왕자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페이런 왕국은 강대국 오켄 제국의 서쪽에 붙어 있는 소국.

때문에 페이런엔 항상 제국의 영향력이 미쳤고, 귀족들 중에도 친제국파가 많았다.

그런 친제국파 귀족들의 수장은 왕의 삼촌으로 큰 권력을 가진 칼로시 대공. 왕위에 대한 욕심 또한 크고, 적자 셋에 서자 하나까지, 아들이 넷이나 있는 인물이었다.

언제 그가 제국을 등에 업고 패트릭 왕자를 죽인 뒤 왕위를 차지하려 들지 모르는 것이다.

지금 왕자에겐 자기편이 되어 줄 힘 있는 가문이 절실했다.

‘이 기회에 루얀 피어트를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

어떻게?

루얀은 누군가에게 고삐를 잡히기엔 가진 게 너무 많은 사람이었다.

그야말로 돈 많고 짱짱한 집안에 본인도 실력 있는 데다 자유로운 미남이었으니까.

약점이라면 단 하나.

금이야 다이아야 떠받드는 여동생 레아 피어트였다.

패트릭 왕자는 고민했다.

‘요양하고 있다는 헬칸에 가서 그 아가씨와 먼저 친분을 쌓아야 하나?’

❀ ❀ ❀

레아 피어트는 지금 헬칸의 별장에 없었다.

어딘지도 모를 강변의 동굴에서 한 손엔 파이어볼을, 다른 손엔 옷을 들고 씨름하는 중이었다.

“휴. 다 말랐다.”

레아가 파이어볼로 말린 옷을 건네주자, 헬릭스가 얌전히 받았다.

어쩐지 표정이 머쓱했다.

“헬릭스 머리도 말려 줄까?”

“아니다.”

춥다고 해서 옷을 벗어 줬더니 레아는 이것보다 마나를 더 넣어 달라고 했다.

그러더니 좀 불어넣어 준 마나로 파이어볼을 일으켜 옷을 말리기 시작한 것이다.

많은 마법사를 봤지만 화염마법으로 옷 말리는 마법사는 처음 봤다.

‘내 계약자는 여러모로…… 특이하군.’

헬릭스는 열심히 제 머리를 말리는 레아를 흘깃 쳐다봤다.

“왜?”

머리를 말리던 레아가 헬릭스의 시선을 느끼고 물었다.

“아니다.”

“뭐야.”

말과는 달리 그녀가 살짝 웃었다. 헬릭스가 급히 고개를 돌렸다.

“빨리 출발하자. 별장에서 다들 걱정하고 있을 거다.”

“응. 그래야지.”

둘은 씩씩하게 동굴에서 나왔다.

“……그런데 여기 어디지?”

“……모르겠다.”

태생이 길치인 레아는 멍해졌고.

봉인된 동안 강산이 너무 변해서 강제로 길치가 된 헬릭스도 감각을 잃었다.

“일단 강을 따라 위로 가 보자.”

그리고 몇 시간 뒤.

길 잃고 헤매던 둘은 약초 캐던 소녀에게 발견되었다.

온몸을 푹 감싼 큰 로브에는 흙과 풀이 잔뜩 묻어 있고, 로브 끝은 그슬려 탄내가 나는 모습이었다.

“……뭐, 뭐 하시는 분들이세요?”

소녀가 발발 떨며 물었다.

공녀인데요.

수호자입니다.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 없는 둘이 침묵했다.

정적을 뚫고 큰 소리가 울렸다.

꼬르르르륵.

약초 캐는 소녀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녀가 딱하다는 듯이 두 사람을 쳐다보다 물었다.

“저희 집에 가실래요?”

❀ ❀ ❀

소녀는 근처 마을에서 언니와 조카와 함께 살고 있었다.

두 자매는 레아와 헬릭스를 친절하게 대접했다.

“이것 좀 드셔 보세요.”

언니는 두 사람에게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감자스튜를 대접했다. 허겁지겁 음식을 먹어 치우자 이번엔 소녀가 손을 내밀었다.

“로브 벗어 주시면 제가 빨아 드릴게요.”

레아가 로브에 달린 후드를 내려 얼굴을 더 덮으며 고개를 저었다.

“미안한데 이건 벗을 수가 없어서.”

괜히 여기서 로브를 벗고 정체를 드러냈다가는 자매를 곤란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소녀는 물러나지 않았다.

“이렇게 더러워졌는데 그냥 입는다고요? 금방 빨아요. 잠깐이면 돼요!”

소녀가 레아의 후드를 벗기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턱.

헬릭스가 일어나 레아의 후드를 손으로 내리덮었다.

커다란 손이 후드를 덮자 얼굴을 거의 가렸다.

“마음은 고맙게 받겠다.”

그가 나직하지만 강경하게 말했다.

“아니, 그게요.”

자매는 움찔하는 기색이었다.

자매들뿐 아니라 레아도 놀랐다.

그의 말 한마디에 분위기가 바뀌었으니까.

“…….”

신기하네.

레아가 후드 아래에서 눈을 깜박였다.

후드 위로 느껴지는 큰 손이 시야를 거의 다 가리는데, 하나도 안 갑갑했다.

왜 포근한 느낌이 들지.

그녀는 약간 당황스러웠다.

‘이상하네. 앞이 안 보이는데 왜 이렇게 안심되고 든든하지?’

게다가 이상하게 긴장돼서 마른침도 넘어갔다.

꼴깍.

그녀가 침을 삼키는 사이, 언니는 소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얘, 실례야. 사과드려.”

“죄송해요. 저는 잘해 드리려고…….”

“괜찮다.”

부드럽지만 단호한 헬릭스의 태도에, 자매는 우물쭈물 물러났다.

“호호, 그러면 필요할 때 찾아 주세요.”

“쉬, 쉬다 가세요.”

“호의에 감사를 표한다.”

짧게 대답한 헬릭스가 그제야 레아의 후드에서 손을 내렸다.

그녀가 멈춰 있던 숨을 내쉬었다.

“후아…….”

“갑갑하게 했나.”

헬릭스가 미안한 듯 속삭였다.

“곤란해하는 거 같기에.”

“아니야, 잘했어.”

레아는 듬직했다고 덧붙이려다 그만뒀다.

뭐, 칭찬타임도 아니니까.

괜히 뺨을 긁적인 그녀가 집 안을 둘러봤다. 아직 어린 소녀의 조카가 분위기를 모르고 레아와 헬릭스에게 다가왔다.

“먀.”

아기가 오동통한 팔을 내밀며 레아를 향해 바동거렸다.

“먀?”

레아는 작은 동물 같은 아기의 발음을 따라 하며 눈을 맞추고 미소 지었다.

심쿵.

아기가 조그만 입을 딱 벌리며 눈을 반짝였다.

사랑에 빠진 표정이었다.

“먀!”

“먀아. 그랬어요? 아유, 귀여워.”

헬릭스는 그러고 있는 레아와 아기를 쳐다봤다.

‘누가 귀엽다는 건지 모르겠군.’

뻔뻔하게 칭찬을 퍼붓고, 단호하게 제 의견을 밀어붙이고.

그런 면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귀여운 목소리도 어울리고, 아이의 행동에 맞춰 주는 모습도 엉뚱하고 발랄한 그녀에게 잘 어울…….

그가 고개를 저었다.

계약자의 낯선 면을 보니까 좀 의외였던 모양이다. 쓸데없는 생각을 다 하고.

그러는 사이 아기는 레아의 다리를 폭 안았다.

“어머, 쟤가!”

“조, 얼른 놔 드려!”

아기의 엄마와 이모가 깜짝 놀라 다가오려 하자 레아가 웃으며 말렸다.

“귀여운데 뭘. 괜찮아.”

그녀가 제 다리에 볼을 비비는 아기를 막 끌어안으려는 순간이었다.

휙.

큰 손이 나타나 아기를 덥석 채 갔다.

“우먀!”

놀란 아기가 소리 질렀지만 헬릭스와 눈이 마주치자 조용해졌다.

헬릭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기를 들어 올렸다.

크고 섬세한 손이 스윽 움직였다.

토닥, 토닥.

제 등을 가볍게 다독여 주는 손길에 아기도 놀라 눈을 깜박였다.

널찍한 가슴에 기대어, 단단한 팔이 받쳐 주고 있는 이 감각.

“아…… 바…….”

아기가 꼬물꼬물 헬릭스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아바…….”

순간 울컥한 아기엄마가 고개를 돌렸다.

“흑……!”

“어, 언니. 형부 생각나서 그래? 울지 마, 응?”

심각해진 분위기를 느낀 레아가 헬릭스를 쿡 찔렀다.

둘은 얼른 자매의 오두막 밖으로 나왔다.

레아는 헬릭스를 타박했다.

“갑자기 애는 왜 안아서 사람을 울려? 보니까 애 아빠도 없어진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던데.”

“애 아빠가 없는 줄은 몰랐다.”

“탁 보면 척…… 아니다. 내가 고지식한 너한테 너무 많은 걸 바랐네.”

고개를 젓는 그녀를, 헬릭스가 햇살에 눈을 가늘게 뜨며 쳐다봤다.

푹 내려쓴 후드 때문에 하얀 턱만 보였다.

궁금했다.

저 후드 안에서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레아 네가 눈치에 대한 기준이 너무 높은 거 아닌가.”

“헬릭스 너야말로 배우는 속도가 너무 느려.”

그녀가 놀리듯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만 봐줄게. 잘생겼으니까.”

헬릭스의 팔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