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12)화 (12/120)
  • 12화

    “나랑 잠깐 나갔다 오자.”

    그는 검은색 일색인 레아의 차림새를 훑어보았다.

    아무리 봐도 ‘나 이제부터 수상한 짓 할 거야’라고 쓰여 있었다.

    “그렇게 꽁꽁 감싸고 어딜 가나?”

    “몬스터 나온다던 곳 있잖아. 바이든 경이 별장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랬는데.”

    “…….”

    헬릭스가 물끄러미 레아를 쳐다보았다.

    ‘안 도와준다더니’라고 쓰여 있는 눈빛에 레아가 큼, 헛기침을 했다.

    “크흠 큼, 내가 딱히 마을 사람들 도와주러 가는 건 아니고.”

    “그런가?”

    “응. 마법 연습해 보고 싶어서 가는 거야.”

    믿는 구석이란 게 이거였나.

    헬릭스가 빙긋이 웃고 있자 그녀는 머쓱해하며 딴청을 부렸다.

    “도와주러 가는 게 아니라니까. 뭐 약간 책임감도 들고 해서……. 아무튼 같이 가자.”

    헬릭스는 잠시 멈칫했다.

    레아 또한 정치적인 논리에 휘둘리는 걸 보고 역시 귀족은 귀족인가 씁쓸했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한밤중에 중무장하고 나선 모습이라니.

    “……같이 가지.”

    잠깐 의심했던 게 미안해서 대답이 늦게 나왔다.

    “좋아, 그럼 얼른 준비하고 출발하자.”

    레아가 말했다.

    “곧 별장 뒷문 지키는 기사들이 교대하는 시간이거든. 그 틈을 잘 노려서 밖으로 빠져나가야 해.”

    집주인이 자기 집 보안을 뚫다니.

    헬릭스는 피식 웃었다.

    “레아 넌 엉뚱한 데서 치밀한 것 같다.”

    “지금 뭔가 돌려 까인 거 같은데.”

    “칭찬이다.”

    ❀ ❀ ❀

    “그래도 용케 날 불러 같이 갈 생각을 했군.”

    “겸사겸사.”

    별장을 몰래 빠져나온 두 사람은 빠르게 걸었다.

    “아무래도 결계가 풀렸을 때 몬스터들이 넘어온 거 같아서 신경 쓰이더라고.”

    “나도 그랬다.”

    “그럴 거 같아서 같이 가자고 했지.”

    레아가 이어 말했다.

    “그리고 몬스터 퇴치는 처음인데, 혼자 가는 건 위험할 거 같고.”

    “잘 생각했다. 지금 내가 그렇게 믿음직한 파트너는 아니지만…….”

    “네?”

    그녀가 어이없어했다.

    “계약자 양반, 겸손이 지나치신데요? 저번에도 들개 몬스터한테서 날 지켜 줬잖아?”

    “그땐 위험했다.”

    헬릭스의 표정이 약간 굳었다.

    “마나를 쏴서 제지했는데도 몬스터가 다시 일어날 줄은…… 내가 안이했다. 예전 힘이 있을 때처럼 생각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뭐지.

    레아는 그가 마나를 무공 고수처럼 쏘아 대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게 힘이 없는 거라고?

    ‘그럼 힘을 다 찾았을 땐 어떻다는 거야?’

    그때였다.

    구어어…….

    밤공기를 뚫고, 몬스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사, 살려 줘!”

    사람의 비명도 따라붙었다.

    레아와 헬릭스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르르르.

    급히 도착한 숲에선 곰을 닮은 몬스터가 사냥꾼을 막 후려치려 하고 있었다. 레아가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파이어볼!”

    그녀의 손끝에서 불덩이가 튀어 나가 몬스터의 머리를 맞혔다.

    쿠어억!

    활활 타오르는 머리를 붙들고 비틀대는 몬스터에게 두 번째 공격이 꽂혔다.

    쿠억!

    몬스터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돌려 도망쳤다.

    “어딜!”

    레아의 손에서 커다란 불덩이가 솟는 순간이었다.

    콰직!

    콰드득!

    나무가 무참하게 꺾이는 소리와 함께, 다른 방향에서 뛰쳐나온 몬스터가 레아에게 덤벼들었다.

    “레아!”

    기시감이 느껴졌다.

    그녀의 앞을 가로막는 헬릭스.

    때마침 불어오는 새벽 북풍과 레아의 불꽃에서 일어난 열기가 부딪쳤다. 강하고 매캐한 바람이 헬릭스의 긴 은발과 로브 자락을 펄럭였다.

    그가 레아를 돌아보았다.

    수려하고 냉정한 얼굴에 당혹감이 가득했다.

    “레아, 피해라!”

    그녀가 홀린 듯이 손을 뻗었다.

    콰광!

    헬릭스 뒤로 다가오는 몬스터들은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펑! 콰광!

    레아는 이를 악물고 놈들에게 파이어볼을 연사했다.

    “피하래도!”

    “나 혼자 도망치면, 너는?”

    헬릭스가 마나로 몬스터들을 거꾸러트리면, 레아가 놈들을 화염마법으로 공격했다.

    “점점 더 올 거다! 네 마법도 점점 약해지고 있지 않나.”

    헬릭스의 말대로였다. 처음엔 몬스터를 통째로 숯덩이로 만들던 불꽃은 점점 화력이 떨어져 갔다.

    크와아!

    머리며 어깨에 불이 붙은 몬스터들이 포효했다. 레아가 헬릭스의 소매를 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튀자.”

    헬릭스도 그녀 혼자 대피시킬 생각을 포기했다.

    “근처에 냇가가 있다.”

    그가 레아의 손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쿠어어!

    몬스터들은 죽지도 않고 불붙은 채 계속 쫓아왔다.

    레아는 흘깃 돌아봤다가 기겁했다. 곰만 한 불덩이들이 우르르 굴러오는 듯한 압박감이었다.

    그녀가 저도 모르게 헬릭스의 손을 꽉 쥐었다.

    헬릭스가 말했다.

    “걱정 마라. 물 냄새가 난다. 곧 시내가 나타날 거다.”

    “물 냄새가 나?”

    놀라며 되묻는 레아의 귀에도 물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이를 악물고 달려간 두 사람은 물소리의 정체를 보고 망연자실했다.

    “냇가가 아니라…… 강인데?”

    그것도 절벽 밑의 강이었다.

    크와아우오!

    둘을 잡을 거라 확신한 몬스터들이 함성처럼 울부짖었다.

    놈들은 다 잡은 사냥감 보듯이 여유를 부리며 둘에게 다가왔다.

    “오지 마!”

    레아가 한 손에 파이어볼을 띄우고 위협했다.

    주춤.

    잠시 멈췄던 몬스터들이 다시 서슴없이 가까이 왔다. 뒤가 절벽인데 어쩔 거냐는 눈빛들이었다.

    “저놈들이 진짜…….”

    레아의 파란 눈이 번쩍 빛났다.

    그녀가 표정을 바꾸며 손을 뻗자, 몬스터 무리에서 한 놈이 튀어나왔다.

    캬악!

    “레아!”

    파이어볼이 몬스터를 맞히는 것과 거의 동시에 놈이 입에서 뭔가 쏘아 냈다. 헬릭스가 레아를 뒤로 끌어당기며 놈이 쏜 점액을 대신 맞았다.

    “헬릭스!”

    점액에 맞은 로브가 타듯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어, 어떡해? 피부에 닿은 거 아냐?”

    “괜찮다. 이 정도는…… 윽!”

    그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아파?!”

    “안 아프다.”

    헬릭스가 대꾸하다 얼른 레아 앞으로 로브 소매를 들었다.

    캬아악!

    몬스터가 뱉은 점액에 소매가 우그러들었지만, 그는 신경도 안 쓰고 레아를 몸으로 막았다.

    캬악!

    캬아악!

    기세등등한 몬스터들의 소리에 귀가 따갑고, 그녀를 막아선 헬릭스의 몸에선 엉망이 된 로브 자락이 펄럭였다.

    “이 새끼들이…….”

    레아가 음산하게 뇌까리며 손을 치켜들었다.

    “다 죽었어! 파이어스톰!”

    콰과광!!!

    레아를 중심으로 불꽃이 폭발적으로 퍼져 나갔다.

    예상치 못한 형태의 공격에 몬스터들이 불붙은 낙엽처럼 날아갔다.

    헬릭스가 불길 한가운데 있는 레아를 잡아당겼다.

    난생처음 해 본 대형마법에 정신이 반쯤 나간 그녀를, 그가 꽉 붙들고 몸을 돌렸다.

    다른 수가 없었다.

    헬릭스는 레아를 온몸으로 끌어안고 뛰어내렸다.

    풍덩!

    ❀ ❀ ❀

    멀리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남자가 입을 벌렸다.

    “……자폭?”

    뒤에 강이 있으니 아주 뒷생각 없는 공격은 아니었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자신도 휘말릴 수 있는 화염 폭발을 일으키진 않을 터였다.

    ‘레아 피어트 공녀가 빡치면 뒷생각 안 하는 성격이란 정보는 없었는데.’

    첩자로 교육받고 피어트 공작가에 들어온 뒤에도 그런 기미는 못 느꼈었다.

    남자는 제 눈을 비비고 다시 레아가 있던 곳을 확인했다.

    파이어스톰.

    말 그대로 화염폭풍이 쓸고 간 공터에는 몬스터 통구이들이 나뒹굴었다.

    “으하…….”

    마법이라니.

    밤중에 변장하고 별장을 빠져나가기에 뭘 하나 했더니, 마법으로 몬스터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게다가 몬스터 떼에게 쫓기자 뒤에 강을 등지고는 자폭 같은 화염폭풍을 일으켰다.

    자신을 첩자로 밀어 넣을 때 트로우 백작이 뭐라 말했던가.

    ‘피어트 공작가에서 싸고돌며 키운 데다 몸도 약한 계집이다. 분명 빈틈이 많을 것이야.’

    빈틈이 없진 않았다.

    찾아내려다 들키면 통구이 될 것 같아서 그렇지.

    첩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뒤를 쫓아야겠지.”

    그가 저도 모르게 들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 남자가 낚아채서 끌어안고 강으로 뛰어내렸으니, 아마 공녀는 무사할 터였다.

    “…….”

    첩자의 입가에 매달려 있던 웃음이 옅어졌다.

    레아가 사라진 방향을 쳐다보며, 그가 몸을 일으켰다.

    슉.

    한순간에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 ❀ ❀

    레아는 내심 헬릭스를 믿고 있었다.

    ‘불이 너무 크게 터지면 나 데리고 뛰어내려 주겠지!’

    그래도 이런 일은 예상 못 했다.

    깜박.

    그녀가 눈앞의 광경을 보고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감았다 떠도 보이는 건 동굴이고, 옆에 있는 건 헬릭스였다.

    레아의 눈이 흔들렸다.

    쫄딱 젖어서 좁은 동굴에 둘만 있는 상황이라니.

    “어…….”

    “깼나.”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고쳐 앉았다.

    “여긴 어디야?”

    “강가에 있는 동굴 안이다.”

    그래도 강변이긴 하구나.

    레아가 작은 동굴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뛰어내리면 강 반대편으로 건널 줄 알았는데…….”

    “물살이 너무 셌다.”

    헬릭스가 물에 젖은 긴 은발을 대충 넘기며 말했다.

    “레아 너는 물에 빠지자마자 기절했고.”

    “헉.”

    그때부터 레아를 데리고 헤엄치다 강변의 이 동굴을 발견했다고 했다.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내 계약자가 약한 걸 어쩌겠나.”

    그가 입술이 파랗게 된 레아를 보며 혀를 찼다.

    “약하면서, 성격은 급하고.”

    “그렇지만 네가 독에 맞았…… 아야.”

    헬릭스의 길고 차가운 손가락이 그녀의 뺨을 슬쩍 찔렀다.

    “실례하겠다.”

    퐁.

    뺨에서 마나가 퍼졌다.

    저도 모르게 달달 떨며 부딪치고 있던 입술의 떨림이 멈췄다.

    “……다음부턴 먼저 통보하고 치료해 주면 안 될까?”

    “다음에 치료할 일을 안 만드는 게 어떻겠나.”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이 없네요.”

    “조심 좀 해라. 레아 너 때문에 내 심장이 남아나질 않겠다.”

    갑작스러운 말에 레아의 귀가 달아올랐다.

    “레아, 왜 그러나?”

    “어. 음. 어…… 추, 추워서……?”

    헬릭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마법으로 서클에 비축해 뒀던 마나를 다 썼을 거다.”

    “응. 그래서 그런가. 계속 춥네.”

    그녀가 딴청을 피우다 퍼뜩 물었다.

    “헬릭스, 아까 몬스터 독 맞은 건 괜찮아?”

    레아의 말에 헬릭스가 뒤돌아서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악?”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