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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11)화 (11/120)
  • 11화

    “근데, 서로 해 주는 건데 헬릭스는 나한테 칭찬 안 해?”

    “……계속했지 않나.”

    “오늘 치는 안 했거든?”

    레아가 투덜댔다.

    “만날 내용도 ‘오늘 연습 열심히 하더군, 잘했다’ 뭐 그런 거고. 좀 더 성의를 보이면 좋겠는데.”

    “성의라.”

    헬릭스가 곰곰이 생각했다.

    일리 있는 불만이었다.

    칭찬타임이 괴롭긴 했지만, 제가 하자고 동의한 이상 제대로 하는 게 맞을 터였다. 헬릭스는 레아의 동그란 정수리를 내려다보면서 그녀에게 할 칭찬을 고민했다.

    ‘레아는 씩씩하고, 열심히 배우고, 은근히 책임감 있고, 소탈하고, 화끈하고, 엉뚱하고…….’

    그리고 예뻤다.

    특히 눈이 아주 예뻤다.

    ‘헬릭스 너 하나 갈아 넣어서 해결하는 거 말고,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그렇게 말하던 그녀의 확신 어린 푸른 눈이 잠결에도 떠올랐으니까.

    헬릭스가 불쑥 말했다.

    “레아 네 눈은 가슴을 뛰게 한다.”

    레아가 눈을 깜박였다.

    “어…… 어?”

    그녀의 반응에 그도 뒤늦게 당황했다.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다.”

    “그럼 내가 그것도 모를까 봐?”

    레아가 웃으며 말했다.

    “파트너십 얘기하는 거지?”

    “……그래.”

    그게 맞는데.

    맞았던 것 같은데.

    왜인지 기분이 가라앉았다.

    “알았다니 다행이다.”

    툭 대꾸한 헬릭스가 빠르게 걸었다.

    저벅저벅.

    순식간에 그녀를 제치고 휙 앞서서 걸어 내려가는 뒷모습을, 레아는 어리둥절해서 쳐다봤다.

    왜 저래?

    “헬릭스, 같이 내려가……!”

    그 순간 앞서 내려가던 헬릭스가 긴 은발을 날리며 뛰어왔다.

    ‘어?’

    헬릭스가 레아의 앞을 가로막는 것과 동시에 개처럼 생긴 몬스터가 덤불에서 뛰쳐나왔다.

    커엉!

    “레아, 물러나라!”

    “어…… 어!”

    헬릭스가 팔을 뻗었다.

    길고 다부진 팔이 무공 고수처럼 움직이고, 전신에서 푸른 기운이 일렁였다.

    ‘마나?’

    레아의 것과는 전혀 다른 기운의 마나가 헬릭스를 둘러쌌다. 긴 은발이 마나에 반응해 펄럭이며, 그의 손끝이 정확하게 몬스터를 겨눴다.

    컹!

    몬스터가 머리를 맞고 넘어갔다.

    ‘……뭘 어떻게 한 거지?’

    레아는 제 눈을 의심했다.

    헬릭스의 손끝에서 나간 마나가 몬스터의 머리를 때린 것 같은데.

    마나는 몸 안의 기운으로, 모으기도 힘든 에너지라는데, 헬릭스는 손끝으로 총 쏘는 것처럼 자유자재로 다루고 있었다.

    크르르!

    쓰러졌던 몬스터가 눈이 돌아 헬릭스를 물려고 들었다.

    “안 돼!”

    마나의 흐름. 자세.

    그런 것들은 순간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배 속이 조여들었다.

    훅.

    불꽃이 속에서부터 솟아올랐다.

    레아가 손을 뻗었다. 본능과, 헬릭스에 의해 수없이 단련된 동작을 타고 마나가 모여들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마나가 몸을 관통하는 고양감을 제대로 느끼지도 못했다.

    ‘헬릭스!’

    다급한 시동어와 함께 불꽃이 튀어 나갔다.

    “파이어볼!”

    콰광!

    레아의 손끝이 질주하는 불덩이를 뿜었다.

    쿠에엑!

    파이어볼에 맞은 몬스터가 귀가 찢어지는 울음을 울었다.

    화르륵!

    순식간이었다. 화염에 휩싸인 놈이 새카만 통구이로 변했다.

    “……어?”

    레아가 눈을 깜박였다. 헬릭스가 저를 향해 달려오는 모습이 슬로우모션처럼 보였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이 화력…… 실화냐?”

    ❀ ❀ ❀

    한편 페이런 왕국 수도에 있는 피어트 공작가.

    차남이자 기사단장인 루얀 피어트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연약한 우리 레아가 북부에 있는데 내가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역시 따라가야 했어……!”

    옆에 있던 기사단 3조장이 루얀을 뜯어말렸다.

    “단장님, 정신 차리십시오. 가긴 어딜 가십니까? 가을 수확제에서 퍼레이드는 누가 하고요?”

    페이런의 가을 행사인 수확제 퍼레이드에서 루얀은 몇 년째 선봉을 맡고 있었다.

    “퍼레이드 따위…… 네가 해라. 네 얼굴도 좀 생긴 편이잖냐!”

    “무슨 말도 안 되는…… 제 얼굴이 단장님과 비교가 됩니까? 제가 퍼레이드 선봉에 섰다간 돌 맞습니다!”

    루얀이 반응이 없자 3조장은 다른 걸로 말리기 시작했다.

    “이번 분기 신입 기사들 사열식은요? 동절기 기사단 훈련 일정은요? 왕실에서 단장님을 찾으며 온 편지는요?”

    “이이익, 너희가 좀 알아서 못 하냐? 봉급 더 주는 이유가 뭔…… 뭐? 편지?”

    “예. 패트릭 왕자님께서 보내셨습니다.”

    “패트릭 왕자님이?”

    루얀은 갸웃하며 턱짓했다.

    “가져와 봐.”

    페이런 왕국의 유일한 왕자이자 왕세자인 패트릭 페이런.

    그는 외모도 성격도 괜찮은 데다 유능했다.

    ‘나와 그렇게 막역한 사이는 아닌데. 무슨 일이지?’

    편지를 뜯으려던 루얀은 멈칫했다.

    다른 이들이 읽지 못하게 꼼꼼히 봉인되어 있었다.

    ‘밀서?’

    ❀ ❀ ❀

    잠시 후.

    루얀은 왕궁에서 패트릭 왕자와 독대했다.

    왕자의 제안은 간단명료했다.

    북부의 이상현상을 조사하기 위해 위장용 토벌대를 꾸릴 생각인데, 조사가 본 목적인 걸 알고 도와줄 소수정예 핵심멤버가 필요하다.

    그 핵심멤버가 되지 않겠는가?

    루얀이 물었다.

    “토벌대로 위장이라…… 이상현상 조사를 그렇게 비밀스럽게 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어쩌면 제국이 개입되어 있을 수도 있잖은가.”

    왕자가 설명했다.

    페이런의 귀족 중에는 친제국파가 워낙 많은 데다, 제국이 페이런 땅에서 이상한 짓을 벌이는 건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다.

    그러니 만약 제국 탓에 이상현상이 벌어졌다면, 친제국파 귀족들이 조사를 방해할 수도 있는 것이다.

    루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인 데다 요즘 그가 들은 북부의 상황은 확실히 이상했던 것이다.

    레아를 호위하고 북부로 간 2조장 바이든 경은 여러 보고를 보내왔었다.

    자주 들리는 몬스터 울음소리.

    헬칸을 고립시킨 때 이른 폭설.

    ‘북부엔 레아가 있는데…… 이렇게 위험해서야.’

    이건 기회일지도 모른다.

    레아 옆으로 가서 지켜 줄 기회!

    루얀은 마음을 굳혔다.

    “제가 합류하는 대가는 뭡니까?”

    “원하는 게 있나?”

    “있습니다.”

    루얀이 양손을 비비며 의외의 인물을 입에 올렸다.

    “더포드 남작.”

    왕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칼로시 대공의 사생아.

    왕실의 부끄러운 일원인 더포드 남작이 여기서 왜 나온단 말인가?

    루얀이 그런 패트릭 왕자를 보며 으스스한 미소를 지었다.

    “그 작자를 패게 해 주시면 지금 당장이라도 출발하겠습니다.”

    ❀ ❀ ❀

    북부의 피어트 별장에서도 레아가 뜻밖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몬스터가 날뛴다고?”

    “예. 인가도 습격하는 모양입니다.”

    큰일 났다.

    레아는 옆에 선 헬릭스를 흘끔 쳐다봤다.

    “……얼마나 나타났대? 계속 수가 느는 건 아니겠지?”

    “다행히 더 이상 넘어오진 않는 것 같습니다.”

    휴.

    그나마 헬릭스가 ‘내 탓이다’라며 봉인진에 들어갈 일은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렇지만 인가를 덮친다니, 진짜 큰일이네.’

    레아가 바이든 경에게 명령했다.

    “더 자세히 설명해 봐.”

    “상황이 좀 복잡합니다.”

    지금 페이런 왕국의 북부는 영주 없는 빈 땅이었다.

    산이 험하고 인구가 적어, 귀족들이 굳이 영지로 삼으려 들지 않았던 것이다.

    영주가 없으면 보호도 없는 법.

    북부의 사람들은 영주가 보내 주는 병사들 없이, 자경단과 사냥꾼들이 힘을 합쳐 몬스터를 겨우 막고 있었다.

    몬스터 중 약해진 개체만이 헬 산맥을 넘기에 가능한 방법이었다.

    그렇지만 최근엔 상황이 달라졌다.

    강한 몬스터들도 헬 산맥을 넘어, 산 아래 마을까지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북부 사람들은 겁에 질렸다.

    “그래서 인근 마을의 사람들이 별장으로 몰려와 도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도움?”

    “예. 피어트 기사단의 무력으로 몬스터를 퇴치해 달라고 합니다만.”

    말하면서도 바이든 경은 조마조마했다.

    그가 지금 모시는 레아 피어트 공녀는 곱게 자란 귀족 영애.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 도와주라고 할까 봐 걱정이었다.

    레아가 냉큼 답했다.

    “거절해.”

    “당장 도와야 하지 않겠는가.”

    레아와 헬릭스가 반대의견을 내놓고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헬릭스가 딱딱하게 말했다.

    “당연히 도와야 한다. 약자를 보호하는 것은 귀족의 고결한 의무니라.”

    “공짜 용병 취급당하는 게 무슨 고결한 의무야?”

    “…….”

    헬릭스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렇잖아. 여기는 우리 영지도 아니야. 우리가 보호하고 지켜 줘야 할 의무 같은 건 없다고.”

    “그렇지만 어차피 기사단이 있지 않은가. 무력을 쓴다고 닳는 것도 아닐 텐데.”

    “닳아.”

    레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칼도 방패도 창도 다 닳고, 우리 기사들 연골도 닳고. 괜히 처음 본 몬스터 잡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떡해?”

    “고, 공녀님.”

    바이든 경이 감격한 표정으로 레아를 쳐다봤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누구 영지도 아니라는 건, 결국 왕국 땅이라는 얘기잖아. 우리 기사단이 국유지에서 몬스터를 처리하느라 칼을 빼 들었다고 알려져 봐. 어떻게 되겠어?”

    레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우리 가문을 적대하는 귀족들이 꼬투리 잡으려 들 거라고.”

    국경 근처의 국유지에서 군사행동을 했다, 반역 의도가 엿보인다, 피어트 공작가가 역심을 품었다.

    얼마든지 갖다 붙일 수 있을 터였다.

    “공녀님…….”

    어린 귀족답지 않은 통찰력에 바이든 경이 감탄했다.

    “참으로 영민하십니다.”

    “내가 좀 영민하긴 해.”

    “조금이 아닙니다. 이토록 빠르고 정확한 상황판단, 역시 피어트 가문의 일원이십니다.”

    “바이든 경이 뭘 좀 아네. 우리 피어트 가문에선 이 정도는 식은 수프 먹기랄까?”

    훈훈한 분위기에 헬릭스가 불편한 기색으로 끼어들었다.

    “그러면 몬스터에게 위협당하는 마을을 그대로 두잔 말인가?”

    레아가 씩 미소 지었다.

    “그건 믿는 구석이 있지.”

    ❀ ❀ ❀

    “헬릭스, 헬릭스.”

    헬릭스는 한밤중에 자다 깼다.

    머리맡에서 시커멓게 입은 사람이 그를 부르고 있었다.

    “……레아?”

    헐렁한 로브를 뒤집어쓰고 얼굴 아래쪽도 가렸지만 틀림없었다.

    그녀가 후드를 더 푹 내렸다.

    “내가 레아로 보이냐.”

    “레아, 속일 사람을 속여라. 네 마나는 다 느껴진다.”

    “쳇.”

    사실 마나가 안 느껴져도 모를 수가 없었다.

    로브와 두건 사이로 파랗게 반짝이는 눈만 봐도 누군지 알 수 있었으니까.

    헬릭스가 일어났다.

    “이 밤중에 무슨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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