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10)화 (10/120)
  • 10화

    가까이 다가갔는데 봉인진이 덥석 헬릭스를 끌어당기면 어쩌지.

    마나석으론 안 되면 어떡하지.

    ‘될 거야.’

    저벅저벅 멀어지는 헬릭스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눈이 떨렸다.

    넓은 어깨가, 쭉 뻗은 다리가 조각상으로 다시 돌아갈까 봐.

    ‘될까?’

    그의 긴 은발도, 그녀를 향할 때면 은근히 웃음 짓는 회색 눈도 유리 세공품처럼 굳어 버릴까 봐.

    쿠웅.

    봉인진의 바닥에 마나석 기둥이 닿으며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되나?’

    꼴깍.

    그녀는 귀를 쫑긋 세우고 눈에 힘을 주었다.

    손바닥에 땀이 찼다.

    그 순간 레아의 몸이 흔들렸다.

    우우우웅…….

    봉인진 바닥에서 폭발하듯 빛이 솟아오르며, 빛무리가 마나석을 휘감았다.

    바닥에서 시작된 진동이 벽과 천장을 타고 동굴 밖으로 이어지는 게 느껴졌다.

    “……됐지? 된 거지?”

    레아가 헬릭스에게 물었다.

    저도 모르게 끝이 떨리는 음성.

    자기 건강에 대해 말할 때도 담담하던 그녀가, 지금은 티 나게 불안한 표정이었다.

    헬릭스는 레아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심장이 크게 뛰었다.

    “……그렇다.”

    “그럼 헬릭스 너, 저기 안 들어가는 거지?”

    “…….”

    그가 그녀를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으아…….”

    레아가 주저앉았다.

    갑자기 긴장이 풀어져서 어질어질했다.

    “바닥이 차다.”

    헬릭스가 망토를 깔며 옆에 앉았다.

    냉큼 망토 위로 엉덩이를 붙인 레아가 한숨 쉬며 봉인진을 바라보았다.

    “……멀쩡하네.”

    “잘 돌아가는 것 같다.”

    헬릭스의 얼굴에 씁쓸함이 번졌다.

    “저렇게 해결할 수 있던 일을 위해 내가 갇혀 있었던 건가.”

    레아는 흘깃 그를 쳐다봤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갇혔는지 사연을 모르니 위로의 말을 꺼내기도 애매했다.

    ‘그치만 여기서 가만히 입 다물고 있으면 안 될 거 같은데.’

    그녀는 잠깐 끙끙대다 입을 열었다.

    “그래도 저걸로는 결계가 얼마나 갈지 모르잖아. 용량이 다르다고.”

    “……그 차이인가?”

    “진짜 그것만이겠어?”

    레아가 장난스레 미소 지었다.

    “사실 난 여기 만든 사람…… 아니 드래곤도 이렇게 하는 법은 몰랐을 거라고 생각해. 내가 워낙 천재적인 발상의 전환을 한 거지.”

    헬릭스가 저도 모르게 픽 웃었다.

    “인정하겠다.”

    “후. 누구 제자가 이렇게 천재적이지? 내 숨겨진 재능이 두렵네.”

    의기양양해하는 레아를 향해 그가 찬물을 끼얹었다.

    “운동을 좀 더 하면 그 재능을 더 꽃피울 수 있을 거다.”

    “아니 잠깐. 그건 아니지.”

    정색하고 고개를 흔드는 레아를 보고 헬릭스는 결국 소리 내 웃고 말았다.

    ‘앗, 빛……!’

    무방비 상태로 그의 웃는 얼굴에 노출된 레아가 뻣뻣해져서 고개를 돌렸다.

    “아, 암튼. 둘이 같이 고민하고 움직이니까 낫지?”

    “훨씬 낫다.”

    “그치? 계약자 말 안 듣고, 계약 깨고 단독 행동했으면 큰일 날 뻔했지?”

    반성하라는 눈빛으로 압박하자 헬릭스는 항복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군.”

    “그럼. 그러니까 앞으로도 헬릭스 너 혼자 결정하는 건 금지야.”

    헬릭스가 저도 모르게 계속 고개를 끄덕이려다 정신을 차렸다.

    “……앞으로도?”

    “계약 기간 내내. 아까 내 말대로 한다고 했지?”

    “그건.”

    봉인진에 대한 네 방법을 따르겠다는 소리였는데.

    그렇지만 어쩐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라고 하기 싫었다.

    “……그래.”

    헬릭스가 말했다.

    “네 말대로 하겠다.”

    이 말이 이렇게 끌려가는 기분 하나 없이 기쁘기만 한 말이었나.

    낯선 기분에 제 말을 곱씹는 그에게, 레아가 또 말했다.

    “계약 기간 동안 나 버리고 희생하겠다고 어디 홀랑 가 버리는 것도 안 돼.”

    “버리고 가지는 않겠다.”

    “뭐야 그게. 말은 하고 가겠다는 소리잖아?”

    “그렇다.”

    “에효.”

    레아가 코를 찡그리며 웃었다.

    “이 계약자 씨 진짜 한결같네.”

    헬릭스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녀의 동작 하나하나가 너무도 뚜렷하고 선명했다.

    답 없다는 듯이 살짝 고개를 젓고, 코를 찡그리며, 입술이 장난스러운 호선을 그리고, 푸른 눈이 접힌 채 그를 향해 반짝여서…….

    쿵.

    심장 소리가.

    쿵. 쿵.

    북소리처럼 귓가에 울렸다.

    레아가 그에게 손가락 하나를 펴 보이며 종알거리는 소리도 멀게 들렸다.

    “……안 되겠어. 앞으로 ……하루에 한 번씩 ……타임을 갖자.”

    “그래.”

    헬릭스가 무뚝뚝하게 동의했다.

    멀쩡해 보이는 건 겉모습뿐.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그가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대로 하자.”

    대답한 헬릭스가 뒤늦게 되물었다.

    “그런데 ……타임이 뭔가?”

    ❀ ❀ ❀

    페이런의 수도를 굽어보는 왕궁에서는 긴급회의가 열렸다.

    왕과 재상, 왕세자까지 셋만 참여한 긴급재난회의가 열린 이유는 하나. 때아닌 북부의 폭설 때문이었다.

    올해 들어 북부에 이상현상은 유례없이 잦았다.

    몬스터의 잦은 출몰.

    초가을의 폭설.

    모두 전에 없던 일이었다.

    “이상현상은 헬 산맥에만 집중되어 있습니다.”

    패트릭 왕세자의 보고에 재상과 왕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페이런 왕국 최북단에 있는 헬 산맥은 북쪽 오염된 땅으로부터 페이런 왕국을 보호하는 영험한 산이었다.

    그런 헬 산맥에서 이런 이상현상들이 연이어 벌어지다니,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제가 한번 헬 산맥에 가 보겠습니다.”

    “왕자 네가 직접 말이냐?”

    “예.”

    패트릭 왕자의 눈빛은 진지했다.

    “몬스터 토벌대를 이끌면서 은밀하게 이상현상의 원인을 조사해 볼 생각입니다.”

    왕자는 자신이 직접 몬스터를 토벌하러 간다고 하면 여론도 좋아질 거고, 북부의 민심을 진정시키기도 좋을 거라고 덧붙였다.

    재상이 동의했다.

    “왕자님 말씀이 맞습니다. 귀족들도 왕자님이 공을 쌓고 싶어서라고만 생각하지, 조사를 하시리라곤 예상치 못할 겁니다.”

    맞는 말이었다.

    친제국파 귀족들의 눈을 속이며 국경과 이상현상을 조사하고, 입지가 약한 패트릭 왕자의 활약을 부각함과 동시에 왕실의 자비로움도 강조해 민심을 달랜다.

    얻는 것만 있어 보이는 계획이었지만 왕은 고민했다.

    ‘왕자가 위험에 처하기라도 하면…….’

    하나뿐인 후계자였다. 칼로시 대공은 사람들의 눈이 없는 곳에서 왕자를 능히 해칠 수 있을 테고.

    왕은 한참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그 계획이 성공하려면 호위가 철저해야 할 것이다. 조사를 들키지 않을 만한 소수정예 별동대가 있어야 할 테고.”

    왕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마침 적당한 인물이 있습니다.”

    “적당한 인물? 그게 누구냐?”

    ❀ ❀ ❀

    헬칸이 때아닌 폭설로 뒤덮였지만, 정작 피어트 별장은 기사들이 눈 치우느라 고생하는 것만 제외하면 평화로웠다.

    레아는 매일매일 마법 수련에 정진했다.

    ‘근데 이게 마법수업이야, 재활훈련이야?’

    그녀는 헬 산을 돌면서 생각했다.

    아무래도 헬릭스는 나를 전투마법사로 키우고 싶은 게 아닐까.

    그러니까 아예 마법수업도 운동도 헬 산맥에서 시키면서, 하드코어 훈련으로 굴리는 게 아닐까?

    “헥헥.”

    산 능선을 한 바퀴 걸은 레아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헬릭스, 헥, 솔직히, 말해. 이거 전투마법사용, 헥, 훈련이지?”

    헬릭스는 물을 건네며 잘라 말했다.

    “사람 같은 체력을 만드는 거다. 내가 설마 레아 네 운동신경에 전투까지 바라겠나?”

    “아앗, 팩트폭력…….”

    비틀대는 레아를 일으키며 그가 툭 말했다.

    “그래도 점점 체력이 붙는 듯하다. 마나의 흐름도 강해졌고.”

    “근데 왜 마법 시전이 안 되지?”

    그녀가 한숨 쉬자 헬릭스가 말했다.

    “조급해할 것 없다. 꽃봉오리가 여물고 나면 언제 피든 피어나지 않나. 적당한 때가 올 거다.”

    “그러려나? 그렇겠지?”

    초조해하지 말아야지.

    레아가 몸을 쭉 펴며 헬릭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무튼 오늘 일정 끝났지? 오늘도 고마웠어.”

    “……수고했다.”

    가벼운 마무리 인사.

    그는 긴장했다.

    일정이 끝날 때쯤이면 꼭 하게 되는 칭찬타임 때문이었다.

    “헬릭스, 내가 잘생겼다고 했어?”

    “했다.”

    “했다고? 그럼 또 들어. 넌 정말 냉미남의 정석이야.”

    “…….”

    “얼굴만 잘생겼나? 아까 내가 추울까 봐 따뜻한 마나를 넣어 준 거지? 어쩌면 이렇게 배려심도 넘치고 섬세한지 몰라.”

    “……으음.”

    헬릭스가 신음했다.

    “……매일 이래야 하나?”

    “하기로 했잖아?”

    왜 그때 제대로 듣지도 않고 하겠다고 했을까.

    헬릭스는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아무래도 실수한 것 같다.”

    “무슨 소리야. 우린 아직 계약자끼리 유대관계가 부족하다고.”

    레아의 주장은 그랬다.

    신뢰도 쌓고 서로 알아 가는 노력의 일환으로, 하루 한 번 칭찬타임을 갖자는 것.

    자꾸 칭찬해 주다 보면 호감도 생기고, 좋은 점도 더 잘 알게 되지 않겠느냐는 말이었다.

    물론 숨겨진 의도는 따로 있었다.

    ‘모처럼 잡은 건강줄인데, 이렇게 툭하면 희생하려 들어선 곤란해.’

    너무 거리낌 없이 나서는 점도 걸렸다.

    자기희생이 몸에 밴, 자길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티가 났으니까.

    ‘그러면 언제고 또 비슷한 일에 희생하려 들 거야.’

    계약자이자 마법스승을 그렇게 쉽게 보내 줄쏘냐.

    ‘헬릭스가 자길 귀하게 여기도록 칭찬폭격을 해야겠어.’

    레아가 다짐했다.

    ‘자존감도 세우고, 지금 세상과 어우러지게 사회화도 시키고.’

    그래서 오래오래 계약자로 붙들어 놓고 꿀을 빨아야겠다!

    “…….”

    헬릭스는 속으로 다짐하는 레아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짐작도 못 하겠지만, 사실 레아의 노림수야 빤히 다 보였다.

    ‘내 정서를 안정시켜서 희생을 덜하게 할 셈이겠지.’

    그렇지만 그는 모르는 척했다.

    그런 빤한 의도라도, 어쨌거나 자신을 위해 주는 마음이 고마웠으니까.

    ‘그래도 이렇게 민망할 줄은 몰랐다.’

    레아가 말간 얼굴로 ‘잘생겼어’라고 할 때마다 곤혹스러웠다.

    “……요즘엔 앞에서 대놓고 외모 칭찬을 하나?”

    “사교계에서는 안 하지. 그래도 우리끼린 괜찮잖아. 칭찬타임인데.”

    안 괜찮다.

    안 괜찮다고!

    헬릭스가 내적 비명을 지르며 마른세수를 했다.

    부끄럽고, 민망하고, 도망치고 싶고.

    가끔은 차라리 온몸이 잠깐 석상으로 변하는 게 나을 성싶었다.

    그가 괴로워하는 사이 레아가 올려다보며 말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