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저벅저벅.
헬릭스가 급하게 움직이자, 레아는 뒤따라가며 물었다.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아즈라의 레어로 간다.”
“레어? 아즈라?”
“네가 날 발견했던 곳 말이다. 그곳은 원래 드래곤로드 아즈라의 레어였다.”
헬릭스가 설명했다.
드래곤로드 아즈라의 레어.
마법사나 아즈라에게 허락받은 자들만 출입할 수 있는 그곳.
아즈라의 레어에는 거대한 결계를 유지하는 장치가 있었다.
헬 산맥 너머 오염된 땅의 나쁜 물질과 몬스터로부터 남쪽을 보호하는 결계였다.
그 결계를 유지하는 장치가 바로 헬릭스를 가둔 봉인진.
“그러니까, 헬릭스 네 마나의 에너지로 헬 산맥 남쪽의 사람들을 보호하는 구조네?”
“그렇다.”
헬릭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봉인에서 빠져나와도 별일 없었고, 네 말대로 수백 년이 지나 결계의 힘도 다한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멀리 은색 단풍나무를 발견한 헬릭스가 걸음을 서둘렀다.
레아는 긴 은발을 휘날리며 앞서 걷는 그의 등을 쳐다봤다.
‘지금 이른 눈이 오는 게 문제가 아니잖아?’
헬 산맥은 예로부터 오염된 땅으로부터 페이런 왕국을 지켜 주는 영험한 산으로 취급받았다.
그런데 방금 한 말대로라면, 헬 산맥은 페이런 왕국을 지켜 주는 결계고, 그 힘은 헬릭스에게서 나왔단 게 아닌가.
내가 뭘 깨운 거지.
그녀가 눈을 깜박이는데 앞서가던 헬릭스가 돌아보았다.
“레아, 어서 와라.”
“알았…… 앗!”
서두르던 레아가 넘어질 뻔하자 헬릭스가 달려와 손을 잡았다.
“조심해라.”
레아는 숨을 크게 쉬었다.
제 손을 잡은 헬릭스의 큰 손이 뜨거웠다.
살아 있는 사람의 손이었다.
‘……망할 드래곤 놈들.’
절로 화가 났다.
처음 봉인진에 갇힌 헬릭스를 봤을 때가 생각났다.
진짜 조각상인 줄 알았는데.
사람을 산 채로 박제해서 몇백 년이나 가둬 놓고 마나 착즙기로 써먹다니, 그 파충류 놈들은 양심이란 것도 없나?
‘멸종해도 싸다!’
분노 파워가 풀충전된 레아가 헬릭스의 손을 꽉 잡자, 그는 멋모르고 마주 힘주어 잡았다.
“걱정하지 마라.”
헬릭스가 다짐하듯 말했다.
“레아 너와 사람들이 위험해지는 일은 없을 거다.”
그녀의 손을 잡은 헬릭스가 은색 단풍나무에 손을 대는 순간, 눈앞이 번쩍였다.
❀ ❀ ❀
“으아악!”
“컥!”
눈이 멀 것 같은 빛과 함께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다.
“……!”
레아는 빛에 놀란 눈을 깜박이며 겨우 주위를 살폈다.
헬릭스가 석상처럼 굳은 채 서 있던 인공동굴.
그 안에서 수상해 보이는 사람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뭐지?”
“모르겠다. 여긴 보통 사람들이 들어오기 힘든 곳인데…… 레아, 내 뒤에 붙어 있어라.”
“으악!”
비명이 또 들리며 남자 하나가 또 피를 뿜었다.
처음 헬릭스가 서 있던 봉인진 근처였다.
헬릭스가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함정이 발동하다니. 봉인진에 손을 댄 건가?”
처음에 레아가 헬릭스를 깨웠을 때도 저 봉인진 근처에서 화살이 날아왔었다.
“그럼 아까 그 빛도?”
“봉인진을 둘러싼 함정이었을 거다. 번개마법이었겠지.”
함정 근처의 사람들을 훑어본 헬릭스가 고개를 돌렸다.
“남은 목격자는 하나뿐인가.”
“으…… 으어어.”
수북이 쓰러진 사람들 사이에서 화살에 맞은 남자 하나만 남아 덜덜 떨고 있었다.
헬릭스는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뭐 하는 자들인가? 무얼 건드렸지?”
“사, 살려 주십쇼……!”
화살 맞은 남자는 얼이 빠져 털어놓았다.
그들은 도굴꾼들이었다.
근처의 낡은 신전을 털다가 이 위치에 드래곤 레어가 있다고 정보를 얻은 것까진 좋았다.
드디어 크게 한탕 할 수 있으리란 기대도 잠시.
번쩍이는 봉인진에 홀린 놈들이, 그걸 가지고 가려다가 기괴한 함정들에 다 죽고 말았다.
사람을 태우는 빛, 한순간에 반 동강 내는 칼날, 쏟아지는 화살…… 함정은 끝도 없었다.
“쿨럭!”
화살에 맞은 남자가 검은 피를 토했다.
“저주, 드래곤이 저주를 걸어 놓은 겁니다!”
비명처럼 외친 남자가 부르르 떨더니 풀썩 쓰러졌다.
“……죽었어?”
“죽었다.”
레아는 소름 돋는 팔을 문질렀다.
“이 사람, 저주로 죽은 거야?”
“평범한 함정이다. 독화살에 맞은 거지.”
헬릭스가 잘라 말했다.
“그 정도도 각오 안 하고 드래곤의 물건을 훔치려 들었단 말인가.”
냉정하게 말한 그가 봉인진을 노려보았다.
하필 저것을 건드리다니.
“레아.”
헬릭스가 우울하게 말했다.
“짧은 기간이나마 즐거웠다.”
“……갑자기 왜 그래?”
레아가 무슨 소린가 하고 눈을 깜박이는 사이.
헬릭스는 그대로 봉인진 쪽으로 향했다.
“잠깐, 잠깐! 스톱!”
❀ ❀ ❀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를 붙들었다.
“뭐 하려는 거야? 어디 가려고?”
헬릭스는 침묵했다.
레아가 그의 옷자락을 붙들고 집요하게 물었다.
“설마 저 봉인진에 다시 들어가려고?”
“……나 때문인지도 모른다.”
예상 밖의 말에 레아가 되물었다.
“응?”
“내가 봉인진을 지키고 있지 않아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거다.”
“무슨 소리야? 그거라면 나 때문이겠지. 내가 널 깨웠잖아.”
“넌 모르고 한 게 아닌가. 나는…… 이 자리를 지켰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헬릭스가 설명했다.
결계가 무너지면 오염된 땅으로부터 오는 물질 때문에 기상이변이 나타날 거고, 몬스터들도 넘어올 거라고.
“이 결계가 뚫린 이상 이 지역은 점점 더 초토화되고 사람들이 죽어 나갈 것이다. 내가 지켜야 한다.”
“그럼 여기서 계속 조각상처럼 서서, 쫄쫄 굶으면서 갇혀 있겠다고? 혼자서?”
굳건하던 헬릭스의 표정이 ‘혼자서’라는 대목에서 잠시 흔들렸다.
그렇지만 그는 단호하게 답했다.
“그러라고 수호자가 있는 것이다.”
레아의 뚜껑이 열렸다.
“동작 그만.”
그녀가 헬릭스의 손목을 턱 잡았다.
헬릭스는 말랑한 손에 손목이 잡힌 채 놀라 굳었다. 레아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계약은 어쩌고?”
“…….”
그녀가 계약할 때 나눠 가진 마나석 목걸이를 들어 올려 보였다.
“계약의 증표까지 나눠 가져 놓고 네 멋대로 다시 봉인되겠다고?”
레아가 목걸이를 쥐고, 보란 듯이 몸의 마나를 끌어 올렸다.
우웅…….
목걸이의 마나석이 울리며 인공동굴이 공명하듯이 함께 진동했다.
‘어?’
그녀는 속으로 놀랐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헬릭스를 계속 노려보았다. 죄책감 어린 표정으로 침묵하던 헬릭스가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수호자로서의 의무가…….”
레아가 그의 말을 잘랐다.
“그놈의 수호자가 뭔데?”
“수호자는 마나를 통제해서 세상의 균형을 유지한다.”
“그렇게 세상의 균형을 유지해서 뭘 하려고?”
“약자를 보호하고 질서를 지킨다.”
“그걸 왜 너 혼자 해야 하는데?”
헬릭스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레아가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재차 물었다.
“너 혼자 하면, 다 막아지긴 해?”
쏘아보는 새파란 눈에 압도당해, 헬릭스는 숨을 멈추고 레아를 내려다봤다.
“……그것이 내 의무다.”
“의무가 아니라 열정페이겠지.”
레아가 시니컬하게 내뱉었다.
“안 봐도 빤하네. 헬릭스 너한테 희생하라고 할 때마다, 시키는 놈들이 그랬지? 수호자님이 희생하시면 많은 사람을 구할 텐데. 수호자님이 의지를 가지고 노오력을 하시면 다 될 텐데 조금만 더 힘내시지. 어쩌고저쩌고.”
“……레아 네가 그걸 어떻게 아나?”
“다 아는 수가 있어. 아무튼, 계약자 씨.”
레아가 도전적으로 헬릭스를 올려다봤다.
“다른 방법이 있다면 어쩔래?”
“다른 방법이 있다면.”
그가 무겁게 되뇌다, 그녀와 눈을 맞췄다.
확신에 차서 빛나는 파란 눈동자.
“내 말대로 할래?”
보는 사람까지도 전염되는 강한 눈빛이었다.
“……그럼 네 말에 따르겠다.”
“약속했다?”
헬릭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아는 몸을 돌려 동굴을 둘러보며, 제 목에 걸린 마나석 목걸이를 꽉 잡았다.
우웅…….
전생의 경험에서 배운 것 중 한 가지는, 세상에 방법이 하나뿐인 일이란 없다는 것.
레아가 말했다.
“헬릭스 너 하나 갈아 넣어서 해결하는 거 말고,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우우웅…….
그 말에 반응하듯, 동굴에 울림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이 빛났다.
“……내 생각엔 저 기둥이 해결책이 될 것 같은데.”
레아는 동굴 안의 기둥을 잘라 봉인진에 넣자고 제안했다.
“……여기 기둥을 말인가?”
“응. 이 기둥, 마나석 맞지?”
헬릭스는 놀라 레아와 기둥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떻게 알았나?”
“너랑 나눠 가진 마나석하고 똑같이 내 마나에 반응하잖아.”
헬릭스가 넣어 주는 마나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네 말이 맞다. 마나석은 마나가 응축된 물질이다.”
“잘됐네.”
레아가 말했다.
“이 결계에서 헬릭스 네 역할은 마나 공급이잖아. 그럼 너 아니어도 마나만 공급해 주면 되는 거 아냐?”
전생의 기억을 바탕으로 내린 결론이었다.
“꼭 울트라 맞춤 배터리여야 돼? 건전지를 써도 돌아가기만 하면 장땡이잖아.”
레아가 주위의 마나석 기둥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마침 건전지로 쓸 법한 물건도 주위에 많이 있고.”
“생각지 못했던 발상이군. 결계에 마나석을 이용한다…….”
“해 봐서 나쁠 건 없잖아.”
“그렇군. 그런데 레아.”
헬릭스가 심각하게 물었다.
“배터리가 뭔가?”
“…….”
“건전지는?”
레아는 속으로 땀을 흘리며 머리를 굴렸다.
“그…… 마나 같은 기운을 모아 놓은 거래.”
“으음. 처음 듣는 말이다.”
생각만 해야 하는데 가끔 입 밖으로 전생 용어가 튀어나온다니까.
“나, 나도 들은 얘기야.”
“그런가.”
다행히 헬릭스는 넘어가는 것 같았다.
한참 숙고하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 볼 만하다.”
❀ ❀ ❀
콰직! 콰드득!
헬릭스가 두꺼운 마나석 기둥을 잘라 내 짊어지고 봉인진으로 다가가는 것을, 레아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정말 되는 거겠지?’
제안할 때는 자신만만했다. 가만히 두고 보는 것보단 낫다고, 뭐가 됐든 시도해 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막상 그가 봉인진에 가까워지는 걸 보자 불안감에 가슴이 조여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