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귀족이 빈정거렸다.
“요양 가서 사교계에 안 보인다고 백합을 팔고, 꽃이 쉬이 시드니까 백합 장신구를 팔고. 다들 장삿속으로 눈이 벌게져서 페이릴리를 여기저기 갖다 붙이지 않습니까?”
“그야 페이릴리가 워낙 예쁘고 눈에 띄니까…….”
“예쁜 거 하나로 이 난리인 게 웃기다 이거지요. 그래 봤자 고작 어린 여자일 뿐인데. 여자가 아무리 예뻐 봤자 용도는 하나 아니겠습니까?”
귀족은 가슴께에 꽂은 백합을 툭툭 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러다 거리의 여자들이 가슴에 백합을 꽂을 일도 머지않았다니까요. 하하, 두고 보십시오. 페이릴리가 곧 창부의 예명으로 불릴 겁니……!”
떠들던 귀족의 턱이 돌아갔다.
우당탕!
팽이처럼 돌던 그의 머리가 몸과 함께 날았다.
“퍼흐억!”
난데없이 벽에 처박힌 귀족이 폐에 고인 숨을 뱉었다.
머리가 울리고 온몸이 아파서 정신없는 와중에도, 자신을 때린 이가 다가오는 건 알 수 있었다.
“흐어억!”
귀족은 본능적으로 벽에 등을 붙이며 뒤로 기었다.
루얀이 놈에게서 떨어진 백합을 집어 들었다.
“페이릴리가 뭐가 어째?”
음산한 목소리였다.
맞은 귀족만이 아니라 술집 안의 사람들이 모두 침을 꼴딱 삼켰다.
“창부의 예명? 하, 이 새끼가 미쳤나…….”
루얀의 눈이 반쯤 돌아서 귀족을 내려다보았다.
여자의 용도가 어쩌니, 창부의 예명이니 해 대는 소리를 보면 놈의 속이야 빤했다. 레아는 탐나는데 제 손에 닿지 않으니 깎아내리는 것이다.
“눈깔만 있고 양심도 없는 새끼가 입은 살아 가지고……. 내 동생이 예쁜 게 죄냐? 어?”
퍽!
루얀이 쓰러진 귀족의 허벅지를 찼다.
“컥!”
“대답 안 해?”
“제,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래, 알긴 아네.”
루얀이 고개를 끄덕이며 귀족의 다른 쪽 허벅지를 또 찼다.
“억!”
점점 그곳에 가까워지는 발길질에 귀족의 얼굴이 고통과 두려움으로 허옇게 질렸다. 루얀은 발을 탁탁 털 듯 흔들며 놈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눈 깔고 다녀라.”
확 파 버리기 전에.
뒷말을 짐작한 귀족이 마른침을 삼켰다.
루얀은 놈이 떨어트린 백합을 가슴에 꽂으며 다른 치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불만 있으면 니들이 눈을 깔아. 그 눈깔로 내 동생 한 번만 더 봤다간 그냥…….”
주위를 쓱 훑어보던 루얀의 시선이 백합을 꽂은 놈들에게서 멈췄다. 그가 기억해 두겠다는 듯이 노려보았다.
“…….”
얼른 가슴에서 백합을 뺀 놈들이 바로 버리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손에 든 채 눈을 피했다.
루얀의 머릿속을 두 가지 생각이 꽉 채웠다.
‘감히 이 새끼들이 누구한테.’
그가 주먹을 쥐었다.
‘역시 레아에게 가 봐야겠다.’
❀ ❀ ❀
팔불출 둘째 오라비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줄 모르고, 레아는 별장의 개인응접실에서 제 용무에 바빴다.
타닥타닥.
벽난로 가득 장작이 타들어 가며 방의 공기를 훈훈하게 데웠다. 테이블엔 티포트에 담긴 따뜻한 차와 달달한 쿠키며 다쿠아즈 등이 세팅되었다.
“휴. 이제 끝.”
레아가 입에 캐러멜을 하나 물고 비장하게 말했다.
“자, 다 준비됐어.”
“……이걸 준비해야 수업하는 건가?”
“응. 추우면 손 곱고, 당 떨어지면 집중 안 되니까.”
헬릭스는 푸릇한 열아홉 살의 얼굴을 하고 할매처럼 말하는 레아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웃기고 귀여운데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만감이 교차했다.
“……건강해지면 바로 수업할 수 있을 거다.”
“그거 기대되네. 나 사실 성격 좀 급하거든.”
“그건 드래곤 레어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았다.”
“아니, 어떻게?”
“…….”
고개를 저은 헬릭스가 수업을 시작했다.
“일단 마나를 느끼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헬릭스가 설명했다.
마법은 마나를 제 뜻대로 움직이는 요령이기 때문에, 마나를 느껴야 마법을 할 수 있다고.
“레아 너는 운이 좋다. 마법사로 대성하려면 몸 안에 마나의 길을 잘 닦아 놓아야 하는데, 그건 이미 끝났으니.”
레아는 어리둥절해졌다.
“내가?”
“드래곤의 마나를 먹고 쓰러졌을 때 나를 만났지 않나.”
드래곤의 마나는 너무나 강력해서 인간의 몸에 들어가면, 인간은 그대로 마나 과다로 죽었다.
아무리 좋은 약도 백만 배 농축액이면 치명적인 독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
간혹 드래곤의 피가 섞인 이들이나 마나 감응력 천재들 정도가 예외라고 했다.
“그런데 레아 너는 기가 너무 약하고 혈맥도 가늘어서…… 드래곤의 마나가 들어가서 바로 퍼지지 못하더군.”
“…….”
비실비실해서 목숨을 구한 건가.
“그래서 드래곤의 마나가 천천히 퍼져서 마나의 길이 닦인 거야?”
“그렇게 쉽게 되었겠나? 잘 퍼지지 못하고 있어 시간을 버는 사이, 내가 그 마나를 더 잘게 쪼개어 네 혈맥 사이로 흩어 보냈다.”
레아는 놀랐다.
그런 고급 작업을 무료로 해 주다니, 그때는 계약하기 전이었는데 말이다.
“그럼 내 마나의 길을 네가 닦은 셈이네?”
“비슷하다.”
짧게 말하며 생색내지 않는 헬릭스를, 그녀는 속으로 감탄하며 쳐다봤다.
‘뭐 이렇게 좋은 사람이 다 있지?’
목숨 구해 줬지, 그 와중에 없던 재능도 만들어 줬지.
그런데 헬릭스는 생색은커녕 보상도 바라지 않는 담백한 태도였다. 겉은 얼음처럼 냉정하고 고고한 엘프왕처럼 생겨선 속은 호구 성자 같았다.
‘은근 사람이 무른가? 아닌 것 같은데?’
아무튼 한 가지는 확실했다.
‘꽉 잡고 있어야겠다!’
레아가 진심과 사심을 담뿍 담아 웃어 보였다.
“여러 가지로 고마워.”
“……할 일을 한 것뿐이다.”
헬릭스가 말을 돌렸다.
“수업부터 하자. 편안한 자세로 호흡을 하면서 마나를 느껴 봐라.”
“이렇게?”
레아는 전생의 요가를 떠올리며 가부좌를 하고 단전과 심장에 집중했다.
“가르쳐 주지 않아도 가장 좋은 자세를 알아서 하다니. 재능이 있군.”
“그, 그래?”
조금 찔렸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심장과 단전 중 어느 쪽에 더 집중해야 돼?”
“하다 보면 어느 쪽에 마나 코어가 생기는지 알게 될 것이다. 개인에 따라 생기는 위치가 좀 다르다.”
레아는 시키는 대로 마나를 느끼는 데 집중했다. 눈을 감자 헬릭스가 말을 건넸다.
“깊이 호흡을 하면서 관찰해 봐라. 느낌이 어떻지?”
“후우…….”
레아가 지시대로 호흡했다.
“흐르는 기운이 느껴지나?”
“좀…… 뜨거운 거 같기도 하고.”
“그럼 불을 연상하면서 네 몸속 열이 오르는 곳을 탐지해 봐라.”
조곤조곤 말하는 낮은 목소리.
눈을 뜨고 있을 땐 얼굴이 너무 강력해서 몰랐는데, 눈 감고 들으니 목소리도 기막히게 좋았다.
아니 인간적으로, 얼굴도 좋고 몸도 좋으면 목소리라도 별로여야 되는 거 아닌가?
“딴생각하지 말고 집중해라.”
“……옙.”
레아가 얼른 대답하고 호흡에 열중했다.
헬릭스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쳐다봤다.
‘잘 따라오는군.’
그가 가르쳤던 마법사들 중에는 귀족 출신도 많았다.
다들 내가 누군지 아느냐는 둥 유세를 부리며, 맡겨 놓은 것처럼 마나를 요구하고 건성으로 수업 듣기 일쑤라, 헬릭스는 귀족에 대해 좀 편견이 있었더랬다.
그에 비하면 레아는 아주 착실한 학생이었다.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자니 그녀가 입술을 삐죽댔다. 집중하느라 저도 모르게 입술을 쭉 뺐다 우물대는 모습은 영락없는 소녀였다.
“…….”
왜인지 그 입술이며 볼을 눌러 보고 싶은 충동이 들어, 헬릭스는 조용히 뒤돌았다.
‘방해하지 말아야겠군.’
그는 차를 따라 천천히 마셨다. 레아와 어울리는 상큼한 시트러스 향이 방 안을 채워 갔다.
꿈인가.
헬릭스는 창밖의 푸른 하늘을 보며 생각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시간개념도 없는 봉인 속에 갇혀 괴로운 옛 기억만 곱씹고 있었는데.
지금 그는 계약자이자 제자와 함께 따뜻한 방에서 수업하며 향기로운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당 떨어진다는 얘길 하더니, 디저트는 거의 내가 먹었군.’
헬릭스는 깨달았다.
차도, 디저트도, 레아가 저를 배려해 준비한 거였다.
‘그 체격에 쿠키 한 봉지로 성에 차겠어?’
웃으며 그냥 다 먹으라던 레아의 얼굴이 떠올라, 그는 픽 웃음을 흘렸다. 아닌 척하면서 은근히 배려하는 건 천성인 모양이었다.
후룩.
입에 머금었던 차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면서 가슴을 데웠다. 넓은 유리창으로 초가을의 햇빛이 들어와 찻잔에 담긴 찻물 위에서 반짝였다.
이런 평화롭고 안온한 오후라니, 제 것이 아닌 양 낯설었다.
그렇지만 찻잔이 따뜻하고 차가 향기로워서. 입안에 남은 단맛의 여운이 좋아서. 무엇보다 벽난로 앞에 앉아 집중하고 있는 소녀의 뒷모습이 마음에 들어서.
헬릭스는 이 시간이 어쩐지 기꺼웠다.
❀ ❀ ❀
한편 페이런의 수도.
루얀이 난동을 피우고 나간 술집은 침울한 분위기였다.
“후우우.”
누군가가 한숨 쉬며 중얼거렸다.
“루얀 피어트, 옛날 가닥이 어디 가진 않았군.”
“그러게 말이야. 그 사건 이후로 미친 성질은 좀 죽었나 했더니.”
“망가진 천재라도 천재 아니겠나? 옛날 같았으면 저 주먹에 맞아서 기절이 아니라 즉사였어.”
부르르.
듣고 있던 더포드 남작의 얼굴은 허옇게 되었다.
‘루얀 피어트가…… 날 노려본 게 분명해!’
제 앞에서 말하던 귀족과 소파에 앉아 있던 루얀 사이의 거리는 상당했다.
그런데 더포드 남작은 루얀이 움직이는 궤적을 읽기는커녕, 그가 다가오는 걸 보지도 못했다.
뭔가 일어났다 싶었을 때에는 이미 귀족이 루얀의 주먹에 맞아 팽이처럼 돌고 있었다.
‘날 노려봤어. 날 노려봤다고.’
찔리는 데가 너무 많았다.
돈을 들여 레아가 좋아하는 디저트 정보를 산 것.
문 열자마자 품절된다는 제과점의 밤크림 머랭쿠키를 사서 훔친 사랑의 묘약을 바른 것.
피어트 공작가에 매수해 놓은 하녀에게 그 쿠키를 레아 방에 가져다 놓으라 시킨 것.
들키면 모두 매타작당할 일뿐이었다.
‘걸려서 맞았다간 죽을 거야!’
더포드 남작은 겁에 질렸다.
“나, 나는 왕실에서 모임이 있어서 이만!”
더포드 남작이 급히 달아났다.
‘어떻게든 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