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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6)화 (6/120)
  • 6화

    그렇지만 그녀에게 작정하고 사기를 칠 거였으면 약이며 새로 나온 의술 같은 걸 내밀지 마법이니 대마법사니 하는 비상식적인 떡밥을 던지진 않았을 것이다.

    레아는 차분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 바짝 차려야 해.

    “만약…… 대마법사가 안 되면? 계속 당신 도움을 받아야 하는 거야? 그럼 내 목숨줄을 댁이 쥐게 되는 거잖아?”

    “안 될 리가 없다. 그리고 아가씨 목숨줄이라면…….”

    잠시 망설이던 헬릭스가 냉정하게 말했다.

    “아가씨는 어차피 잃을 게 없지 않은가.”

    레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헬릭스가 놔뒀으면 어차피 죽었을 몸이었으니까.

    그녀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헬릭스가 제안했다.

    “아가씨, 나와 계약하고 마법사가 되는 거다.”

    “……그럼 당신은 뭘 얻는데?”

    “아가씨는 공작가의 영애라고 들었다.”

    헬릭스가 말했다.

    “아가씨에게 드래곤 마나를 먹인 범인을 그냥 두진 않겠지. 그 범인을 찾아내는 일에 나도 끼워 다오.”

    “왜?”

    “나는 드래곤의 흔적을 찾고 있다. 공작 가문의 힘을 빌린다면 훨씬 일이 빨라지겠지.”

    “드래곤의 흔적은 왜 찾는데?”

    “청산해야 할 빚이 있다.”

    서릿발 같은 음성에 진심 어린 원한이 가득했다.

    레아는 저도 모르게 소름 돋는 팔을 쓸어내리며 고민했다.

    빙의해서 다른 세상에서 적응해 살아남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갑자기 마법과 드래곤이라니.

    그녀의 걱정을 읽은 것처럼 헬릭스가 덧붙였다.

    “아가씨. 마법사가 되면.”

    그가 속삭였다.

    “정말 오래 살 수 있다.”

    레아가 저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건강하게?”

    “당연하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한 번 죽었으니 두 번 못 죽겠냐고 하기엔 이번 생에 미련이 너무 많았다.

    “……할게!”

    ❀ ❀ ❀

    헬릭스는 레아의 뜻을 재차 확인했다.

    “정말 수호자와 마법사의 계약을 하겠나?”

    “한다니까.”

    “……배신하면 안 된다.”

    “……도대체 과거에 어떻게 산 거야?”

    헬릭스가 씁쓸하게 대꾸했다.

    “수호자의 능력이란 게 그렇다.”

    마나를 통제하는 능력.

    세상 만물에 마나가 넘치던 시기에는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할 수 있는’ 능력이나 다름없었다.

    수호자가 마법사에게 마나를 몰아주면 대마법사급 마법을 쓰고, 낫기 힘든 병들도 마나의 순환을 통해 치료할 수 있었으니까.

    헬릭스의 설명을 듣고 레아가 중얼거렸다.

    “……치트키?”

    “그건 또 뭔가.”

    그녀가 말을 돌렸다.

    “아무튼 수호자의 능력을 되찾을수록, 나도 더 건강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거네?”

    “그렇다. 아가씨가 마법사로 성장해서 내 능력을 되찾도록 도와주면 서로 도움이 될 거다.”

    역시 안 할 이유가 없네.

    레아는 계약서를 작성했다.

    서로 정보를 공유한다.

    헬릭스는 레아의 건강과 마법 학습을 최선을 다해 지원한다.

    레아는 헬릭스에게 드래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며, 수호자 능력을 찾도록 최대한 지원한다.

    서로에게 위험한 일을 강요하지 않는다.

    위 사항을 어겼을 시 계약종료를 요청하면 계약은 상대의 동의 없이도 종료된다.

    헬릭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아가 먹은 드래곤의 마나.

    그걸 함께 추적하다 보면 드래곤의 흔적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흔적을 발견하고 뒤쫓아가는 데까진 그녀의 협력이 필요하겠지.’

    그 뒤에 레아를 끌어들일 생각은 없었다.

    드래곤과의 은원은 헬릭스 개인의 일. 힘을 되찾은 뒤 혼자 상대하는 게 옳았다.

    ‘드래곤을 상대하려면 대마법사급은 되어야 가능한데, 이 아가씨가 단시간에 거기까지 성장하기도 힘들 테고.’

    헬릭스는 손가락 마디 두 개만 한 작은 보석을 꺼냈다.

    “여기에 손을 겹쳐 올리고 계약을 되새기면 된다.”

    레아가 먼저 손을 올리고, 헬릭스가 그 위에 손을 얹었다.

    “……하도록 계약한다.”

    쩌적!

    계약서를 읽자 보석이 정확히 반으로 갈라졌다.

    “성공이군.”

    헬릭스가 보석 한쪽을 레아에게 건넸다.

    “우리 둘의 마나를 계약으로 묶어 두는 징표다.”

    그의 말에 그녀는 받은 보석을 들고 빛에 비춰 보았다. 다이아 같기도 하고 오팔 같기도 한 영롱한 보석이었다.

    “마나석이다. 착용자의 마나나 상태에 따라 색이 변하지.”

    헬릭스가 설명했다. 이것을 나눠서 가지고 있으면 서로의 상태도 알 수 있다고.

    “그럼 늘 가지고 있어야겠네?”

    “항상 착용하는 게 좋다.”

    레아가 보석을 손에 꼭 쥐었다. 마나석이 그녀의 마나에 반응하는 게 느껴졌다.

    신기하네.

    이런 걸 가지게 되니 마법으로 계약했다는 실감이 났다.

    “그럼 잘 부탁해. 난 레아.”

    “레아.”

    한번 중얼거린 헬릭스가 물었다.

    “공녀님이 아니라 그냥 레아인가?”

    “동등하게 계약했으면 일대일로 가는 거지, 무슨 신분제람.”

    “그거 마음에 드는 말이군.”

    헬릭스가 옅게 웃으며 말했다.

    “레아, 너도 날 헬릭스라 불러라.”

    “좋아.”

    “그럼 레아.”

    헬릭스가 말했다.

    “마법수업은 지금부터 하면 되겠나?”

    ❀ ❀ ❀

    한편 헬 산맥에서 멀고 먼, 오켄 제국의 수도인 오르켄.

    한밤중, 오르켄을 굽어보는 웅장한 황궁 안에서 두 생명체가 각각 눈을 떴다.

    황궁 중심에 자리한 화려한 방 안에서.

    황궁 깊숙한 곳에 숨겨진 버려진 궁 지하감옥 안에서.

    “……이건.”

    화려한 방에 앉은 남자가 머릿속으로 제 맹약자에게 말을 걸었다.

    [느꼈나?]

    [느꼈어.]

    남자가 침상에서 일어나 넓은 방 안을 서성였다.

    미끈한 젊은 몸과 대충 걸친 고급스러운 침의, 오켄 황실에만 나타난다는 검은 머리칼과 눈동자. 척 봐도 귀한 신분인 남자에게선 젊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위압감이 넘쳐흘렀다.

    [마나다. 마나의 흐름이야.]

    남자는 확신했다. 그의 맹약자가 놀라 되물었다.

    [마나라고?]

    [그래. 그렇지만 드래곤의 것이 아니야.]

    [……드래곤의 마나가 아니라면, 다른 마나가 있단 말이야?]

    맹약자의 음성이 놀라움으로 떨렸다.

    [좀 다르다. 얼마나 강력한지는 모르겠지만…….]

    흑안흑발의 남자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검은 눈동자가 일렁이더니 순식간에 황금색으로 변했다.

    감각이 넓게 확장되며 느껴진 신호를 기민하게 잡아채었다.

    서쪽으로, 북쪽으로.

    남자는 더 집중했다.

    [……헬 산맥이다.]

    그가 위치를 찾아내고 속으로 신음했다.

    [드래곤의 마나가 흩어진 흔적이 남아 있어. 뭔가 익숙한 태동도 느껴진다.]

    [그렇다면…….]

    [헬 산맥에서 드래곤의 봉인이 깨지고, 무언가 깨어났다는 거지.]

    본 적 없는 이변이었다. 남자가 급히 눈을 떴다.

    황금색 눈이 다시 검은색으로 돌아오기 무섭게, 그가 명령했다.

    “황실 마법학자를 불러와라.”

    ❀ ❀ ❀

    페이런 왕국의 수도.

    레아가 쓰러져 있던 사이 주치의가 보낸 편지를 받고, 피어트 공작가는 난리가 났다.

    “레아가 독이 든 쿠키를 먹고 쓰러졌다고?”

    공작은 당장 의사들 수십 명을 북부로 보내려 들었고, 공작부인은 온갖 약재를 사들이려 하면서 기름을 부었다. 가신들이 겨우 뜯어말리는 사이 장남 리케일은 사람을 풀어 범인이 누구인지 조사에 나섰다.

    그렇지만 차남 루얀은 아무 일도 못 하고 있었다.

    “범인을 찾아내면 내가 진짜 죽인다!”

    페이런 왕국 제일검 루얀 피어트.

    정말 죽이고도 남을 인간이었기에 공작가의 다른 사람들이 쉬쉬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정을 뻔히 아는 루얀은 성질이 뻗쳐서 죽을 지경이었다.

    “망할…… 피어트의 검이니 뭐니 만날 말로만 추켜세우지. 레아를 해친 사람도 못 패는데 그딴 게 무슨 소용이야?”

    동생이 당한 일을 생각하니 속이 타는데,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니.

    연무장에서 허수아비를 때려 부수고 달리고 또 달려도 화만 치솟아, 루얀은 술이라도 마시려고 술집으로 향했다.

    “후…….”

    그는 고급 술집의 넓은 소파를 혼자 독차지하고 술을 홀짝였다.

    금쪽같은 동생 레아가 집을 떠나 있는 것만으로도 속상한데, 이런 소식까지 들으니 기분이 바닥을 쳤다.

    레아가 누구인가.

    피어트 가문의 태양이셨다.

    예쁘고 장난스러워서 마냥 철없는 귀족 아가씨 같아 보이지만, 걱정하는 그들을 위해 밝아 보이려고 엄청 노력했다는 걸 가족들은 알고 있었다.

    ‘실상은 누구보다 속 깊은 아이인데.’

    저도 아파 죽겠는 주제에 방긋방긋 부모님을 위로하고, 형과 제가 엇나가려 할 때마다 ‘아이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아픈 동생 앞에서 무슨 짓이야아? 콜록콜록!’ 하고 연기를 해 대며 잡아 준 할미…… 아니, 누나 같은 동생이었다.

    그런데 그런 레아가 독을 먹다니. 루얀이 술잔을 쥔 채 미간을 구겼다.

    ‘이게 다 날파리들을 그냥 냅둬서 그래. 페이릴리니 백합이니 그런 별명이 처음 돌 때, 주둥이 놀린 놈들을 싹 다 조졌어야 했는데.’

    피어트 공작가에선 생각했다.

    공작가의 고명딸인 레아를 앞에서 건드릴 간 큰 놈은 없겠지만, 워낙 사교계에 드문드문 나가는 애니까 그런 유명한 별명이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공작가가 직접 손을 못 쓰는 영역에서 유명세가 레아의 갑옷이 되어 줄 거라고 말이다.

    그런데 페이릴리란 별명은 점점 더 유명해져서 팬클럽이 생기고 스토커가 붙더니, 이젠 레아가 좋아하는 과자에 독을 바르는 놈까지 나타났다.

    ‘가문 일이면 공작가 후계에서 먼 레아에게 독을 먹일 리 없어. 분명 스토커 놈이 저지른 짓일 거야.’

    루얀의 눈이 살기를 품고 번득 빛났다.

    ‘이 썩을 바퀴벌레 같은 놈들이 내 동생 예쁜 건 알아 가지고…….’

    그가 팔불출 생각을 해 대며 흉흉한 분위기를 뿜고 있는데, 어디선가 진한 꽃향기가 풍겨 왔다.

    ‘음?’

    백합 향기였다. 루얀은 반사적으로 향기가 난 쪽을 돌아보다 인상을 찡그렸다. 백합을 옷깃에 꽂은 귀족들이 무리 지어 서 있었다.

    ‘페이릴리 팬클럽 놈들인가?’

    술집에 있던 사람들도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누군가 무리에게 물었다.

    “백합이라니, 페이릴리 팬들의 표식입니까?”

    “무슨 그런 실례되는 말씀을.”

    백합을 꽂은 귀족 중 하나가 얼굴에 비웃음을 띠었다.

    “반대입니다. 일종의 조롱이라고나 할까요.”

    “조롱이요?”

    “페이릴리 유행에 대한 조롱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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