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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5)화 (5/120)
  • 5화

    “드래곤들이 사라져? 마법이 사멸됐다고?”

    “예? 예.”

    주치의가 되풀이했다.

    “전설에선 몇백 년 전에 드래곤이 멸종하면서 마법도 함께 사라졌다고들 합니다.”

    헬릭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자신이 몇백 년 넘게 봉인되어 있었다는 것보다 이쪽이 더 충격이었다.

    “그래서 마나가 이렇게 희미하게…….”

    중얼대며 비틀대는 헬릭스를 보며 레아가 눈을 깜박였다.

    처음 동굴에서 발견했을 때부터 드래곤이 어쩌고 하더니, 이제는 마법 얘기에 세상 끝난 사람처럼 사색이 되고 있었다.

    “아니, 몇백 년은 지난 일인데……?”

    “그래. 몇백 년…… 몇백 년이 지났단 말이지…….”

    허탈하게 웃던 헬릭스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위해 지금껏 살아 있단 말인가.”

    뭐지?

    레아는 좀 이상했지만 일단 웃었다.

    “하하, 왜 처음 듣는 것처럼 그래? 다들 아는 얘기잖아. 누가 보면 수백 년 동안 그 동굴에 갇혀 있었기라도 한 줄 알겠네.”

    “…….”

    헬릭스의 침묵에 레아는 뜨악했다.

    설마 그게 진짜?

    말이 되나?

    ‘아니, 잠깐.’

    다른 세상에서 빙의도 하는 판국인데 수백 년 동안 봉인되는 게 말 안 될 건 또 뭐람.

    그렇게 생각하니 이제껏 겪은 것들이 하나둘 척척 들어맞았다.

    정체불명의 약초사가 온천 운운하며 사기 치고 사라졌던 것.

    손을 대니까 동굴로 바로 연결되던 수상한 은색 단풍나무.

    그 동굴은 또 얼마나 보물 숨겨진 비밀공간처럼 생겼던가.

    ‘그뿐이 아니지.’

    처음 봤을 때 얼음땡 하듯 굳어 있던 것이나, 바로 자길 깨운 게 너냐고, 누가 보냈냐고 물었던 것도 그랬다.

    ‘네가 나를 깨웠느냐?’

    어딘가 고색창연한 말투나 옷차림도 설명이 됐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수백 년 동안 그 동굴에 봉인되어 있었고, 그 약초사가 날 속여서 깨우라고 보낸 거 아냐?’

    ❀ ❀ ❀

    레아는 조심스레 제가 겪은 일을 이야기했다.

    그녀에게 온천을 권유했던 정체불명의 약초사와, 손을 대자 동굴로 이동하게 했던 은색 단풍나무에 대해서도.

    듣던 주치의의 입이 떡 벌어지고, 헬릭스의 얼굴에 놀라움과 분노가 스쳤다.

    “아니, 감히 피어트 공녀님을 속여서 그런 위험에 처하게 만들다니…… 목숨이 여러 갠가 봅니다. 당장 기사들을 불러서 그자를 쫓으시지요!”

    “소용없을 것이다.”

    헬릭스가 말했다.

    “그 약초사, 신분이며 옷차림에 어울리지 않게 위엄이 느껴지지 않던가? 눈과 머리카락에 묘하게 푸른빛이 돌고.”

    “맞아! 약초사라는데 이상하게 귀티가 나더라고.”

    레아의 대답에 헬릭스의 회색 눈이 가라앉았다.

    드래곤로드 아즈라.

    오래전 그를 속이고 가둔, 레어의 주인이 분명했다. 특이한 나무도 드래곤들이 제 레어의 비밀통로에 자주 쓰는 수법이었고.

    주치의가 끼어들었다.

    “그러면 아가씨가 드셨다던 드래곤 마나도, 그자가 한 겁니까?”

    “드래곤 마나?”

    “예. 헬릭스 님이 아가씨를 간호하면서 그러셨습니다. 아가씨가 쿠키를 먹고 나서부터 드래곤 마나가 느껴진다고…….”

    헬릭스와 레아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뒤늦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주치의와 헬릭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 쿠키 먹고 쓰러졌던 건 기억나는데…… 왜 내 방에서 그쪽이 내 맥을 잡고 몸 상태를 설명하고 있어?”

    “살려 달라고 했잖나.”

    “뭐?”

    “산에서 만났다가 드래곤 마나 드신 아가씨를 치료하셨다던데요. 기억 안 나십니까?”

    레아는 놀랐다.

    “당신 치료사였어?”

    “나는 수호자다.”

    헬릭스가 말했다.

    “마나를 통제하는 수호자.”

    그게 저를 치료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단 거죠.

    흐린 눈이 된 레아를 두고 주치의가 흥분했다.

    “아가씨, 이건 대박입니다!”

    주치의는 말했다.

    세상 만물에 있는 무형의 에너지인 마나. 그 마나는 인간의 몸에도 있다고.

    “제가 만날 아가씨께 드리던 말씀 있잖습니까? 몸의 기가 약하시다고요. 그 기가…… 다른 말로 하면 마나란 말입니다!”

    레아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럼 내 기를 이 사람이 보강할 수 있다는 거네?”

    “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헬릭스가 말했다.

    “내게 있던 수호자의 능력이 거의 봉인된 듯하다. 오래 하지는 못할 것 같군.”

    ……네?

    레아가 혈압이 올라 뒷목을 잡았다.

    “공녀님!”

    “……아픈 사람 놀리니까 재밌어?”

    “놀리는 게 아니다.”

    헬릭스가 진지하게 말했다.

    “원래 능력대로라면 모를까, 지금의 미약한 능력으로 아가씨의 생명이 오가는 일을 하면 안 되지 않나.”

    그가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지금 내 능력으로도 아가씨의 마나를 보강하는 방법이 있긴 한데…….”

    “방법이 있다고?”

    레아가 채근했다.

    “빨리 말해 봐. 내 마나를 보강하는 방법이 뭔데?”

    헬릭스는 레아를 내려다봤다.

    자신을 깨운 뒤 드래곤 마나를 먹고 쓰러졌던 그녀.

    누군가 레아에게 드래곤 마나를 먹였다면, 마나를 줄 드래곤이 있다는 소리 아니겠는가.

    처음엔 드래곤로드 아즈라의 것인가 의심했지만 마나의 성질이 달랐다.

    ‘다른 드래곤이 있는 건가.’

    그의 뒤통수를 치고 배신한 드래곤들.

    멸종한 척하고 어딘가에 살아 있을 수 있는 놈들이었다.

    “……아가씨는 어쩌다 드래곤 마나를 먹게 된 건가? 알고 먹은 것 같진 않던데.”

    “뱀술도 안 먹는데 드래곤 마나를 왜 먹어?”

    레아가 질색했다.

    드래곤 마나를 뱀술과 같은 취급을 하다니. 헬릭스는 속으로 놀랐지만 티 내지 않고 차분히 물었다.

    “그럼 모르고 속아서 먹었단 말이군. 범인으로 추정되는 놈들이 있나?”

    “아직은 몰라. 하지만.”

    레아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예삿일이 아니야. 난 가문의 후계자도 아닌데, 독까지 먹이다니.”

    “지금 바이든 경이 조사하고 있을 겁니다. 하녀들과 물건을 들여오는 담당 하인 위주로요. 수상한 자도 몇 감시하고 있다고 하고요.”

    주치의의 말에 레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걸로 확실하게 잡을 순 없어. 수도의 제과점까지 조사해야 하는데, 지금 여기서 거기까지 알아보긴 쉽지 않을 거 같고.”

    “일단 공작가로 서신은 보냈습니다.”

    “잘했어.”

    공작가에서 알게 되면 정보를 잘 모으는 큰오빠 리케일이 나설 터였다.

    가만히 듣고 있던 헬릭스가 말했다.

    “들어 보니, 별장 내에 첩자가 있는 듯하다.”

    “아무래도 그런 거 같지?”

    “짐작되는 세력이 있는가?”

    헬릭스의 질문에 레아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첩자까지 보냈다면 역시…… 트로우 백작가 아닐까?”

    “트로우 백작가?”

    그녀가 설명했다.

    트로우 백작가는 상단 쪽에서 잔뼈가 굵은 가문으로, 제약업계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제약업계를 꽉 잡고 있는 피어트 공작가는 1순위 경쟁상대였고.

    정작 피어트 공작가는 레아를 치료할 약을 찾다가 제약업계를 평정해 버린 것이었지만 말이다.

    “의외로 다른 쪽일 수도 있습니다.”

    주치의가 말했다.

    “공녀님이 너무 유명해지셔서 날파리들이 꼬이지 않습니까?”

    “날파리들이라니?”

    헬릭스의 말에 주치의가 휴, 한숨을 쉬었다.

    “말도 마십시오. 만날 공녀님께 연서나 초대장 보냈다가 답장 안 왔다고, 자길 무시했다고 난리 치는 놈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런 쓰레기 같은 놈들을 보았나.”

    헬릭스의 수려한 미간이 구겨졌다.

    레아가 손을 저었다.

    “아직은 추측일 뿐이야. 진짜 범인은 이제부터 찾아내야지.”

    “그럼 드래곤 마나를 먹인 범인을 찾아내면 어쩔 셈인가?”

    “아무래도 재판에 회부해야겠지?”

    “재판이라.”

    헬릭스가 약간 당황하며 되물었다.

    “그걸로 끝인가? 피의 복수, 이마에 낙인 찍기, 추방…… 그런 건 안 하나?”

    “……그거 언제 적 얘기야?”

    “…….”

    아무래도 자신이 봉인된 사이 세상이 많이 바뀐 듯했다.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겠군.’

    헬릭스는 마음이 좀 급해졌다.

    드래곤 마나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떤 드래곤들이 남아 있는지 알아내어 복수해야 하는데.

    세상은 너무나 변했고, 자신은 수호자의 힘 대부분이 봉인된 채 약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방법이 없진 않다.’

    레아를 지그시 내려다보던 헬릭스가 입을 열었다.

    “나와 계약하지.”

    “난데없이 계약이라니?”

    “드래곤 마나가 아가씨의 몸에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마나를 다루는 법을 가르쳐 주지.”

    레아가 눈을 깜박였다.

    “마나를 다루는 법을 가르쳐 준다고? 자가치유?”

    “비슷하다.”

    “어떻게?”

    “아가씨가 마법사가 되면 된다.”

    마법사?

    레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옆에 있던 주치의는 기절할 것 같은 얼굴로 두 사람을 쳐다봤다.

    “마법사요? 우리 공녀님께서 말입니까?”

    “그렇다.”

    헬릭스는 설명했다.

    레아가 섭취한 드래곤 마나를 그가 안정시키는 과정에서, 레아는 마나를 느끼는 마법사의 자질을 가지게 되었다.

    그와 계약하면 마법을 쓰는 법까지 배울 수 있다.

    “마법을 쓰고, 내가 마나 안정을 도와주면 지금과는 비교도 못 할 만큼 육체가 건강해질 거다. 드래곤의 마나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을 정도가 되면 아픔이란 걸 모르게 될 테고.”

    아픔이란 걸 모르다니. 그녀의 가슴이 뛰었다.

    스치는 바람에도 장기를 토할 기세로 기침하는 레아에겐 꿈같은 이야기였다.

    “……드래곤의 마나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건 어느 정도 마법사여야 되는데?”

    “대마법사급은 되어야겠지.”

    헬릭스는 눈도 깜박 안 하고 쉽게 말했다. 자신과 계약하고 대마법사가 못 된 계약자는 여태껏 없었으니 걱정할 것 없다고.

    “아무리 둔재라도 나와 백 년쯤 훈련하다 보면 대마법사가 될 수밖에 없다.”

    “뭐? 훈련을 백 년?”

    아득한 단위에 레아가 멍해지다가 눈을 깜박였다.

    아니 잠깐.

    그럼 일단 백 년은 살 수 있다는 거 아냐?

    나한테 마법을 가르쳐서 건강하게 만들어 주고, 백 년 넘게 살게 해 주고, 대마법사도 되도록 해 준다고?

    너무 파격적인 조건에 레아는 오히려 얼떨떨했다.

    ‘사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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