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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4)화 (4/120)
  • 4화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르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공녀님! 어디 계십니까!”

    “피어트 공녀님!”

    이성을 잃은 그들이 별장 밖까지 뛰쳐나가려 할 때였다.

    “……혹시 찾는 게 이 아가씨인가?”

    별장 후문에 선 사람이 물었다.

    기사들과 고용인들은 너무 놀라 걸음을 멈췄다.

    ‘뭐지? 사람인가?’

    위압감이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미모의 냉미남이었다.

    그들이 멍하니 쳐다보기만 하자 헬릭스가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찾는 게 이 아가씨냐고 물었는데.”

    그의 외모에 얼이 나갔던 사람들이 그제야 뒤를 쳐다봤다.

    로브로 꽁꽁 싸인 사람이 업혀 있었다. 고급스러운 로브며, 그 아래로 빠져나온 긴 백금발이며, 어딜 봐도 레아가 분명했다.

    하녀들과 주치의는 거의 울먹이며 달려들었다.

    “아이고, 공녀님!”

    “잠들었다.”

    “다들 뭐 하세요! 얼른 공녀님을 받지 않고서!”

    하녀장의 호통에 어어 하고 있던 기사들이 달려왔다. 레아를 업고 온 헬릭스가 그녀를 건네주며 말했다.

    “뭔가 수상한 걸 먹은 듯했다.”

    그러고는 챙겨 온 쿠키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이걸 먹다가 쓰러졌는데.”

    “이건!”

    주치의와 몇몇 하녀들은 주머니를 알아보았다. 레아가 가장 좋아하는 제과점 쿠키였다.

    주치의는 순간 등골이 싸해졌다.

    ‘아가씨가 제일 좋아하는 쿠키를 먹고 쓰러지셨다고?’

    쿠키에 누가 독을 써서 레아가 쓰러진 거라면, 범인은 레아를 잘 아는 데다 의심받지 않고 쿠키를 가져다줄 수 있는 사람일 터였다.

    ‘그러면…… 공작가 안에 범인이나 협조자가 있다는 거 아냐?’

    오싹.

    주치의는 마른침을 삼켰다. 공녀님의 약한 몸 하나 살리기도 버거운데, 누가 독까지 쓰고, 내부에 협조자가 있다니.

    이건 위기였다. 상상 속에서 십이 년간 차곡차곡 벽돌을 올린 의원 건물이 날아갈 대위기.

    주치의가 조심스레 헬릭스에게 물었다.

    “당신 말이 맞다면, 어떻게…… 아가씨가 무사하십니까?”

    “내가 치료했다.”

    담백하고 당당한 어투였다.

    주치의는 헬릭스의 여상한 태도에 충격을 받았다. 독에 당한 공녀를 치료한 일을, 마치 팔에 난 종기를 짜 버린 숙련된 의사처럼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치료가…… 되던가요?”

    “음. 내가 아니었으면 목숨이 위험했을 거다. 원체 맥이 약하더군.”

    주치의의 턱이 더 벌어졌다.

    “맥이 약한 것도 알아보셨다고요? 그런데도 독을 해결하셨고요?”

    “어떻게 몰라보겠는가? 살아 있는 게 용할 정도로 약하던데.”

    헬릭스는 레아가 섭취한 수상한 성분은 그녀의 약한 맥을 날뛰게 할 수 있으니, 주의해서 회복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일급 치료사나 의사만이 보여 줄 수 있는 확신 어린 조언이었다.

    “의사십니까?”

    “아니다.”

    “그럼 치료사?”

    “본 직업은 아니나 그쪽으론 제법 재주가 있는 편이다. 마나는 모든 것에 존재하니.”

    마나.

    드래곤이 멸종하기 전 마법의 시대에는 세계에 널리 존재했다던 무형의 에너지.

    드래곤과 마법사들, 소드마스터들은 세계에 가득한 마나를 변환시켜 제 힘으로 다룰 수 있는 특별한 이들이었다. 드래곤이 멸종하고 마법도 소드마스터도 사라진 지금 시대에는 옛 전설처럼 치부될 뿐이었지만.

    때문에 모여 있던 피어트 공작가 고용인들은 멈칫했다. 그들이 작게 수군댔다.

    “무슨 소리지?”

    “마나가 뭐가 어쩌고 했지? 좀 회까닥한 사람 아니야?”

    주치의만이 제대로 알아듣고 침을 꿀꺽 삼켰다.

    ‘마나? 방금 마나라고 했어?’

    그는 숨겨진 마법덕후였던 것이다.

    원래 의사나 치료사 중에는 마나나 마법을 믿는 이들이 많았다.

    헬릭스를 보는 주치의의 눈빛이 열렬하게 변했다. 같은 마법덕후에다가 실력 있는 치료사인 것 같았다.

    ‘어쩌면 공녀님을 지켜 주러 나타난 운명의 귀인일지도 몰라!’

    어차피 이대로라면 공녀님의 목숨은 바람 앞의 촛불이었다. 주치의가 동아줄을 잡는 심정으로 급히 외쳤다.

    “뭐 하시오? 얼른 은인을 안으로 모시지 않고?”

    “어?”

    “다들 알지 않소? 공녀님께서 얼마나 상벌에 확실하신지. 깨시면 은인을 그냥 보냈다고 노하실 것입니다.”

    “그, 그건 그렇지요.”

    주치의의 말에 동의한 이들이 헬릭스를 붙잡았다.

    “저희 공녀님을 구해 주신 은인이십니다. 이 은혜를 갚을 기회를 주시지요.”

    “맞습니다. 공녀님께서 깨어나시면 분명 보답을 하실 것입니다.”

    헬릭스는 잠시 고민했다.

    레아가 쓰러진 뒤 갑자기 그녀의 입가, 숨결, 혈관에서 느껴지던 이질적인 힘.

    그건 분명 드래곤의 마나였다.

    그리고 레아가 쓰러진 뒤 보인 증상도 오래전에 봤던, 드래곤의 마나를 받은 환자들과 똑같았다.

    ‘누가 드래곤의 마나를 먹으라고 준 듯한데…….’

    그런데 그녀는 드래곤이 멸종했다고 말했고, 마법과 마법의 탑도 옛날이야기처럼 취급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야겠군.’

    헬릭스는 근처에서 지켜보며 상황을 파악하기로 마음먹었다.

    “알겠다. 머물도록 하지.”

    주치의의 얼굴이 환해졌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 ❀ ❀

    레아는 뿌연 어둠 속에 혼자 서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꿈인가?

    불길한 잿빛 어둠이 그녀를 빈틈없이 감싸고 있었다. 레아는 팔을 문지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긴장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 어둠 너머에 뭐가 있는 거 같아.’

    아무래도 지금 꿈인 거 같은데, 그냥 튈까?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꿈이면 해결 안 된 느낌이 더 끈질기게 쫓아올 터였다.

    ‘그러고 나면 꼭 앓더라.’

    그러니까 이대로 무서워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휴. 이놈의 약체 팔자야.’

    레아는 한숨을 내쉰 뒤 전투적으로 두 손을 불끈 쥐었다.

    ‘한 대 때려 보고 안 되겠으면 튀어야지.’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손에 척 하고 무기가 생겨났다.

    거대한 포크였다.

    ‘이건……!’

    레아는 대형 포크를 삼지창처럼 꼬아 잡았다.

    어릴 때 힘이 모자라 케이크 위의 딸기를 번번이 떨어트리다 성질나서 울자, 공작가 가족들이 특별 주문해 줬던 가볍고 예쁜 포크. 그 포크와 디자인이 똑같았다.

    그런 포크를 쥐자 용기가 솟았다. 그녀가 씩씩하게 대형 포크를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덤벼 진짜. 딱 한 대만 맞자.”

    그 말을 신호로 어둠이 걷히며 기운이 밀려왔다.

    솨아아아아.

    파도처럼 죽 밀려오며 높이 솟아오르는…….

    “……몽블랑?”

    거대한 밤크림의 산!

    레아가 입을 딱 벌렸다.

    몽블랑 케이크 먹을 때마다 이 크림에 파묻히고 싶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문자 그대로의 뜻은 아니었는데!

    꾸르르르.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밤크림 산이 그녀를 향해 무너져 내렸다.

    몽블랑 산사태.

    아니, 밤크림 산사태였다.

    레아는 입을 뻐끔거리며 깨달았다.

    기억났다.

    독이 들어 있던 그 쿠키도 밤크림이 들어간 쿠키였다.

    ‘그 쿠키를 누가 사 왔었지?’

    남자가 먹은 쿠키는 괜찮았는데, 자신은 그 쿠키를 한입 먹은 뒤 쓰러졌었다.

    ‘누구였지?’

    누가 가져왔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그 쿠키 속에 있던 독이 자신의 내장을 할퀴던 아픔만 떠오를 뿐.

    ‘그러고 보니 저 기운, 그 독 느낌하고 비슷해.’

    이제야 저 몽블랑 산사태를 일으킨 어둡고 난폭한 기운이 무엇일지 짐작이 갔다.

    그녀가 먹은 독이리라.

    레아는 분노했다.

    “네놈이 내 몽블랑을 모욕한 놈이구나.”

    독 때문에 당분간 가장 좋아하는 디저트를 못 먹게 생겼다.

    그 모양과 냄새를 접할 때마다 쓰러지던 기억이 떠오를 테니까.

    “그래 놓고도 모자라서 나를 노려?”

    화가 치솟았다.

    사방에서 ‘페이릴리!’ ‘페이런의 백합!’ 하고 부르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저 소리에 시달릴 때마다, 몽블랑의 밤 퓨레 섞인 머랭 크림이 얼마나 자신을 위로해 줬었나.

    세상 시름을 잊게 하는 강렬한 첫 단맛.

    입안도 마음도 폭신하게 채우며 사라지는 부드러움.

    “독 이놈…….”

    저 사랑스러운 디저트 속에 숨어서, 레아의 육신과 건강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녀가 화를 낼수록 거대한 포크도 붉게 달아올랐다.

    “가만 놔둘 수 없지.”

    레아가 달아오른 포크를 양손으로 쥐었다.

    “네까짓 것 물리치고, 오래오래 살 거야!”

    포크 끝에서 불꽃이 튀어 나가며 밤크림의 산이…….

    [아가……!]

    구워지며…….

    [아가씨……!]

    머랭 부스러기가 눈꽃처럼 흩날리…….

    “이 아가씨야!”

    응?

    레아는 잠시 현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멍해 있었다.

    “쯔쯔…….”

    은발의 남자가 측은하단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잠꼬대도 오래오래 살 거라고 하는 것인가.”

    “…….”

    깜박깜박.

    잠에서 막 깬 레아는 헬릭스를 봤다가, 그에게 붙들린 오른손을 쳐다봤다.

    “……내가 잠꼬대했어?”

    “그렇다. ‘네까짓 것 물리치고, 오래오래 살 거야!’라고 하면서 나한테 주먹을 휘둘렀다.”

    “쿨럭.”

    레아는 아픈 척하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꿈 때문에 그런 거야, 꿈 때문에.”

    “주먹에 감정이 실려 있었다.”

    “그쪽한테 한 게 아니라 꿈에 이상한 게 나왔다니까. 날 파묻으려고 했어.”

    크림에.

    레아는 뒷말은 조용히 삼켰다.

    그렇지만 헬릭스는 레아의 말에 심각해졌다.

    “어떻게 살아 있나 싶을 정도로 심각한 약체더니…… 정신도 약한 것인가.”

    “어째 듣다 보니까, 몸이 골골하다 보니 머리도 아파졌냐는 말로 들리는데…… 내 착각이겠지?”

    그는 레아의 말을 무시하고 맥을 짚어 보았다.

    “음?”

    “왜?”

    “……익숙한 기운이 점점 강하게 느껴진다.”

    그 말에 레아도 제 가슴이며 배에 손을 대 보았다.

    그러고 보니 몸이 좀 이상하긴 했다.

    “배와 가슴에서 뜨거운 기운이 일렁일렁하는 거 같아.”

    “꼭 마법사들이 마나 맥 열리고 코어 만드는 증상과 비슷하군.”

    “마법사? 마나 맥? 코어?”

    피어트 공녀로 살아온 지 십이 년이지만 처음 듣는 얘기였다.

    헬릭스는 간단히 설명했다.

    마법사들은 마나를 느끼고, 신체에 마나가 흐르는 길을 만든 뒤, 심장이나 단전 부위에 마나를 펌프질하고 회전시키는 마나의 심장을 만든다고 했다.

    그걸 마나 코어라고 부른다나.

    약을 가지고 들어오던 주치의가 끼어들었다.

    “저도 듣긴 했지만 전설일 뿐입니다. 드래곤들이 사라지면서 마법도 거의 사멸됐으니까요.”

    “뭐?”

    헬릭스가 충격받은 목소리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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