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3)화 (3/120)
  • 3화

    하필 이런 때에.

    그는 전전긍긍 고민하며 입술을 뜯었다.

    큰마음 먹고 레아에게 사랑의 묘약을 썼는데, 목표물이 수도에서 빠져나간 것이다.

    ‘요양만 안 갔어도 이번에 낚아챌 수 있었는데!’

    계획은 완벽했다.

    제 호감을 사려는 귀족과 밤놀이를 갔다가, 그자의 안주머니에서 발견한 약병. 남작은 그 약이 사랑의 묘약이나 최음제일 거라 여겼다.

    그는 몰래 약병을 훔치면서 계획을 짰다.

    페이릴리를 쫓아다니면서 알아낸,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제과점의 쿠키를 사다가 딱 한 개에만 사랑의 묘약을 발랐다.

    ‘페이릴리는 이 쿠키를 두 봉지도 먹는다고 했으니까…… 들키지 않게 조금만 넣어야지.’

    다른 쿠키들 속에 있으면 모를 테니까.

    그리고 돈을 써서 매수한 공작가의 하녀에게 시켰다. 매년 참석하는 왕실 무도회 직전에 이 쿠키를 공녀의 방에 가져다 두라고.

    그러면 레아는 무도회 준비에 바쁜 사이에 모르고 집어 먹을 테고, 몸이 이상한 걸 느낄 때쯤이면 무도회가 한창이리라.

    ‘그때 테라스로 끌어내서 일을 치르려고 했는데……. 끝난 뒤엔 페이릴리도, 피어트 공작가도 어쩌겠어?’

    으흐흐.

    음흉한 웃음을 흘리던 더포드 남작이 눈을 굴렸다.

    갑자기 페이릴리가 요양을 가는 바람에 계획은 실패했고, 쿠키도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페이릴리가 혹시 약 묻은 쿠키를 먹었으면 어쩌나? 사랑의 묘약을 먹고 다른 남자를 만나기라도 하면…….’

    남작은 불안해졌다.

    ‘그거 먹고 요양지에서 어느 놈팽이랑 붙어먹고 있으면 어떡하지?’

    ❀ ❀ ❀

    남작이 쿠키에 수작을 부린 줄 알았다면, 레아는 절대 입에도 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배신한 하녀가 챙긴 쿠키는 이미 그녀의 입속으로 사라지고, 약병 속의 액체는 레아의 약한 몸을 순식간에 점령했다.

    그녀는 헬릭스의 팔을 꽉 잡으며 헐떡였다.

    “살려 줘…….”

    레아의 절박한 음성에 헬릭스가 품에 안긴 그녀를 내려다봤다.

    “산 아래, 별장…… 거기로 나 좀…….”

    부들부들 떨면서도 말을 잇던 레아의 고개가 꺾였다. 까무룩 기절한 것이다.

    “아가씨.”

    확인차 불러 봤지만 대답은 없었다.

    헬릭스는 그녀가 떨어트린 쿠키 주머니를 노려봤다. 자신이 먹었을 땐 아무 일도 없었는데, 왜 레아가 먹자마자 이런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

    그리고 이 쿠키를 먹고 쓰러진 레아에게서 왜 익숙한 느낌이 난단 말인가.

    ‘내 추측이 맞다면, 이 아가씨의 목숨이 위험하다.’

    인간에겐 극독이나 마찬가지인 물질이었다.

    헬릭스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맥을 짚었다.

    “…….”

    움직임이라곤 개미 눈곱만큼 느껴지는 맥이었다.

    “……살아 있는 게 맞긴 한 건가?”

    헬릭스가 제 품 안에서 의식을 잃은 레아를 새삼스레 쳐다봤다. 핏기라곤 없는 흰 얼굴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내 평생, 이런 몸으로도 살아 있는 사람은 아가씨가 처음이다.”

    그의 긴 수호자 인생에서도 처음 보는 최약체였다.

    게다가 방금 그 부탁.

    ‘살려 줘…….’

    꿈틀.

    레아를 안은 팔근육에 힘이 들어갔다.

    헬릭스는 약자가 도움을 청하는 말에 약했다.

    수호자는 공정하게 세계의 질서를 지키고 약자를 보호해야 했으니까.

    “아가씨, 안심해라.”

    그의 회색 눈이 오랜만에 느낀 사명의식으로 번득였다.

    “내가 널 살리고야 말겠다.”

    ❀ ❀ ❀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레아는 억울했다.

    ‘이번 생에선 진짜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잘살아 보려고 했는데.’

    그녀는 이번 생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 삶에선 한국에서 평범하게 장녀 노릇과 과로를 강요받으며 살았다. 그러다 허무하게 사고로 죽었다.

    그게 어처구니없고 억울해서, 사고로 죽는 순간에도 빡쳐 했었던 것 같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사는 동안 더 내 멋대로 살걸!’

    그런데 서양 신분제 배경의 세계에서 공작가 귀족 영애 몸으로 깨어난 것이다.

    처음에는 이거 혹시 로판에서 보던 책 빙의인가 의심해 봤지만, 과로하는 날 새벽마다 읽어 댄 로판이 워낙 많아서 그중 뭐였는지, 책 빙의가 맞긴 한지도 헷갈렸다.

    미래를 아는 빙의자 버프는 포기해야 하나.

    그 점은 울적했지만 그녀는 곧 빠르게 적응했다.

    어쨌거나 그녀가 빙의한 몸은 일곱 살의 레아 피어트 공녀.

    어리고, 학대당하거나 출생의 비밀도 없고, 외모도 요정 그 자체인 데다가 왕국에 셋뿐인 공작 가문의 사랑받는 외동딸이었으니까.

    ‘세상에. 이보다 완벽할 순 없어. 이거 무슨 복이지? 나 지난 생에 나라 안 구했는데?’

    그녀는 다짐했다.

    이런 복을 잡은 이상 놓지 않겠다고. 이번 생에선 가문을 등에 업고 꿀을 빨며 여유로운 인생을 즐겨 주겠다고. 내 멋대로 하고 살겠다고.

    ‘놀고 쉬고 맛있는 것 먹고! 금수저 가득 캐비어 떠먹으면서 살 거야!’

    그렇지만 행복한 야망은 사흘도 안 되어 박살 났다.

    고열.

    식욕 부진.

    원인 모를 통증.

    괜히 원래 레아가 일곱 살에 의식을 놓고 떠나간 게 아니었다.

    ‘뗀쟝……!’

    금수저인 줄 알았더니 독 묻은 수저였다니!

    아프고 사기당한 기분에 그녀는 세상을 원망하며 욕했다.

    ‘떼엔쟝……!’

    어린 딸이 사경을 헤매다 욕까지 하자, 공작 부부는 얼굴이 새파래져서 의사들을 불러 댔다.

    의사들은 눈치를 보며 머뭇거렸다.

    ‘공녀님께서 워낙 약하게 타고나셔서…….’

    ‘기와 맥 자체가 보통 사람에 비해 너무 약하십니다.’

    꼬장꼬장하게 생긴 의사 하나만이 용감하게 쐐기를 박았다.

    ‘공녀님의 신진대사는 일곱 살의 것이 아닙니다. 일흔 살 수준입니다!’

    일곱 살, 신체 나이 일흔 살 판정 실화냐.

    깜깜한 현실에 어이가 없었다.

    지난 생도 젊은 나이에 마감했는데, 두 번째 생에서 금수저 물고 꿀 좀 빨려 했더니 약체도 이런 약체가 없단다.

    공작부인은 이미 딸을 잃은 듯 통곡했다.

    ‘우리 레아, 이 어린것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공작도 눈시울이 붉어져 침통한 얼굴로 물었다.

    ‘레아, 우리 딸…… 뭐 하고 싶은 것은 없니?’

    아니, 잠깐.

    분위기에 휩쓸리던 그녀가 정신을 차렸다.

    ……이분들이 벌써 사람을 관에 넣으려고 하시네?

    ‘엄마. 아빠.’

    부르자 공작 부부는 둘 다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이런 부모의 관심을 처음 받아 봐서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역시 저는 이렇게 죽을 수 없어요.’

    그녀의 말에 공작이 한 대 맞은 얼굴을 했다.

    ‘돈과 노오력이면! 건강은 못 사도 목숨은 살 수 있지 않겠어요?’

    공작 부부가 휘둥그레져서 쳐다보자 그녀는 애써 표정 관리를 했다.

    나도 알아. 일곱 살 여자아이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지. 그치만 지금 이 판국에 이거저거 다 따지게 생겼어?

    ‘의사들은 어디에 특별히 병이 있는 게 아니라 전체적으로 약한 것이라 했어요. 그렇다면 노오력을 더 해 봐야죠! 몸에 좋은 약재도 많이 쓰고!’

    꼬장꼬장한 의사가 끼어들었다.

    ‘공녀님의 몸으론 약재의 기를 감당하지 못하실 겁니다.’

    ‘하지만 약한 건 병이 아니잖아요! 관리를 잘하면 오래 살 수 있다고요!’

    ‘맞는 말씀입니다.’

    ‘그, 그렇다면?’

    희망을 품는 공작에게 의사가 말했다.

    ‘오 년 사실 것을 십 년까진 늘릴 수 있겠지요.’

    ‘아이고, 레아야!’

    공작부인이 또다시 오열했다.

    레아는 양 주먹을 불끈 쥐다가 자신의 작은 손을 내려다봤다.

    다정한 공작 부부와 호화로운 방도 둘러보았다.

    전생의 모습들이 생각났다.

    젊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던 거친 손.

    저에게 관심도 없으면서 희생을 요구하던 부모.

    도망치듯 구했지만 바퀴벌레가 수시로 출몰하던 어두운 원룸.

    ‘…….’

    역시 이대로 죽을 순 없었다.

    지난 생도 천수를 다 못 누렸고, 다음 생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사랑받으면서 부자로 살아 볼 기회가 또 있을까?

    ‘난 오래오래 살 거예요.’

    ‘의지만은 정말 훌륭하십니다만…….’

    오기가 생긴 레아가 의사의 말을 잘랐다.

    ‘이십 년 이상 살면 어쩔래요?’

    ‘그러실 리가 없습니다만…….’

    레아가 홱 공작을 돌아보았다.

    ‘아빠!’

    ‘응?’

    그녀의 기세에 공작이 저도 모르게 주춤거렸다.

    ‘이 의사를 제 주치의로 붙여 주세요!’

    ‘정말이냐?’

    ‘예? 저를 말입니까?’

    공작도, 지목당한 의사도 놀랐다.

    그렇지만 레아의 선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녀의 혼은 한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들어온 따끈따끈한 빙의자.

    그 기억이 말하고 있었다.

    돈으로 다 되는 건 아니지만 많은 게 된다고.

    돈으로 건강은 살 수 없지만 생명연장은 살 수 있다고!

    레아가 질렀다.

    ‘만약 제가 스무 살이 넘으면…… 이 의사에게 의원을 차려 주세요.’

    그녀가 쐐기를 박았다.

    ‘수도 최고로!’

    의사가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 ❀

    그리고 십이 년이 흐르고 올해.

    레아 피어트 열아홉 살.

    주치의는 자본의 노예가 되어 열심히 일했다.

    공작가의 돈도 아낌없이 레아의 수명연장에 투입됐다.

    피땀눈물돈돈돈으로 살린 목숨!

    그렇지만 그렇게 열심히들 최선을 다했는데도 레아는 여전히 약하디약했다.

    ‘이대로라면 수도 금싸라기 땅의 최고급 의원은 날아가고 만다.’

    마음이 급해진 주치의는 공작가와 레아를 설득해 요양을 왔다.

    그런데 그런 레아가 요양 첫날 사라진 것이다.

    “공녀님이 안 계세요!”

    하녀가 외친 말에 별장이 뒤집혔다.

    “공녀님이?”

    경호와 보안을 책임지는 바이든 경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구석구석 모두 찾아보았나?”

    “아무 데도 안 계십니다!”

    “몸도 약하신 분이 어디 가신 거지? 멀리 나다니지도 못하실 텐데!”

    동동거리는 고용인들 사이에서 기사 하나가 심각하게 말했다.

    “……공녀님이 스스로 나가신 게 맞을까요?”

    “스스로 나가신 게 아니면?”

    “사냥꾼들이 그러는데, 이 근방에서 가끔 들리는 이상한 소리가 몬스터 울음소리라 합니다!”

    “뭐라고?”

    주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넓은 별장을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부산한 상황을 이용해, 날랜 몬스터가 레아를 집어 채 간 것이라면…….

    피투성이가 된 공녀를 상상하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안 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