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2)화 (2/120)
  • 2화

    “거짓말하지 마라.”

    레아는 어이가 없었다.

    “아니, 내가 왜 처음 본 댁한테 거짓말부터 하겠어?”

    “안 하리란 법도 없지 않은가.”

    “이분 보게?”

    잡힌 팔을 뿌리친 레아가 팔짱을 끼고 그를 쳐다보았다.

    “보자 보자 하니까 사람을 거짓말쟁이로 몰고 있네. 못 믿겠으면 나가서 다른 사람 붙들고 물어보면 될 거 아냐?”

    “네가 날 깨웠잖나.”

    말이 안 통하네.

    레아가 머리를 쓸어 올렸다.

    “됐고. 여기서 어떻게 나가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내가 알아서 나갈게. 댁은 거기서 계속 드래곤이나 찾고 계셔.”

    레아가 홱 돌아서서 발을 디뎠다.

    비틀.

    힘주어 내디딘 걸음에 삔 발목이 바로 꺾였다.

    “으악!”

    푸슉!

    균형을 잃는 것과 동시에 바닥이 푹 꺼지며, 무언가 날아왔다.

    “위험하다!”

    남자가 몸을 날려 그녀를 끌어당겼다.

    엉겁결에 단단한 가슴팍에 안긴 레아가 눈을 크게 떴다.

    남자의 긴 은발이 그녀의 눈앞에서 길게 펼쳐졌다 가라앉으며, 그의 핏줄 선 오른팔이 눈에 들어왔다.

    “화, 화살……?”

    “함정이다.”

    손에 잡힌 화살을 꽉 잡으며, 남자가 담담하게 말했다.

    엄마야! 지금 날아오는 화살을 손으로 잡은 거지?

    레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의, 의심하면서 왜 구해 줬어?”

    그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사람이 죽게 놔둘 순 없지 않은가.”

    레아는 눈을 깜박였다. 너무 놀라 생각이 바로 말로 튀어 나갔다.

    “헐. 멀쩡하게 생겨서 속이 꼬인 분인 줄 알았는데…….”

    남자의 냉기 흐르던 표정에 금이 갔다.

    “속이 꼬인 분……?”

    ❀ ❀ ❀

    남자는 어이가 없었다.

    마나의 수호자로서, 공정과 도덕의 화신으로 불려 왔던 그에게 속이 꼬인 분이라니.

    ‘봉인에서 깨자마자 헛소리를 듣게 되는군.’

    남자가 딱딱하게 말했다.

    “수호자에게 그렇게 말하는 건 처음 듣는다.”

    “수호자?”

    레아가 갸웃하며 되물었다.

    “수호자가 뭔데?”

    “수호자를 모르나?!”

    “몰라. 처음 듣는데?”

    그는 충격받은 얼굴로 레아를 쳐다보았다.

    “무슨…… 그럴 리 있는가. 분명 나에 대해서 들었을 텐데? 여자…… 아니, 흠.”

    당황해서 말이 막 나가던 그가 잠시 멈추고 단어를 골랐다.

    “크흠. 아가씨는, 역사와 예법을 배운 사람처럼 보이는데?”

    “그걸 배운 건 맞지만, 수호자란 건 처음 들었어.”

    남자의 동공이 지진 난 듯 흔들렸다.

    “수호자를 모르면, 마법의 탑은 아나?”

    “마법의 탑? 이야기에 나오는, 마법사들의 최종 거점 같은 곳?”

    도대체 이 여자가 아는 건 뭔가.

    그는 이제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상하군.’

    드래곤의 레어인 이곳에 들어온 걸 보니 평범한 사람은 아닐 텐데.

    수호자도, 마법의 탑도, 드래곤도 하나도 모르고 있었다.

    ‘하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는 건 나도 마찬가지인가.’

    그가 쓰게 생각했다.

    드래곤들에게 뒤통수를 맞고 여기 봉인되었다는 것까진 어렴풋이 기억났다.

    그런데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희미했다. 드래곤들이 자신의 기억에 무슨 짓을 한 게 틀림없었다.

    남자는 레아를 찬찬히 살피며 입을 열었다.

    “……네 말대로 아무것도 모른다면, 어쩌다 여기 왔나?”

    그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누가 보냈는가?”

    “응?”

    “바깥에 전쟁이라도 일어났나?”

    “으응?”

    그때였다.

    꼬르르르륵.

    엄청나게 큰 소리가 울렸다.

    “…….”

    “…….”

    레아가 머쓱해하며 남자의 배를 가리켰다.

    “저기, 전쟁은 거기서 일어난 거 같은데?”

    ❀ ❀ ❀

    꼬르르륵.

    제 배 속에서 들린 소리에 헬릭스는 혼란에 빠졌다.

    그는 수호자가 된 후 배고픔과 추위 등을 느낀 적이 없었다. 마나가 그의 육체를 인간 이상의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배가 고프다니.’

    패닉에 빠진 그를 레아가 안쓰러운 얼굴로 쳐다봤다.

    “어쩌다 이런 데서 쫄쫄 굶고 있었어?”

    “……그런 거 아니다.”

    “기다려 봐.”

    레아가 옷을 뒤지더니 간식주머니를 꺼냈다.

    “이거 내가 좋아하는 제과점 시그니처 쿠키인데…….”

    그녀가 잠시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요양 오기 전에 수도에서 이걸 사 왔던가?

    ‘짐 싸느라 정신없어서 못 들렀던 거 같은데. 하녀들이 챙겼나?’

    레아가 헬릭스에게 주머니를 건넸다.

    “이게 뭔가?

    “먹으라고.”

    “나에게 주는 건가?”

    “배고프잖아.”

    헬릭스는 무표정하게 조그만 간식주머니를 내려다봤다. 표정을 어떻게 지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

    긴 잠과 같은 봉인 동안 헬릭스는 가끔 생각했다.

    봉인이 풀렸을 때 눈앞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세상은 자신을 어떻게 맞이할까.

    ‘……봉인되기 전과 별다를 게 없겠지.’

    누가 깨우든 자신의 힘을 노리고 이용하려는 놈들일 거라 여겼는데, 눈앞의 여자는 자꾸 예상 밖으로 굴었다.

    자신을 이용할 생각은커녕 제 정체도 모르는 눈치인데, 막말을 하고, 화를 내고, 짠하게 쳐다보면서 스스럼없이 대했던 것이다.

    지금 레아가 내미는 작은 간식주머니도 뭔가 뇌물치고는…….

    ‘하찮군.’

    정말 이곳도, 자신에 대해서도 모르고 온 건가.

    뚫어져라 간식주머니를 보는 그에게 레아가 말했다.

    “열어 봐.”

    부스럭.

    헬릭스의 눈이 크게 뜨였다.

    고소하고 달콤한 향기가 코에 확 감겨들었다.

    “그거 맛있어.”

    레아의 말에 그가 긴 손가락을 뻗어 조심조심 쿠키를 집어 들었다.

    와삭.

    그가 눈을 감았다. 레아의 말대로였다.

    ‘이렇게 맛있을 수가.’

    황홀할 지경이었다.

    드래곤이 자신을 봉인할 때 힘도 같이 봉인한 줄은 알았지만, 힘이 없으니 감각이 더 날카로워질 줄은 몰랐다.

    ‘……아니면 그사이 제과 기술이 발전한 것인가?’

    와사삭.

    ‘얼마 동안 갇혀 있었던 건가?’

    와삭와삭.

    레아가 혀를 찼다.

    “좀 천천히 먹어.”

    “……놀랍군.”

    헬릭스가 감탄했다.

    “쿠키란 게 원래 이렇게 맛있는 거였나?”

    레아가 가슴을 폈다.

    “내가 맛있다고 하는 건 다 맛있어. 먹을 거에 관해선 늘 진심이거든.”

    “……정말 진심이 느껴지는군.”

    “그렇다니까. 진짜 좋아하는 제과점 대표메뉴야.”

    “그럼 너도 먹어라.”

    그가 쿠키 주머니를 조심스레 레아 쪽으로 내밀었다.

    그녀가 픽 웃었다.

    “그 체격에 쿠키 한 봉지로 성에 차겠어? 그냥 다 먹어.”

    “아니다. 진짜 좋아하는 거라면 맛이라도 봐야 할 게 아닌가.”

    레아가 새삼스레 그를 쳐다봤다.

    배에서 그 소리가 나면서 맛있는 걸 양보하다니?

    ‘……진짜 생각보다 좋은 사람인가?’

    다짜고짜 반말하며 몰아가기에 무례한 놈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배려심이 있고 세심한 데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쿠키를 집어 들었다.

    “그럼 맛만 하나 볼게.”

    와삭. 크게 베어 물자 온 얼굴에 행복감이 번졌다.

    “역시 언제 먹어도 맛있……!”

    말을 미처 잇지 못하고 레아가 쿠키 주머니를 떨어트렸다.

    철퍽.

    손끝이 얼어붙었다.

    감각이 사라졌다.

    몸이 소름 끼치게 춥고 차가운데 눈과 입술과 배 속은 불타는 것 같았다.

    눈앞이 새카맣게 변했다.

    “아가씨?”

    방금까지 쿠키를 물고 웃던 그녀가 그대로 쓰러지자, 놀란 헬릭스가 레아를 받쳐 안았다.

    품에 있는 그녀는 너무도 가벼웠다. 그가 미간을 좁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느껴지지 않던 기운이 레아에게서 발작적으로 흘러나왔다. 그에게 너무도 익숙한 기운이었다.

    “이건……!”

    ❀ ❀ ❀

    한편 페이런 왕국의 수도.

    번화한 거리 한복판, 중앙광장엔 계절에 안 맞게 백합 향기가 넘쳐흘렀다.

    페이릴리 팬클럽이 요양 간 그녀의 귀환을 기원하며 한 송이 두 송이 갖다 놓은 백합들이 거리를 메우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 페이릴리가 뭐라고 저렇게까지 난리래요?”

    “이러다 페이런의 백합이 왕자님보다 더 인기 있게 되는 거 아닙니까?”

    전대미문의 사태에 시민들은 고개를 젓고, 사교계 호사가들은 입방아를 찧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극성팬들은 백합을 쥐고 목놓아 외쳤다.

    “얼른 돌아와 줘요, 페이릴리!”

    “너무 건강해지진 말아요! 당신의 병약미를 잃을 순 없다고!”

    레아가 들었으면 ‘썩 꺼져, 이 미친놈들아! 니들 보기 좋으라고 나더러 앓다 죽으란 말이냐!’라고 열불을 삼켰을 테지만, 인기에는 날파리가 꾀는 법.

    게다가 그녀의 혈압을 높일 놈들은 극성맞은 팬클럽만이 아니었다.

    “페이릴리…….”

    제 저택 테라스에서 중앙광장의 백합들을 바라보며 불안하게 중얼대는 한 남자.

    랜달 더포드 남작.

    페이릴리 팬클럽의 극성팬들이 날파리라면, 더포드 남작은 왕파리였다.

    그는 왕의 숙부 칼로시 대공의 사생아로, 정식으로 왕족이라 인정받진 못했지만 나름 준왕족 대우를 받고 있었다.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칼로시 대공이 아끼는 아들이었으니까.

    유명한 여배우였던 어머니를 닮아 젊을 땐 꽤나 미남자였고, 수도 가까운 곳에 영지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레아에게 더포드 남작에 대해 묻는다면 돌아올 대답은 하나였다.

    ‘지긋지긋한 스토커 새끼.’

    그는 달라붙는 스토커들 중 제일 끈질기고, 시간도 많고, 돈도 있는 작자였다. 레아를 쫓아다니려고 사채까지 써서 아예 피어트 공작가 근처에 저택을 산 미친놈이었다.

    그러고는 레아가 참석하는 파티며 모임마다 나타나서 모기처럼 주위를 돌며 앵앵댔다.

    ‘역시 저만한 남자가 결혼을 하려면 좋은 가문의 어리고 참한 아가씨가 맞지 않겠습니까, 피어트 영애? 올해 나이가 열아홉…… 딱 제 반이군요! 딱 맞겠습니다!’

    ‘제가 혼인을 잘해야 왕실의 격이 올라갈 텐데…… 이를테면 백합과 같은 청초한 여성분과 말입니다. 물론 청초한 분들은 몸매가 좀 부족하긴 한데, 풍만한 몸매야 안주인에게 중요한 덕목이 아니죠. 정부도 아니고 말입니다! 하하핫!’

    레아가 ‘미친 건가.’ 하는 시선으로 싸늘하게 쳐다보며 상대도 안 해도, 그의 열정적인 스토킹은 멈출 줄을 몰랐다.

    남작은 반드시 페이릴리를 손에 넣고 말 셈이었다.

    제 옆에 선 물 먹은 백합 같은 그녀를 보면 다른 남자들이 얼마나 부러워할 것인가. 수도의 귀족들은 모두 배가 아파 속 쓰려 하겠지. 생각만 해도 뿌듯했다.

    게다가 가문, 미모, 나이, 흠잡을 데 없는 페이릴리를 짝으로 세우면 왕실에서도 저를 무시하지 못할 거고, 아버지는 대놓고 정실 자식들보다 네가 더 낫다며 추켜세워 줄 게 분명했다.

    ‘그런데 페이릴리가 북부로 요양을 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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