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드래곤의 성녀여.
마법의 부활자여.
그대와 수호자가 나타날 때 마법의 세상이 다시 오리라.
하나 성녀여, 수호자를 경계하라.
수호자는 마나를 지배하는 자.
자비 없는 마법의 신과 같으니…….
- 버려진 신전에서 발견된 고문서 중에서 -
❀ ❀ ❀
다그닥다그닥.
여러 기사가 호위하는 호화로운 마차가 시골길을 가로질렀다.
마차 안에 앉은 파리한 얼굴의 미인이 밖을 내다보았다.
“저긴가?”
“좀 더 가야 합니다, 공녀님.”
공녀라 불린 여자가 하얀 낯으로 창문에 몸을 기댔다.
“으으, 저기라고 해 줘. 죽을 거 같아…….”
“공녀님, 멀미 때문에 죽는 사람은 없습니다. 조금만 더 참아 보세요.”
“아니, 나라면 죽을 수도 있을 거 같은데…… 콜록.”
장난스러운 말투와 달리 가느다란 몸은 잔기침에도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주치의는 얼른 공녀에게 약사탕을 내밀었다.
사탕을 입에 문 하얗고 화사한 얼굴, 흐트러져도 요정 같은 백금발, 반짝이는 푸른 눈은 언뜻 보면 병색이라곤 없이 어여쁘기만 했다.
그렇지만 주치의는 걱정스레 제가 모시는 공녀를 쳐다보았다.
왕국에 셋뿐인 공작 가문 중 피어트 공작가의 외동딸에 절세미모까지 갖춰, 사교계에선 페이런의 백합이라 불리며 늘 추종자가 따라다니는 레아 피어트 공녀.
그야말로 핏줄, 미모, 인기까지 모두 가진 금수저 셀럽의 삶일 뻔했지만…… 그런 레아 공녀에게도 치명적인 결핍이 있었다.
건강.
공녀는 약체 중의 최약체였던 것이다.
사교계 사람들은 그녀를 두고 말했다. 파티마다 하얀 얼굴로 앉아 있는 모습이 청초하다고, 때때로 기침하는 모습이 바람에 흔들리는 연약한 꽃송이 같다고 말이다.
정작 레아는 그 말을 질색하며 싫어했다.
‘불길하게 사람을 꽃에 비유하지 말라고! 꽃송이는 바람에 흔들리다 떨어진다고! 그러잖아도 기침 한번 할 때마다 폐렴으로 죽을까 봐 겁나 죽겠는데!’
그녀의 건강은 그 정도로 심각했다.
타고나길 약체였고, 혈맥이 가늘어 약을 써도 가끔 상태가 좋아질 뿐이었다. 계속 들이붓는 피어트 공작가의 약재와, 오랜 병환에도 악착같이 버티는 레아의 성격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잘못됐을 터였다.
이제 방년 십구 세. 겨우 살려서 다 키워 놨는데도 여전히 공녀가 골골하자, 불안해진 주치의는 특단의 처방을 내렸다.
‘이대로는 안 되겠습니다. 좋은 곳에서 요양을 하시지요.’
‘좋은 곳에서 요양을 하면 좀 나을까?’
‘안 나아지시면 죽습니다!’
그래서 사교시즌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페이런 왕국에서 가장 물 좋고 공기 좋은 북부 헬칸으로 온 것이다.
레아는 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여기까지 왔으니 좀 건강해져야 할 텐데…….”
“공녀님, 나으려는 의지를 가지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북부까지 왔지. 콜록!”
주치의가 열심히 격려했다.
“힘을 내십시오. 십이 년 투병을 견딘 공녀님 아니십니까? 헬 산맥의 정기가 남다르다고 하니 방법이 있을 겁니다.”
“정기라.”
레아가 창밖으로 보이는 헬 산을 쳐다봤다. 멀리서 보기에도 영험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진짜 헬 산맥에서 기적이라도 일어나면 좋겠다.”
❀ ❀ ❀
레아를 태운 마차는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별장 앞에 도착했다.
“공녀님이 도착하셨다!”
그녀를 호위하는 기사들이 외치자 커다란 정문이 열렸다.
“……정문에서 저택까지 왜 이리 멀어?”
“공녀님 요양 중에 산책하시라고 정원을 넓게 꾸몄다고 들었습니다.”
레아는 골치가 아파 머리를 짚었다. 분명 요양하는 별장은 아담한 곳으로 골라 달라고 했는데, 공작가 사람들이 또 멋대로 돈을 바른 것이다.
넓고 화려한 별장에는 기사단과 많은 수의 고용인들까지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내가 또 공작가 스케일을 얕봤네.”
타고난 금수저들의 스케일은 따라잡을 수가 없다니까.
그녀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마차에서 내려 별장을 둘러봤다. 잘 가꿔진 정원보다 바로 뒤에 있는 헬 산이 더 눈을 끌었다.
“좀 더 아늑하게 요양하고 싶었는데 할 수 없지. 그래도 산 바로 앞이니까 공기는 좋을 거야.”
레아가 애써 장점을 되새기고 있는데 누군가 말을 걸었다.
“헬 산맥은 깊지요. 좀 더 조용하고 아늑한 곳도 있답니다.”
“넌 누구지?”
공작가의 별장 정원에 외부인이 들어와 있다니? 경계하며 차갑게 묻자 묘령의 여자가 허리를 숙였다.
“헬 산을 뒤지고 다니는 약초사입니다. 공녀님이 오신다는 말씀을 듣고 도움을 드리기 위해 찾아왔답니다.”
레아는 약초사를 훑어봤다.
약초사라기엔 몸놀림이 귀티 나는 것도 그렇고, 불쑥 말을 거는 행동도 좀 수상쩍었다. 그 눈빛을 읽었는지 약초사는 순박하게 웃어 보였다.
“분명 마음에 드실 겁니다.”
“……그래.”
레아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나타난 게 수상하긴 했지만 지역 토박이 약초사는 귀중한 인재였다. 헬 산맥을 뒤지고 다닌다니, 영험한 약초들을 더 잘 알지도 모른다.
“어디 한번 실력을 보지…… 콜록!”
“저런.”
약초사가 살짝 혀를 찼다.
“북부의 공기는 차지요. 저택에 불을 때는 중일 테니, 공녀님은 저와 함께 온천욕을 하러 가시면 어떨까요?”
“온천?”
“저택 뒷문으로 나 있는 오솔길을 조금만 올라가면, 은색 잎을 가진 단풍나무가 있습니다. 그 근처에 정말 영험한 온천이 숨어 있어요.”
레아는 솔깃했다.
여독 때문에 몸도 으슬으슬한데 야외에서 온천욕 하면 딱 좋겠다.
“그럼 호위를 불러서…….”
“공녀님, 별장은 헬 산 바로 아래에 있잖아요.”
약초사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잠깐 바람 쐬고 와도 괜찮을 겁니다.”
평소 같으면 듣지 않을 말이었다.
그렇지만 레아는 홀린 듯이 약초사를 따라나섰다.
“이리로, 이리로 오세요.”
저택을 지나, 별장의 뒷문으로 나와 오솔길을 오르자, 약초사의 말대로 혼자 은색으로 번쩍이는 단풍나무가 보였다.
진짜 잎이 은색이네.
레아는 신기한 단풍나무를 향해 다가갔다.
“여기 근처에 온천 같은 건 없는 거 같은데?”
레아가 돌아보았다.
“약초사?”
그녀를 여기까지 인도한 약초사가 보이지 않았다.
휘이잉.
아무도 없는 산에 바람이 불었다.
돌아본 산등성이에는 레아와 은색 단풍나무뿐이었다.
휘이이.
그녀는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눈을 깜박였다. 귀신에게 홀린 기분이었다.
“뭐야? 약초사? 어디 갔어?”
더럭 겁이 난 레아가 단풍나무 쪽으로 다가갔다.
설마 나무도 사라지는 건 아니겠지?
그녀가 확인하려고 손을 대는 순간이었다.
“어?”
몸이 아무 지지대 없이 기울었다.
“꺄악!”
철푸덕!
“아야야…….”
넘어진 레아가 발목을 잡고 신음했다.
아무래도 방금 넘어지면서 삐끗한 듯했다.
“뭐지?”
그녀는 얼른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동굴?”
분명 은색 단풍나무에 손을 댔는데 왜 이런 곳으로 이동한 거야.
레아는 주저앉은 채 둘러보았다.
인공적인 동굴이었다.
돌벽에서는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왔고, 크고 투명한 기둥들이 여기저기에서 그 빛을 받아 푸르게 빛났다.
“어?”
그리고 동굴 중앙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긴 은발이 흩어진 채 눈을 부릅뜬 모습이 조각 같은 남자가.
레아가 남자를 향해 물었다.
“저기요?”
남자는 답이 없었다.
그녀는 비틀대며 일어나 남자를 향해 다가갔다. 삔 발목이 아팠다.
“제 말 들리세요?”
남자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레아는 가까워질수록 남자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부릅뜬 얼굴 표정은 변화가 없었고, 몸 또한 조각상처럼 꼼짝하지 않았다. 바람도 불지 않건만 머리카락은 사방으로 흩날린 채였다.
마치 남자가 화를 내는 순간 얼려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우와.’
레아는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펄럭이는 고풍스러운 옷자락 사이로 쭉 뻗은 몸은 언뜻 보기에도 탄탄했다.
꽉 짜인 몸과 넓은 어깨는 늘씬하면서도 어딘가 야성적이었고, 신비로운 긴 은발은 부드럽게 흘러내리며 수려한 이목구비를 둘러쌌다. 우뚝한 코와 깎은 듯한 턱, 움푹한 눈두덩 속 차가운 회색 눈동자…… 남자는 온몸에서 고귀한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뭐지, 이건.’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남자의 외모에 그녀는 좀 긴장했다.
전설 속 엘프왕처럼 생긴 남자가 왜 이런 곳에서 얼음땡을 하고 있지.
‘함정이나 악마 같은 거 아니야? 건드리면 영혼을 속박당한다거나…….’
에비에비.
너무 갔다고 생각한 레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지나치게 잘생긴 데다 이러고 있으니 수상하긴 하지만, 그래도 여기 있는 사람이면 나가는 방법도 알지 않을까?
‘한 번만 건드려 보고 물러나자.’
꾸욱.
그녀가 남자의 팔을 버튼 누르듯 눌렀다.
“……저기요?”
“…….”
레아는 침을 꼴깍 삼켰다.
어쩐지 긴장한 그녀가 슬슬 뒤로 물러났다.
탁.
단단한 팔이 그녀를 붙들었다.
❀ ❀ ❀
레아는 순간 숨을 멈췄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냉막한 얼굴은 마치 가면 같았다. 유리알 같은 회색 눈동자가 삐걱대는 인형처럼 움직이며 천천히 초점을 맞췄다.
“……네가 나를 깨웠느냐?”
“네?”
레아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이 자연스러운 할배 말투는 뭐지.
얼굴과의 괴리감이 엄청났다.
“네가 나를 깨웠느냐고 물었다.”
자연스러운 하대에 레아가 인상을 찡그렸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다짜고짜 반말이라니?
그렇다면 이쪽도 똑같이 간다.
그녀가 남자에게 잡힌 팔을 흔들었다.
“일단 이거 놓고 말하지……?”
“도망칠지도 모르잖나.”
레아가 그의 건장한 몸을 훑어보았다.
“내가 도망간다고 못 잡을 것 같진 않은데?”
저 체격이면 레아쯤이야 열 명도 잡을 것 같았다.
남자가 딱딱하게 말했다.
“드래곤의 레어에 들어왔는데, 평범한 사람일 리 없다.”
“드래곤의 레어? 여기가?”
레아의 반문에 남자의 표정이 더 굳었다.
“설마 모른다고 할 셈인가?”
“모르는데.”
“그럴 리가…….”
그가 냉기를 풀풀 흘리며 의심스럽다는 듯이 레아를 내려다봤다.
“드래곤들은 어떻게 됐지?”
묻는 게 왜 다 이래.
깨웠냐느니, 드래곤이니. 무슨 전설이나 선문답도 아니고.
그녀가 황당해하면서도 꼬박꼬박 대답했다.
“드래곤은 오래전에 멸종했다던데?”
레아의 대답에 남자가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