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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나랑 맞춰 볼래요?-106화 (106/110)
  • 18.

    리첼이 말 한마디 잘못한 대가는 혹독했다. 몇 번이나 집요하게 붙잡는 바람에 그녀는 그날 밤 레녹스가에 돌아가지 못했다.

    밤새 수없이 많은 쾌락의 정점을 오가며 황홀한 기분에 리첼은 들뜬 숨을 토해내야 했다.

    ‘술 안 마신다고 결심해놓곤 왜 어긴 거야? 다시는 만취가 되도록 술 마시지 않을 거야!’

    찌릿한 쾌감에 몸을 맡기는 동안에도 머릿속에선 술에 의존해 울적한 기분을 떨쳐내려 했던 자신의 행동을 반성했다.

    ‘설마 오늘도 약을 먹이는 건 아니겠지?’

    다만 걱정이 되는 게 또다시 카일이 회복제란 이름으로 약을 먹이던가 회복 마법을 쓸까 봐 걱정되었다.

    “오늘은 약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리첼의 생각을 읽은 듯 카일이 선심 쓰듯이 말했다.

    ‘그래. 그게 어디야.’

    다행히 기력 회복제를 먹이지 않는다는 카일의 말에 리첼은 안심했다. 덕분에 잠깐의 잠은 잘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약을 먹이지 않는다는 말에 내가 왜 안도하고 있지? 약물 복용 그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건데. 항의는 못할 망정 왜 안심하냐고!’

    리첼은 그녀가 카일에게 조금씩 길들여지고 있는 것 같은 기묘한 감정을 느꼈다.

    “오셨어요?”

    다음날 마법으로 지난밤 정사의 흔적을 지우고 기력 회복 약을 먹고 기운을 차린 리첼이 레녹스가에 갔지만 아무도 그녀에게 밤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

    비아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소대로 리첼을 반겼고, 리리스는 그녀가 날이 밝은 후 돌아온 지 모르는 눈치였다.

    물어봤으면 당황했을 테지만 진짜 아무도 묻지 않는 건 그거대로 부끄러웠다.

    차라리 물어봤으면 변명이라도 하겠건만, 묻질 않으니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들 대강 짐작하는 눈치였다.

    ‘빨리 결혼하든지 아니면 뻔뻔해지든지 해야지.’

    리첼은 더 민망함을 느꼈다.

    * * *

    며칠 후 리첼은 펠릭스에게 서신을 보냈다.

    패트릭이 이미 그의 몸이 다 나았다고 일러줬지만, 진짜로 몸이 괜찮아졌는지 확인도 할 겸 걱정도 되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의 얼굴을 직접 보고 확인하고 싶었다.

    방문하기로 약속한 날, 카일이 어떻게 알았는지 리첼이 메리오너스가를 방문하기 전에 그녀의 방을 찾아왔다.

    “꼭 메리오너스가에 가셔야 되겠습니까?”

    그는 썩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볼멘소리로 투덜댔다.

    “저 대신 다쳤는데 당연히 제가 직접 가서 확인해야죠. 지난번에 카일 님이 제게도 말씀하셨던 거 잊어버렸나요? 메리오너스가로 가서 펠릭스 님의 상태를 직접 확인해 보라고 말이에요.”

    “제가 그분의 상처를 치료했으니 된 거 아닙니까? 현재 건강하다는 서신도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리첼은 카일에게 펠릭스와 편지를 주고받은 것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다.

    ‘분명 레이나 짓이야.’

    아마도 레이나가 카일에게 알려줬을 것이다. 오늘 메리오너스가를 방문한다는 이야기도 함께 말이다.

    리첼은 다음에 레이나에게 남자가 생기면 똑같이 해줘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카일에게 말했다.

    “못 믿겠다는 게 아니라 그래도….”

    리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카일의 손이 그녀의 손을 잡아 그의 품으로 이끌었다. 순간 청량한 향이 그녀의 코끝을 자극했다.

    카일에 대해 더욱 알아갈수록 느꼈다. 그는 독점욕이 강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리첼의 마음은 이제 완전히 카일에게 있는데도 그는 불안해 보였다.

    “카일 님이야말로 저를 못 믿으세요? 왜 그리 질투가 심해요?”

    리첼은 마음속에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카일을 흘겨보았다.

    “모르셨습니까? 이젠 저에 대해 당연히 잘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부족했나 봅니다. 또다시 알려드려야 하나요?”

    카일은 리첼의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고,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이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설마, 이 이상 내 몸에 손대는 건 아니겠죠?”

    리첼은 얼른 카일의 가슴을 밀어내며 그와 멀어지려 했다.

    얼마 전 리첼을 제 것이라고 낙인을 찍던 그의 모습이 떠오르자 몸이 달아오를 것만 같았다.

    “공녀님의 태도에 따라 고민하려 했지만 지금 태도를 봐선 오늘도 제 흔적을 남겨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만?”

    카일이 또다시 리첼의 팔을 잡자 무게중심이 무너진 리첼의 몸이 그대로 흔들리며 그의 품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숨결이 목에 닿으려고 하자 리첼은 손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

    “안 돼요. 펠릭스 님이 보시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세요?”

    “전 상관없습니다.”

    카일의 입가엔 음흉한 미소가 걸렸다. 리첼은 자꾸만 다가오는 그의 입술을 거절하느라 애를 썼다.

    카일은 결국 드레스를 살짝 내려, 살결 위로 그의 흔적을 남기고 나서야 물러섰다.

    “오늘은 이 정도로 만족하겠습니다.”

    리첼은 새겨진 꽃잎들을 거울로 확인했다. 다행히 드레스를 입으면 가려지는 위치였다.

    “이게 뭐예요?”

    리첼은 불만 섞인 소리를 하면서도 입꼬리가 올라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 *

    “오셨어요?”

    리첼이 탄 마차가 메리오너스가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를 반갑게 맞이하는 펠릭스의 얼굴이 보였다.

    밝게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아하니 다행히 몸에 이상은 없는 듯 보였다.

    리첼은 메리오너스가의 하녀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에 갔고, 펠릭스도 그녀의 뒤를 따라왔다.

    “몸은 정말 괜찮아요?”

    자리에 앉자마자 리첼이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물었다.

    “네. 아무 이상 없어요.”

    “다행이에요.”

    펠릭스의 입에서 아무 이상 없다는 말을 직접 듣고 난 후에야 마음의 짐을 덜어낸 기분이었다.

    그녀 때문에 혹시라도 펠릭스가 어떻게 될까 봐 전전긍긍한 지난날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카일 영식께 감사 인사 전해 주세요. 아니 이젠 마법사님이라고 해야 하나요?”

    “네. 아마도 조만간 궁정 마법사로서 인정받을 것 같아요.”

    리첼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주치의가 보더니 놀라더군요. 몸 안에 퍼진 독 따윈 없다고 말이에요. 하지만 어떤 독이었는지 듣자마자 주치의가 또다시 놀라더군요. 그의 말을 들으니 그 자리에서 치료를 받지 못했다면 제가 죽을 수도 있었단 생각에 정신이 아찔했지요.”

    펠릭스는 그가 다쳤던 그 날을 떠올렸는지 혀를 내둘렀다.

    “그날 저를 구하러 왔던 일을 후회하세요? 죽을 고비를 겪었잖아요.”

    리첼은 조심스레 그에게 물었다. 다행히 펠릭스가 무사했지만 미안한 감정은 여전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후회는 없죠. 내가 후회한다면 리첼 양은 미안한 감정 때문에 카일 영식을 버리고 내게 올 수 있나요?”

    “그건 좀….”

    리첼은 곤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면 미안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해요. 지금 저도 무사하고, 당신도 무사하니까요. 그때도 말했다시피 전 당신을 위해 죽어도 괜찮아요.”

    “농담이라도 그런 말씀 하지 말라니까요. 그러면 제가 메리오너스 자작님과 패트릭 단장님의 얼굴을 어찌 볼 수 있겠어요.”

    리첼이 정색하며 말하자 펠릭스는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은 듯 ‘쿡’하고 웃었다.

    “네, 농담입니다.”

    펠릭스의 미소를 보자 이제야 웃음이 나왔다. 리첼이 웃자 그가 따라 웃었고,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한참을 웃고 나서 리첼은 펠릭스에게 머뭇거리다 먼저 입을 열었다.

    “그동안 펠릭스 님을 오해한 것 같아서 죄송해요. 베스 언니의 사진을 본 날 당신을 그렇게 보내선 안 되었는데 말이에요. 순간의 감정에 못 이겨 급하게 보냈던 것 같아요.”

    “괜찮아요. 저도 이해해요. 제 실수죠. 당신이 오해할 수도 있다고 봐요. 하지만 전 베스와 리첼 양을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은 하지 않아요. 얼굴은 닮았는데 성격은 완전 다르니까요.”

    “그건 그렇죠….”

    펠릭스의 말을 듣고 리첼은 베스에 대해 떠올렸다.

    천방지축인 그녀와는 달리 베스는 얌전하고 조용했다. 얼굴이 많이 닮았지만 분위기는 전혀 달랐던 것 같기도 했다.

    “저는 리첼 양의 스쳐 지나가는 남자여도 괜찮아요. 당신만 행복해진다면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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