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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나랑 맞춰 볼래요?-104화 (104/110)
  • 18.

    리리스가 지칠 때쯤 카일은 그녀를 비아에게 맡기고 리첼을 찾으러 가려 했다.

    테라스로 향하는 카일을 발견했는지 스펜서 후작이 카일에게 다가왔다.

    “어디를 가려는 게냐? 네 짝은 클라라 양 아니더냐?”

    “아버지께 할 도리는 이 정도면 된 것 아닙니까? 체면은 충분히 지켜드린 것 같습니다.”

    “카일!”

    스펜서 후작은 카일의 말을 듣고 화를 냈다.

    “왜 제 의견은 듣지 않고 멋대로 일을 벌이신 겁니까?”

    “다 널 위해서 그리고 우리 스펜서 가문을 위해서란다. 네가 바빠서 짝을 찾지 못하니 내가 찾아주려는 건데 그게 무슨 문제가 있느냐?”

    후작은 카일의 의견을 무시했으면서 뻔뻔하게 자기의 잘못이 없다는 듯 굴었다.

    “아까 두 분의 명예를 지켜드리기 위해 말씀드리지 못한 말이 있습니다.”

    카일은 아까 하지 못했던 말을 지금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늦게 말할수록 후작이 어떤 일을 벌일지 알 수가 없어 불안감이 들었다.

    “내 체면이라니?”

    카일의 말에 후작의 눈썹 한쪽이 꿈틀거렸다.

    “제 연인은 따로 있습니다. 클라라 님 앞에서 말씀드리기 곤란해서 차마 말하지 못했습니다.”

    “뭐? 누구지? 대체 어떤 여인과 만나고 있느냐?”

    그동안 카일이 내색하지 않았기에 스펜서 후작은 놀란 눈치였다.

    “귀족은 맞겠지?”

    그 와중에 그는 상대의 신분을 확인했다.

    입이 싼 스펜서 후작의 귀에 들어갔다간 순식간에 소문이 퍼질 것을 알기에 카일은 그동안 일부러 내색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그가 모르는 새에 클라라와 약혼이 진행되어 결혼이야기까지 나올 것만 같았다.

    지금 후작의 반응을 보니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만 같았다. 사제를 그만둔다고 소문낸 것도 후작이었으니 되도록 늦게 알리려 했건만.

    “일단 궁정 마법사 임명식까진 비밀을 지켜주신다고 약조하신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누군데 그렇게 뜸 들이지? 어서 말하거라.”

    “약조 먼저 해주십시오!”

    카일이 단호하게 말하자 후작은 잠시 멈칫했다.

    “알았다. 하지만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는 반대할 수밖에 없구나.”

    “마음에 들어 하실 겁니다.”

    카일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체 누구기에 그렇게 뜸을 들이느냐?”

    “레녹스 공작가의 장녀 리첼 님입니다.”

    “!”

    카일의 말에 스펜서 후작의 눈이 번쩍 뜨였고, 곧이어 그가 괜한 오지랖을 떨었다는 아쉬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내가 괜한 짓을 벌였구나. 눈앞에 황금 거위가 있는 것도 모르고 다른 거위를 택할 뻔했어.”

    역시나 후작은 그 와중에도 레녹스 가문을 평가했다.

    “설마 네가 레녹스 공작님의 후원을 받는 것도 공녀님과 연인 사이라서 그런 것이냐?”

    “아닙니다.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룩스 대륙에서 우연히 공작님을 마주쳐서 후원을 받게 되었을 뿐입니다.”

    “우연이 겹치면 운명이라더니 너와 리첼 양을 가리키는 말이었구나.”

    클라라를 밀어붙일 땐 언제고 이제 와서 갑자기 운명이라니.

    스펜서 후작의 미소가 썩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그래도 앞으로 아버지가 자신의 앞에 다른 여인들을 들이밀진 않을 거란 생각이 들자 카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작과의 대화를 마치고 카일은 리첼을 찾으러 테라스에 나가서 둘러보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담소를 나누는 커플의 모습만 보였다.

    ‘어디 계시려나?’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중 구석에 쪼그려 앉아있는 리첼의 모습이 보였다.

    “공….”

    그는 그녀를 부르려다 멈칫했다.

    리첼의 손안엔 꽃 한 송이가 있었고, 그녀는 꽃잎을 하나씩 떼고 있었다.

    “좋아한다. 안 좋아한다. 좋아한다. 안 좋아한다.”

    좋아한다고 말하며 꽃잎을 뜯을 땐 해맑게 웃었고, 안 좋아한다라고 말하며 꽃잎을 뜯을 땐 우울해 보였다.

    꽃잎 하나 떼는데 시시각각 변하는 그녀의 모습이 신기해 카일은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안… 좋아한다. 으앙. 안 좋아한대!”

    무슨 꽃점을 본지는 모르겠으나 리첼은 마지막 꽃잎을 떼면서 안 좋아한다는 말을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원하던 결과가 나오지 않았는지 그녀는 줄기만 남은 꽃을 그대로 손에서 놓아버린 채 앙탈을 부리며 일어났다.

    “왜, 왜 안 좋아하는데? 나 좋아한다며?”

    리첼은 꽃점의 결과를 부정하며 고개를 들었고, 그러다 카일과 눈이 마주치자 씨익 웃었다.

    “어? 카일이다?”

    “….”

    보아하니 리첼은 만취한 것 같았다. 대체 얼마나 마셨기에….

    “아하하. 카일이다. 카일!”

    리첼이 카일에게 다가오려 했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지 비틀거렸다.

    “괜찮으십니까?”

    카일은 재빨리 달려가 리첼을 부축했다.

    “공녀님. 많이 취하셨습니다. 이만 돌아가셔야 할 것 같군요.”

    똑바로 서 있지 못하자 걱정이 되었기에 리첼을 얼른 공작가로 데려다줘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

    “나? 안 취했는데?”

    하지만 리첼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카일의 말을 부정했다.

    “취하셨습니다.”

    “안 취했다니까. 헤헤.”

    해맑게 웃는 리첼을 보니 카일은 취한 그녀의 행동이 리리스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리첼은 갑자기 어리광도 부리고 평소엔 보이지 않던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아니요. 많이 취하셨습니다. 돌아가시죠.”

    카일은 제대로 서 있지 못하는 리첼을 안아 올리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의 검지가 그의 가슴을 콕 하고 찌르더니 그대로 그 끝을 살며시 문질렀다.

    “내 껀데….”

    “….”

    리첼의 말에 카일은 잠시 멈칫했다. 손가락이 닿았을 뿐인데 화살이 그의 가슴을 찌른 듯한 감각이었다.

    “내 꺼라고! 난 내 꺼라고 밝히지도 못했는데 왜 클라라의 파트너로 참석해요? 다들 오해하잖아요!”

    멈칫한 사이 또다시 리첼의 말이 이어졌다. 카일은 그 모습이 제법 귀여워 보였기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없이 그녀를 지켜보았다.

    “혹시 클라라가 마음에 들었어요? 응?”

    리첼은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왜 대답이 없어요?”

    리첼의 양 볼이 부풀어 오르더니 그녀는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카일은 질투하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대답을 안 하냐고요… 왜? 또 키스로 입막음하려고요?”

    “….”

    입맞춤 따윈 할 생각이 없었는데 그 말을 들으니 꼭 입을 맞춰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취한 사람을 상대로 강제로 입을 맞출 순 없었다.

    “들어가시죠.”

    카일은 스멀스멀 올라오는 욕망을 참아내려 애를 쓰며, 리첼의 어깨를 붙잡고 무도회장으로 돌아가려 했다.

    어느새 테라스에는 카일과 리첼 두 사람만이 있었다. 날씨가 제법 쌀쌀해져서 다들 들어간 것 같았다. 카일은 외투를 벗어 리첼에게 걸쳐주자 리첼이 배시시 웃었다.

    “아, 따뜻해라.”

    리첼의 미소를 보니 외투를 너무 늦게 줬다는 후회가 들었다.

    “이젠 들어가실까요?”

    더 추워지기 전에 카일은 그녀를 안으로 데려가려 했다.

    “내가요? 싫은데요?”

    그러자 리첼이 다리를 움직이지 않은 채 거절했다.

    “날씨가 춥습니다. 더 추워지기 전에 들어가지 않으면 감기 걸리실 겁니다.”

    “싫다고요. 들어가기 싫어요.”

    카일이 설득하려 해도 리첼은 안으로 들어가려 하질 않았다.

    “왜 들어가기 싫으신 겁니까?”

    평소 고집을 부린 걸 거의 본 적이 없기에 카일은 리첼의 태도가 낯설었다.

    “드, 들어가면 또다시 카일 님과 클라라 양이 함께 있는 모습을 봐야 하잖아요.”

    갑자기 자신감이 떨어지는 모습으로 리첼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저는 옆에 있습니다만?”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거 보기 싫어. 들어가면 또다시 내 눈앞에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일 거 아냐.”

    리첼의 눈에선 눈물방울이 맺히려 했지만 그녀는 울음을 속으로 삼키려 하고 있었다. 너무 취한 상태라 옆에 카일이 있는 걸 잊어버린 것 같았다. 방금 그의 이름을 외친 것도 까먹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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