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도 나랑 맞춰 볼래요?-103화 (103/110)

18.

사실 카일은 리첼의 파트너로서 무도회에 참석하려 했다.

―죄송한데 그날은 일이 있습니다.

무도회에 파트너로서 참석하자는 리첼의 제안을 거절하자 그녀의 얼굴엔 서운함이 역력했다.

요새 기분도 좋아 보이지 않아 가뜩이나 신경 쓰였는데 울 것 같은 그 표정이 계속 카일의 마음에 걸렸다.

그는 궁정 마법사로 인정받기 위해 매일 황실에서 요구하는 물건들을 만들어야만 했다.

황실에서 카일의 능력을 착취하긴 했지만 그에 따른 지위, 영토가 수여될 예정이고, 명예까지 뒤따라오기에 그의 입장에서 손해 볼 건 없었다.

다만 무도회에 참석할 시간이 없으니 그게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제가 몸이 좋지 않아 저 대신 언니가 무도회에 리리스를 데리고 가기로 했어요. 카일 선생님께서 언니의 파트너가 되어주신다면 아픈 몸도 바로 나을 정도로 기쁠 것 같아요.]

참석하지 않겠다던 리첼이 몸이 좋지 않은 레이나 대신 무도회에 참석하게 되었다는 레이나의 서신을 받자 카일은 어떻게든 시간을 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무도회가 열리는 날 황실에서 요구한 마법 도구들이 그의 스승도 만들어낼 수 있는 것들이었다.

―저는 급한 일이 있으니 오늘은 스승님 혼자서 모든 걸 만드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카일은 스승에게 모든 걸 미루고 무도회에 참석하려 했다.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구먼.

스승이 투덜거리자 카일이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그, 그렇게 보지 말게나. 일한다고. 내가 언제 안 한다고 했나?

카일의 눈빛에 주눅이 든 그는 묵묵히 마법 도구를 만들기 시작했다.

카일이 무도회가 열리는 별궁으로 이동하던 중 우연히 스펜서 후작을 마주쳤다.

―바쁘다는 핑계로 요새 얼굴 보기 힘들더니 이곳에서 마주치는구나. 오늘도 바쁜 게냐?

―오늘도 일이 있지만 잠깐 무도회에 참석하려 합니다.

―잘 됐군.

스펜서 후작은 어째선지 그가 입을 옷을 마련해놨고, 카일을 끌고 가더니 연미복으로 갈아입혔다.

―오늘은 클라라 양의 파트너로서 옆에 서 있어야 한다.

후작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카일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리첼의 파트너로 참석하기 위해 무도회장을 가려 했는데 갑자기 클라라의 파트너라니.

그는 아버지의 제안을 거절하려 했건만.

―오늘 하루만이라도 옆에서 있어 주려무나. 내가 클라라 양에게 말한 것도 있는데, 오늘만이라도 내 자존심을 세워줄 순 없는 게냐?

보아하니 스펜서 후작은 클라라에게 카일을 그녀의 파트너로 데려올 수 있다고 큰소리친 모양이다.

카일이 우연히 황궁에서 그를 마주친 것이 아니라 후작은 그를 찾으러 다녔기에 마주친 것이다. 그러니 연미복도 미리 준비가 된 것도 후작의 계획 중 하나였다.

―쓸데없는 짓을 하셨습니다.

카일은 작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쓸데없다니! 다 네 미래를 위해서야.

스펜서 후작은 가문을 제일 중요히 여겼고, 자식들도 권세 있는 집안과 맺어지길 바라고 있었다.

카일을 만나기 위해 스펜서가를 들락거리는 영애 중에 후작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클라라였던 모양이다.

그녀의 가문인 모턴 공작가는 제국에서 레녹스 공작가에 견줄 정도의 막강한 권력을 지닌 가문이었다.

그동안 스펜서가를 들락날락하는 여인들이 꽤 있었지만 카일은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아버지가 그러다 말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을 해서였다.

하지만 클라라의 파트너로서 갑자기 끌려온 것을 보니 그가 모르는 사이에 후작이 클라라와 약혼이라던지 그 외 무언가를 벌일 것만 것 같았다.

―제 연인은….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스펜서 후작에게 그의 연인은 리첼이라고 밝히려는 그 순간.

―여기들 계셨네요?

클라라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클라라 양 오셨군요.

스펜서 후작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클라라를 반겼고, 카일은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작은 숨을 내쉬었다.

면전에서 클라라와 스펜서 후작에게 그의 연인인 리첼이기에 그만두라고 직접 말했다간 두 사람의 체면이 깎일 수도 있었다.

‘어쩔 수 없군.’

공개적인 망신을 줄 수 없었기에 그는 오늘 하루만 클라라의 파트너로 참석할 수밖에 없었다.

참석은 하되 클라라가 희망을 품을 만한 행동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려 했다.

막상 무도회장으로 도착하니 카일의 시야엔 클라라가 들어오지 않았다.

―오늘 제 파트너가 되어주셔서 감사해요. 다들 우리를 보며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생각하겠죠?

옆에서 그녀가 끊임없이 말을 걸었지만 카일의 귓가엔 그녀의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의 온 신경은 리첼을 향해 있었다.

클라라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면 가뜩이나 요새 좋지 않은 리첼의 기분이 더욱 침울해질 것 같았다. 역시나 우려하던 대로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은 밝아 보이지 않았다.

‘첫 춤만 추고 난 다음 해명이라도 하자.’

그럴 생각으로 카일은 클라라와 춤을 추려는 그때 리첼도 다른 남자와 춤을 추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리첼이 첫 파트너로서 춤을 추는 남자는 카일도 아는 얼굴이었다.

‘분명히 메리오너스 가문의….’

리첼은 일부러 보란 듯이 그 남자의 동생을 첫 춤 상대로 선택했을 것이다. 이유를 알면서도 카일의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펠릭스 메리오너스.

겨우 떨쳐냈다 싶으면 어떻게든 리첼의 마음의 빈틈에 파고들었다.

두 사람이 이미 끝난 관계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신경 쓰였다.

첫 춤이 끝난 후 카일은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생각에 후작과 클라라를 내버려 둔 채 곧장 리첼에게 다가갔지만 그녀는 그의 춤 신청을 거절했다.

기분이 많이 상한 것처럼 보여 잠시 달래주려 했지만 해명할 시간도 없이 스펜서 후작이 다시 카일을 불렀다. 그의 부름에 카일은 후작에게로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오늘 네 파트너는 클라라 양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춤은 그만 추고 클라라 양과 대화를 나누며 친해지는 것이 어떠냐? 네가 그동안 바빠서 통 얼굴을 보지 못했으니. 쯧.”

“알겠습니다.”

클라라를 배려하기 위해 카일은 일단 후작의 말을 듣기로 했다.

“선생님!”

그런데 클라라와 많은 대화를 해보기도 전에 리리스가 그에게 달려왔다. 그 순간 리리스는 카일의 구세주였다.

그에게는 퉁명스러운 태도를 보였으나 일부러 리리스를 방패로 삼아 클라라와의 사이를 방해하려는 리첼의 의도를 생각하니 웃음이 나올 뻔했다.

자꾸만 그들을 향해 힐끔힐끔 바라보는 리첼의 시선을 즐기며 카일은 리리스를 반겼다.

“카일 님 다음에 언제 시간….”

“리리스 님 얼굴에 케이크가 묻었군요.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카일은 리리스를 핑계로 클라라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얼굴이 붉어지며 리리스를 쏘아보는 그녀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다행히 리리스는 그 시선을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다음 기회에 좀 더 많이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네요.”

“그러는 게 좋을 것 같군요. 클라라 양.”

카일의 옆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리리스의 행동에 클라라와 스펜서 후작은 지쳤는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작은 숨을 내쉬었다.

말을 마친 그들은 카일과 리리스에게 인사를 한 후 각자 다른 친한 이를 찾고자 카일의 곁에서 멀어졌다.

카일과 점점 멀어질수록 클라라의 눈빛에는 아쉬움이 그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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