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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나랑 맞춰 볼래요?-98화 (98/110)
  • 17.

    “지금 저는 어디로 가나요?”

    레녹스 공작이 감옥을 떠나고 난 뒤 호위병들이 힐다를 어디론가 끌고 가고 있었다.

    그들이 발걸음을 멈춘 곳은 감옥 옆에 있는 작은 방이었다. 문을 열자 힐다는 너무 놀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온갖 고문 도구들이 있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아. 두려워하실 필요 없어요. 지금 이 모든 걸 사용할 건 아니니까요.”

    호위병의 말은 다음에 힐다를 고문할 예정이라 말하는 것 같았다.

    “왜, 왜 저를 이, 이곳에?”

    “공작님께서 게임 하나를 제안하셨어요. 고마운 줄 아세요. 생각보다 큰 처벌은 아니니 말이에요. 지명 수배범으로 전국에 당신의 얼굴을 그린 그림이 퍼질 거요. 그리고 우리는 당신을 풀어줄 겁니다.”

    “아, 아니 왜 제 그림이?”

    힐다가 항의하려고 하자 호위병이 들고 있던 창을 쾅 하고 내리치며 그녀를 위협했다.

    “지명 수배범의 몸으로 자유롭게 어디든 달아나십시오. 그러면 숨바꼭질을 좋아하시는 레녹스 공작님께서는 당신을 찾으러 다니는 여행을 하실 거요. 그게 언제가 되리라곤 공작님을 제외하곤 아무도 모를 거요.”

    “자, 잡히면 어, 어떻게 되나요?”

    힐다는 호위병의 기세에 눌려 말을 더듬었다.

    “잡힌다면 다시 고문실로 끌려와 고문당하게 되겠지만 역시나 잘 피한다면 잘 살 수 있겠지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처벌이 어디 있어요?”

    힐다는 듣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평생 언제 찾으러 올지 모르는 공포에 시달리라는 말과 같았다.

    “선처해준 걸 고맙게 여기세요. 고문실에서 맞아 죽어도 당신의 죽음에 의문을 갖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선처라니요. 이게 무슨 선처예요? 당신들 선처라는 말뜻을 알긴 알아요?”

    힐다가 다시 반박하려 했지만 호위병들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며 하던 말을 이어서 말했다.

    “레녹스 공작님께서는 여행이 취미니 잘 숨어다니세요. 조금이라도 흔적을 남기면 레녹스가의 정보망에 걸릴 거고, 바로 잡으러 갈 겁니다, 우연히 마주쳐도 마찬가지일 테고요. 고문을 받은 후에는 다시 풀려날 겁니다. 그리고 또다시 숨바꼭질이 시작할 겁니다.”

    “붙잡히면 고문을 당하고 다시 풀려난다고요? 말이 돼요? 지명 수배당한 채로 어떻게 마음 편히 살아갈 수 있나요? 네?”

    사람이 장난감도 아닌데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지.

    말도 안 되는 처벌에 힐다가 자꾸 반박하자 호위병들은 귀찮다는 말투로 대답했다.

    “그건 당신 사정이고요. 목숨만 붙어있는 걸 다행이라고 여겨요. 공작님께서 독특하신 분이라 재미난 게임을 즐기실 뿐이지요. 게다가 당신은 신전의 기부금도 횡령했다던데…? 참 무서운 짓을 많이 벌이셨더군요.”

    “솔레아 신께서는 이해해주실 거예요. 저같이 불쌍한 사람에겐 돈을 빌려주며 자비를 베풀어주실 거라고요. 난 성녀였으니까요.”

    힐다는 기부금을 일부 썼지만 당당했다. 어차피 그녀도 솔레아 신을 위해 일했으니 신전에 기부한 돈을 조금 빌려 쓰는 게 뭐가 문제냐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중에 그 금액보다 더 많은 기부금을 내면 문제 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언제 적 성녀 얘기인가요? 당신 때문에 신전이 발칵 뒤집혀서 지금 난리인데 혼자 태평한 소리 하고 있네요. 귀족들이 낸 기부금에 손을 대다니!”

    호위병은 갑자기 흥분하며 화를 냈고,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했다.

    돈 좀 빌려 쓴 게 뭐가 문제라고 신전에서 난리가 나는지.

    “당신 같은 끔찍한 성녀가 또다시 나타날까 봐 다음 성녀를 뽑는 건 일단 유보했고, 앞으로 뽑지 않을 거란 소문도 돌고 있다고요. 당신이 성녀를 꿈꾸는 사람들의 희망을 짓밟았단 말이에요.”

    “그게 뭐 어때서요.”

    힐다는 별거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어차피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었기에 그런 건 그러든지 말든지 그녀의 관심 밖의 일이었다.

    “당신의 얼굴이 그려진 그림이 이제 전국에 팔린다면 그들이 당신의 얼굴을 보고 돌을 던질 수도 있는 상황이라고요! 이제야 지금 당신 상황 좀 파악하려나? 풀려나는 순간 당신의 목숨은 아무도 책임 못 져요. 편히 죽을 거란 각오는 하지 말아야 할 거요.”

    목숨이라니…. 힐다는 지금 이 자리가 너무 무서워 도망가고 싶었지만 이젠 그럴 수 없었다.

    호위병 말에 따르면 더 이상 그녀가 도망갈 곳이 없다는 걸 의미했기 때문이다. 점점 행복한 삶을 살 희망이 줄어들어 절망의 구렁텅이 속으로 빠져드는 것만 같았다.

    “차, 차라리 날 황실로 데려가 줘요. 거기서 처벌을 받을래요! 옥살이가 낫겠어요. 어떻게 공작가에서 제 처벌을 결정할 수 있죠?”

    힐다는 이 이상한 처벌을 겪기 싫었다. 그래서 그녀는 몸부림쳤다.

    “레녹스 공작님께선 황실과 동등한 처분권을 가지고 계시니 황실에 가도 소용이 없어요. 레녹스 가문이 그런 막강한 권력을 가졌으니 아무도 그 가문을 건드는 사람은 없는데…. 당신같이 현실 파악 못 하는 사람만 제외하면 말이에요.”

    “마, 말도 안 돼요. 그런 가문이 어, 어디 있다고.”

    힐다는 두 귀로 들었어도 지금의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귀족들이 아무리 콧대가 높아도 황제의 아래 아니었던가. 그런데 황실도 건드리지 않는 가문이 있다니….

    힐다는 계속 말이 안 된다고 외쳤지만 호위병들은 그저 그녀를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아. 그리고 내보내기 전에 고문실에서 한 가지 사용하고 내보낼 거예요. 도통 쓸 일이 없어서 걱정했는데 녹슬기 전에 한 번은 사용해볼 수 있다고 공작님께서 좋아하셨어요.”

    그리곤 생각났다는 듯 공작의 말을 전했다.

    “시, 싫어!”

    힐다가 격하게 발버둥 쳤지만 소용없었다. 방 안으로 끌려 들어간 후 작은 의자에 억지로 앉히고 의자에 몸이 묶였다.

    “지금은 붙잡히게 된다면 어떤 일을 당할지 미리 경험할 뿐이에요. 그러니 겁먹지 마세요. 잘 도망 다닌다면 이런 일 겪지 않을 테니 말이에요. 잘 도망 다닌다면 말이죠,”

    병사의 의미심장한 마지막 말에 힐다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레녹스 공작가로부터 벗어나기 어렵다는 말 같았다.

    “사, 살려줘요. 제발!”

    힐다는 계속 벗어나려고 몸부림쳤지만 갑자기 들어온 배에 묵직한 일격으로 인해 더 이상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일시적인 고통이 너무 커서 그녀는 신음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꺄아아악! 아악!”

    몇 분 후 고문실 밖에선 고통에 찬 힐다의 비명소리가 끊임없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주위에 있는 그 누구도 그 소리를 듣고도 모른 체하며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지하 공간에서의 고통스러운 비명은 저택 위에까지 이르지 못한 채 레녹스가의 지하실에서만 계속 울려 퍼졌다.

    * * *

    “힐다를 이용해서 여행 다닐 핑계를 만드시는구나.”

    힐다의 처벌에 관한 내용을 듣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오라버니의 버릇을 고치겠다는 핑계를 대고 일을 내팽개치고 놀러 다니더니 이번에도 아버지는 리첼의 복수를 핑계로 놀러 다닐 건수를 만든 셈이다.

    물론 아버지의 의견에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자리를 비울 때마다 대신 일을 해야 하는 루이스 오라버니가 불쌍할 따름이었다.

    리첼은 힐다가 풀려나기 전 그녀를 만나기 위해 지하 감옥으로 갔다.

    “사, 살려주세요.”

    원래 말랐지만, 몸은 이젠 뼈와 가죽만 남을 정도로 야윈 힐다가 리첼의 얼굴을 보자마자 납작 엎드리려 말했다.

    몸 군데군데에는 상처의 흔적이 있었다. 그동안 고문이라도 당한 듯한 모습이었다.

    리첼은 몸을 숙여 힐다와 마주 보았다. 그녀의 눈빛 속엔 얼마 전 리첼을 향해 당당하게 위협하던 살기는 없었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만 있을 뿐이었다.

    “갑자기 왜 이래? 지난번 내게 칼을 들이밀었던 그때처럼 자신 있게 소리치시지?”

    “제, 제가 잠시 미쳤었나 봐요. 그땐 정신이 나갔어요. 저, 저 좀 살려주세요.”

    힐다의 손이 철창 밖으로 나와 리첼의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그리곤 흐느껴 울며 리첼에게 애원했다.

    “….”

    리첼은 아무런 대답 없이 그냥 힐다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의 치마를 잡고 있던 손은 더욱 힘이 들어갔고 치마는 점점 더 구겨졌다.

    “고, 공작님이 너…무 무서워요. 밤마다 섬뜩한 붉은 눈이 저, 저를 감시해요. 저, 전 잠을 잘 수 없어요. 사, 살려주세요.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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